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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의 유래’ 오류 수정 - 7

녹전 이이록 2019. 2. 26. 09:57

경주이씨의 유래오류 수정 - 7


제목 경주이씨 유래라는 장문의 글입니다.

 

  원 제목 경주이씨의 유래와 역사의 글에 다른 자료를 보완하여 쓴 글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료를

  모아  글을 써 올렸으나 잘못된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원문은 .............로 나타내고 이견과 소견이 다른 부분에는 * 표시를 한 후 아래에 [...........]로 나타낸 뒤 소견)으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경주이씨 독자들께서는 카페지기의 항렬이 ()’자라는 것과 시조(始祖)이신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73대손이며, 중시조(中始祖)이신 이거명(李居明)38대손, 파시조(派始祖)이신 익제공(益齋公 : 李齊賢)22대손, 입향조(入鄕祖)이신 판윤공(判尹公 : 李之帶)18대손]


소견)


몇 대손을 바르게 헤아려 읽거나 표기하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알평(李謁平)73대손이며,]

이알평(李謁平)의 원대손(遠代孫 - 먼 후손)이며


- 계대를 모르기 때문에 시조세수를 알 수 없어 이알평의 몇 대손(=대손)’으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중시조 38항렬에다 실전세계의 35(=35)를 합하여 시조 73대손(=73세손)으로 읽는 것은 잘못 읽어 말하는 것입니다.


[중시조(中始祖)이신 이거명(李居明)38대손,]


중시조(中始祖)이신 이거명(李居明)37대손(=37세손)


- 중시조 38항렬은 중시조 38’ . ‘중시조 38^’, ‘중시조 38세 후손’ . ‘중시조의 37세손(=37대손)’으로 말하여야 바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파시조(派始祖)이신 익제공(益齋公 : 李齊賢)22대손,]


파시조(派始祖)이신 익재공(益齋公 : 李齊賢)21대손(=21세손)


익재공은 중시조 17세이고 글쓴이는 중조 38항렬입니다.


중조(중시조) 38항렬은 대파조(대파시조) 익재공의 21세손(=21대손)입니다.


*益齋公익제공이 아니고 익재공입니다.


[입향조(入鄕祖)이신 판윤공(判尹公 : 李之帶)18대손]


글쓴이는 판윤공파 중파조인 판윤공의 17세손(=17대손)


- 판윤공(휘 지대)은 중시조 21세이고 글쓴이는 항렬로 중조 38세입니다.


그러면 중조(중시조) 38항렬은 중파조(중파시조)인 판윤공의 17세손(=17대손)입니다.


 * 입향조(入鄕祖)이신 판윤공(判尹公)이라는 표기에 대하여


판윤공(휘 지대)을 경주에 처음 들어온 조상님으로 생각하여 입향조라고 하였는데 경주의 입향조가 아닙니다.


한양에서 낙남하여 처음에 두서면 구량리에 세거하였으나 큰물이 난 뒤 이주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 정래동 아동에 아동재사가 있고 아동 서쪽 산기슭에 동향하여 묘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은 북쪽에 위치한 천군동 피막(현 경주 쓰레기 매립장 인근)에 묘를 썼습니다.


이로 보면 아동재사가 있는 정래동의 아동 지역과 천군동의 빈막(피막)에 세거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차라리 이곳의 입향조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경주이씨가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최초로 분산된 경우는 *17세손인 이규의 증손(曾孫) 이석(李碩)이 여말(麗末)에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羅州)로 퇴거(退居)한 때부터로 보인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서는 *23세손 이절(李節)의 대 이래로 당시의 수도인 한성(漢城)에서 경기도 안성(安城), 경상북도 예천(醴泉)ㆍ안동(安東)ㆍ상주(尙州), 전라남도 함평(咸平) 등지로 분산되었다.


일부는 관향인 경주로 되돌아가기도 했었다.


