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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경주이씨’의 오류와 수정 – 2

녹전 이이록 2019. 1. 29. 09:35

경주이씨의 오류와 수정 2


[경주이씨]에 대한 글이 인터넷에 여러 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올린 글마다 잘못된 내용으로 쓰여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모 종친께서 자료를 모아 애를 써서 쓴 장문의 글로 제목은 [경주이씨의 유래와 역사] 입니다.


장문의 글이라 원문은 생략하고 이견이 있거나 잘못된 내용만 [*...........]로 지적하고 아래에 바르게 고쳐 소견)을 올립니다.


[‘35대로 된 실전 세계의 조상님의 관직명에 대한 소고(小考)


. 1세 시조 알평(謁平)


[楊山村長. 佐命功臣. 太師. 太傅. 太輔. 冢宰. 太宰. 攝政王師. 太史公. 諡號 文宣恩烈王

(양산촌장. 좌명공신. 태사. 태부. 태보. 총재. 태재. 섭정왕사. 태사공. 시호 문선은렬왕)]


소견)


‘35대로 된 실전 세계의 시조 행적에 양산촌장좌명공신’. ‘섭정왕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고 시호 문선(文宣)’. 왕호 은렬왕(恩烈王)’은 세전(世傳)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太師(태사). 太傅(태부). 太輔(태보). 冢宰(총재). 太宰(태재). 太史公(태사공)은 조사 분석 결과 신라시대의 관직이 아닌 중국 당나라 때 관직이거나 고구려. 백제의 관직명으로 이 실전세계가 사실적이 아닌 계대임을 확인하는 근거입니다.


* 경주이씨 대종보(정묘보) 상계(上系)의 시조 행적난의 관직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閼川楊山村長(알천양산촌장). 阿餐(아찬). 及梁部長(급량부장)


* 위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시조 관직명과 대종보 총편의 시조의 관직명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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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2세 유() ~ 35()’까지의 계대 행적 삭제]


소견)


시조 2세부터 시조 35대까지 개개인 행적의 설명과 소견은 생략합니다.


왜냐하면 이 ‘35대로 된 실전 세계는 사실적이지 않는 계대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 세계(世系)는 모두  삭제하여야 합니다. 


‘35대로 된 실전 세계의 계대로 1902년부터 언급되고 1932년 분적종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 게재되었고 1987년도에 간행된 경주이씨 대종보인 정묘보 총편에 올라 있는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세계(世系)입니다.


이 계대는 대종보 총편에 실전세계의 고찰이란 논문에 사실적이지 못한 계대임을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관직명이 신라시대의 관직이라야 하는데 중국의 여러 왕조.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의 관직으로 쓰였고 두 개의 관직을 하나의 관직명으로 아니면 2개의 관직을 하나로 관직명을 만들어 올린 관직명도 있습니다.


고로 이 세계(世系)를 인용하여 사실적인 글을 쓰거나 논문 작성에 인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36세 거명(居明) - 37세 금현(金現)]


소견)


‘36‘37는 시조세수로 시조로부터 36번째와 37번째에 태어난 시조세수입니다


그런데 시조의 아들인 시조 2세에서 중시조 부친 대까지 약 900년간은 계대가 전해오지 않아 몇 세인지 몇 세조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경주이씨 후손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6촌 촌장중의 한 분인 신라 건국 이전의 인물인 알평을 시조로 하고 신라 말 인물로 시조의 원대손(遠代孫- 먼 후손)’인 소판공(휘 거명)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관직에의 등용이 막혔던 신라조의 후예 중 경주이씨의 경우 필자의 35대조에서부터 겨우 향직(鄕職)에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소견)


 ‘신라조의 후예는 오랜 세월동안 관직에의 등용이 막혔다가 필자의 35대조에서부터 겨우 던 향직(鄕職)에의 진출이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어느 문헌에 있는 글인지 아니면 어떤 착각에서 정리된 내용을 말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필자의 35대조라 하면 필자가 중조 38항렬이니 중시조 3세 낭중공(휘 금서)으로 이때부터 향직(鄕職)에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즉 관직을 갖게 되었다. 는 뜻인데 이는 잘못된 기술입니다.


