■ ‘경주이씨의 유래’ 오류 수정 - 10
제목 ‘경주이씨 유래’라는 장문의 글입니다.
원 제목 ‘경주이씨의 유래와 역사’의 글에 다른 자료를 보완하여 쓴 글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료를
모아 글을 써 올렸으나 잘못된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은 【.............】로 나타내고 이견과 소견이 다른 부분에는 * 표시를 한 후 아래에 ▲[...........]로 나타낸 뒤 소견)으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원문에 '몇 대조'로 표기한 부분은 누구인가?를 알기에 힘이 들어 바로 '중시조 몇 세'로 나타내었습니다.
'몇 세손'으로 읽은 부분은 '세=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어 잘못 읽은 글로 이도 원문에 바르게 나타내었습니다.
▲[*1890년대 광무연간(光武年間)의 ‘갑진보(甲辰譜)’에서 시조 이후 ‘35대에 걸친 실전세계’를 다시 찾아내어 수록함으로써 잃어버린 뿌리를 그런대로 규명했다고 전한다.]
소견)
‘35대 실전세계’를 다시 찾아내어 수록함으로써 잃어버린 뿌리를 그런대로 규명했다고 전한다?
아닙니다.
‘35대로 된 실전세계’는 그 시발을 광무 8년(1904년) 갑진년 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28대이던 35대이던 19세기 말까지 전연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 경산군수 재직(1902년 ~1906년 4년재직) 중에 군수공(휘 계필)이 쓴 광무 8년 발간의 갑진보 서술(敍述)에 ‘일가 사람이 옛날 간행본 한권을 받들고 와서 우리시조 표암 선생이하 소판공 이상 35대의 대계가 쓰여 있는데 책이 헐고 좀벌레가 먹어 다시 간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으니 어찌 성력을 다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니 ‘35대 실전세계’가 언급되었습니다.
1978년도 간행 경주이씨 무오보에는 실전상계가 약 150년 전쯤 분적종인 합천이씨 가보에서 소판공의 상계에 관한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이에 이 내용이 이학영이 주문사로 북경에 가던 중 익재공 혈손을 만나고 선조의 실전계를 당지판각으로 된 보첩 1권을 갖고 와 홍문관 도승지 이인명에게 말하니 이를 찬(撰)하고 진계(進啓)하니 왕이 윤허하였다고 하나 이에 앞서 분적종 합천이씨에서 간행한 기축보(1529년). 갑술보(1754년). 신유보(1801년). 병자보(1876년). 정미보(1907년)에도 실전세계를 등재한 사실이 없습니다.
1932년 임신대보 시에 '세계원류 원도(世系源流圓圖)'를 싣고 주문사 이학영. 전주인 이인명의 국조방목 사마방목 국조실록 등 여러 서적에도 고증이 없어 후일에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35대로 된 실전세계'는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박에 없으며 양 실전세계는 고증이 되기를 바라고 참고로 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설에서는 조선 말기 무렵에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 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시조 이알평(李謁平)으로부터 이거명(李居明)까지 36대의 명단을 찾아내어 족보에 수록함으로써 지금의 족보가 완성되었다고도 전한다.】
소견)
지금의 족보라는 것이 시조를 1세로 하여 작성된 것이 아니고 중시조를 1세로 하여 그 아래 후손들을 세수별로 등재하여 편성한 족보입니다.
분적종 합천이씨 족보에서 ‘35대 실전세계’ 운운은 근거 없는 내용이고 이 족보에서 35대 계대를 찾아내어 수록하여 족보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실전(失傳)된 계대의 근거가 정확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때문에 이 자료의 발견경위와 내용과 관련해서는 ‘정묘대종보(丁卯大宗譜) 실전세계의 고찰(考察)’에서 이를 신빙할 수 없다는 지적이 대두되고도 있다.】
소견)
실전(失傳)된 계대의 근거가 정확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빙할 수 없다는 지적이 대두된 것도 아니고 ‘35대 실전세계’는 중앙화수 회에서 조사연구 분석결과 사실적이지 못한 계대라고 밝힌 것이고 족보에는 참고로 올린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本)의 이씨(李氏)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분관(分貫)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분관과 분파의 내력을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우선 시조 후손에서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이씨(陜川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가 갈라졌다.
중시조인 이거명(李居明)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졌다.
*이거명(李居明)의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이씨(平昌李氏)로,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이씨(加平李氏)로, 5세손 이주좌(李周佐)의 후손이 아산이씨(牙山李氏)로, 6세손 이우칭의 후손이 재령이씨(載寧李氏)로 분관되었다.
* 그리고 이양식(李陽植)의 후손이 우계이씨(羽溪李氏)로, *이임간(李林幹)의 후손이 장수이씨(長水李氏)로,*15세손 이전(李筌)의 후손이 덕은이씨(德恩李氏)로, *16세손 이자영(李自英)의 후손이 진위이씨(振威李氏)로, *17세손 이영행(李永倖)의 후손이 진주이씨(晉州李氏)로, *22세손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원주이씨(原州李氏)로 각각 분관되었다.
*경주이씨의 결속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 글에서도 내용상 잘못된 곳이 많고 ‘몇 세손’을 세와 대는 다른 뜻인 ‘이의’논지인 ‘세=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어 잘못 기술하였습니다.
▲[*우선 시조 후손에서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이씨(陜川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가 갈라졌다.]
⇒ 우선 시조후손에서 분적한 분적종은 이개(李開)를 분관시조로 하는 합천이씨(陜川李氏), 이위(李渭)를 분관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 이구(李球)를 분관시조로 하는 우계이씨(羽溪李氏)로 갈라졌다.
많은 이씨 중에 계대가 밝혀져 경주이씨로 인정된 분적종은 모두 8개입니다.
‘시조 후손’에서 분적한 분적종은 아래와 같이 3개분적종입니다.
이개(李開)를 분적시조(분적조. 분관조)로 하는 그 후손들의 합천이씨(陜川李氏),
이위(李渭)를 분적시조로 하는 그 후손들의 차성이씨(車城李氏).
이구(李球)를 분적시조로 하는 그 후손들의 우계이씨(羽溪李氏)가 있습니다.
‘중시조 후손’에서 분적된 분적종은 아래와 같이 5개분적종입니다.
중시조의 5세손 (⇒ 중조 6세) 이주좌(李周佐)를 분적시조로 한 그 후손들이 아산이씨(牙山李氏)로
중시조의 6세손 (⇒ 중조 7세) 이우칭(李禹偁)을 분적시조로 한 그 후손들이 재령이씨(載寧李氏)로
중시조의 17세손 (⇒ 중조 18세) 이영재(李永榟)과 이군재(李君榟) 형제를 분적시조로 한 그 후손들이 진주이씨(晉州李氏)
중시조의 22세손 (⇒ 중조 23세) 이반계(李攀桂)를 분적시조로 한 그 후손들이 원주이씨(原州李氏)로
중시조의 15세손 (⇒ 중조 16세) 이직간(李直幹. 李林幹이임간)을 분적시조로 한 그 후손들이 장수 이씨(長水李氏)
▲[*이거명(李居明)의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이씨(平昌李氏)로,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이씨(加平李氏)로,]
소견)
이윤장(李潤張)의 평창이씨(平昌李氏),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가평이씨(加平李氏)는 경주이씨 분적종이 아닙니다.
계대를 온전히 밝힐 수 없어 중앙화수회에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