*또한 21세손 이인로(李仁老)는 단종(端宗) 손위(遜位 ; 임금의 자리를 내어놓음) 때 전북 임실(任實)의 두곡리(杜谷里)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이관(李琯)의 동생 이제현(李齊賢)의 자손들 중 카페지기의 20대조인 이서종(李瑞鍾)의 후계(後系) 중 이지회(李之會)는 경산(慶山)의 자인(慈仁)으로, 필자의 17대조인 이지대(李之帶)는 관향인 경주(慶州), 이성지(李成枝)의 후손들은 충청북도 제천(堤川)으로 각각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17세손인 이규의 증손(曾孫) 이석(李碩)]


17. 17^ . 17세 후손. 중시조의 16세손(=16대손) 이규의 증손(曾孫) 이석(李碩)


- 17세를 17세손으로 표기하는 것은 이의논지의 =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17세를 17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23세손 이절(李節)의 대 이래로 ]


중시조의 22세손(=22대손) 이절(李節)의 대 이래로


- 중시조 23세 이절(李節)23. 23^. 23세 후손. 22세손(=22대손)으로 읽어야 바릅니다.


[*또한 21세손 이인로(李仁老)]


또한 20세손(=20대손) 이인로(李仁老)


- 이인로(李仁老)는 익재공(휘 제현)의 현손으로 중시조 21세입니다.


이는 ‘21’ . ‘21^’ . ‘21세 후손’ . ‘중시조의 20세손=(20대손)’으로 나타내어야 바릅니다.


*위의 내용을 보면 세와 세손. 대와 대손. 세손. 대손. 세조. 대조를 헤아려 읽을 줄을 모르고 이의논지의 기본 원칙인 =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잘못 읽고 있습니다.


*우리 가문의 경주지역 입향조이신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가 낙향할 당시의 경주부(慶州府) 남면(南面) 남중리(南中里)는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전 울산군 두서면 구량리) 지역으로 당시에는 경주부(慶州府) 지역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경주부 남부지역은 우리들의 고향 경주시 외동읍(外東邑)의 전신인 신라조 당시의 취산 진지촌(嘴山珍支村) 지역이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4대손이자 우리들의 17대조로 검교한성판윤(檢校漢城判尹)을 지낸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는 단종 즉위년인 1452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는 등 폭정을 일삼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관향(貫鄕)인 경주부(慶州府) 남면 남중리로 낙향(落鄕)한 것이다.


*입향조께서는 이 마을에 당도하자말자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500년이 넘은 이 은행나무가 지금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천연기념물 제64호로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이 나무가 지금의 울산광역시에 소재한다하여 울산에서는 필자의 입향조이신 이지대(李之帶) 공도 울산을 빛낸 울산사람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우리 가문의 경주지역 입향조이신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


소견)


판윤공을 경주지역 입향조라고 수차례 기술하였는데 판윤공을 경주 지역 입향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조님(휘 알평)이 경주 동천동 표암봉에 내려와 알천 양산촌을 다스리고 신라건국 후 1000년 동안 살아왔고 신라 패망과 아울러 고려 건국으로 일부는 개경(개성)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을 것이고 일부는 그냥 경주지역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조선 세조 임금 때 판윤공이 낙남하여 경주로 왔다고 해도 판윤공이 경주에 처음 내려와 거주 한 것도 아닐 진데 판윤공을 경주 입향조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동 입향조(현 정래동)’ , ‘빈막 입향조(현 천군동)’라고 하는 것은 수긍이 됩니다.


[*입향조께서는...]


소견)


글쓴이는 판윤공(휘 지대)을 경주의 입향조라고 하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조선 세조 임금 때 낙남(落南)하여 처음에 울산광역시 두서면 구량리(당시 경주부慶州府 남면南面 남중리南中里)로 이거하였으니 구량리의 입향조로는 말할 수가 있습니다.


현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마을 뒤쪽 내()의 큰물로 옮겨 간 곳이 현 천군동 경주 쓰레기 매립장 부근의 남쪽인 피막(빈막. 천군동)’이라면 이곳이 판윤공의 세거지로 '입향조'로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판윤공의 묘소는 보문호 남쪽 정래동의 아동 마을 서쪽 산의 동향에 자리하고 있고 아동 재사(판윤공 재사)가 이곳에 소재하여 이곳의 입향조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판윤공의 아들과 손자의 묘소는 판윤공 묘소에서 북쪽인 산 분지의 피막 부근에 서향으로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동이나 피막에 처음 들어와 세거한 것으로 생각하여 입향조라고 할 수 있으나 경주지역의 입향조라고는 말하는 것은 잘못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