신라말에 활동하였던 중시조 1세 소판공 이후 중시조 17세 익재공(휘 제현)까지 족보의 기록대로 관직명만을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신라 건국이전과 신라시대에는 시조께서 6(=6) 중 양산촌 촌장. 급량부의 부장. 대인으로 신라와 함께 하였고


1세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

- 신라 말 활동. 관직 소판(蘇判)

*소판(蘇判) 신라 17관등 중 3관등


중시조 2세 병부령공(兵部令公). 이금현(李金現)

- 신라 말 활동. 관직 병부령(兵部令)

* 병부령(兵部令) : 신라시대 병부(兵部)의 제1벼슬이다.

병부령의 관위(官位)는 대아찬(大阿湌)에서 태대각간(太大角干)까지였다


중시조 3세 낭중공(郎中公). 이금서(李金書). 관직 호부랑중

-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자 고려조에 출사하여 중원태수(中原太守) 호부랑중(戶部郞中)의 관직을 갖고 경순왕 김부의 3(태조 왕건의 외손녀)와 결혼하였다.

*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가 경순왕 김부와 결혼하여 낳은 셋째 딸이다.

* 낭중(郎中)은 통일 신라 때 집사성(執事省)과 병부(兵部), 창부(倉部. 戶曹)에 딸린 벼슬로 11-13등급의 관직이다.(전체 17관등)


중시조 4세 병정공(兵正公). 이윤홍(李潤弘). 관직 병정(兵正)

족보기록으로 본다면 [高麗(고려)仍置兵部令及兵正(잉치 병부령급 병정)하니 秩視宰相(질시 재상)하다. - 고려가 병부령을 설치할 때에 따라서 병정을 두었으니 품계는 재상으로 보인다.]라고 하였으나 아래 내용으로 보면 고려 초 병정(兵正)은 재상급은 아닌 것 같다.

983(성종 2)에 중앙집권정책을 실시하고 지방 호족을 향리의 직제로 편제할 때 병부 밑에 있던 병부경(兵部卿)을 병정(兵正)으로 고쳤다.

병부경(兵部卿)은 고려 시대에, ()ㆍ부()ㆍ군()ㆍ현()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이다.


중시조 5세 시랑공(侍郞公) 이승훈(李承訓). 관직 정조시랑(正朝侍郞)



중시조 6세 좌사간공(左司諫公) 이주복(李周復). 관직 좌사간(左司諫)


중시조 7세 사록공(司錄公). 이칭(李偁). 관직 사록(司錄). 증 보조공신(贈補祚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 - 손자인 이총섬이 문하시중으로 귀히 됨에 문하시중으로 증직되었다.


중시조 8세 이치련(李侈連).

- 자식(중조 9세 총섬)이 시중(侍中)으로 귀(貴)히 되어 당연히 증직이 있어야 하나 구보(舊譜)에 할아버지의 증직은 있으나 아버지 휘 치련에 대한 기록은 없음.   


중시조 9세 시중공(侍中公). 이총섬(李寵暹). 관직 문하시중(門下侍中).


중시조 10세 부사공(府使公). 이춘정(李春貞). 관직 순흥부사(順興府使, 김해).

- 동생() 춘림 문하시랑


신라 말 중시조 1세 소판공 부터 중조 3세 낭중공이 고려 조에 처음 벼슬을 시작하엿고 이후 중조 4세 부터 10세까지 족보 행적에서 조상님들께서 크고 작은 관직으 가졌는데 신라의 후예로 고려 조에 벼슬 길이 막혔다는 등 중조 38세 '우'항렬의 35대조부터 향직에의 벼슬 길이 열렸다 함은 잘못된 기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