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이씨(慶州李氏)에 대(對)하여 - 1
경주이씨에 대하여 쓴 글이 올라 있어 이를 소개합니다.
글 내용에서 잘못 쓴 내용에는 이를 원문에 [*.......... ⇒ .........]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1. 경주 이씨 시조(慶州李氏始祖) : 이알평(李謁平)
경주이씨의 시조(始祖)는 알평(謁平)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다.
『삼국유사』에는 기원전 117년에, 경주이씨의 시조인 <알평공>이 하늘에서 신라의 4영산(靈山)의 하나인 경주 동북에 있는 [*금오산(金鰲山)의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다고 한다. ⇒ *진한(辰韓)땅 표암봉(瓢巖峰- 현 소금강 지구)에 내려왔다고 한다.]
신라 6촌(村)은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취산 진지촌(嘴山珍支村)·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 등인데 『삼국사기』에는 유리왕(儒理王) 9년 봄에 6부(部)의 이름을 고쳤는데, 양산부(楊山部) → 밑돌부(及梁部) 이씨(李氏)/ 고허부(高墟部) → 새돌부(沙梁部) 최씨(崔氏)/ 대수부(大樹部) → 점돌부(漸梁部) 손씨(孫氏)/ 우진부(于珍部) → 본피부(本彼部) 정씨(鄭氏)/ 가리부(加利部) → 한기부(漢祇部) 배씨(裵氏)/ 명활부(明活部) →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로 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는 이와 달리 새돌부(沙梁部)를 정씨(鄭氏)의 본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조의 영지(領地)인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은 뒤에 밑돌부(及梁部)가 되는 뿌리의 마을로 6촌의 모체이고 밑돌부의 촌장인 알평(謁平)은 6촌의 부족사회를 영도하는 수장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기원전 69년) [*3월 1일 ⇒ 3월) 6촌의 촌장들이 각기 그의 자제(子弟)들을 이끌고 경주이씨의 시조인 알평공(謁平公)이 다스리는 알천(閼川)의 안상(岸上)에 모여 나라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69년의 일이며 이때에 이 회의를 주재한 분이 알평 시조였다.
13세 된 혁거세(赫居世)에게 ‘밝(朴)’의 성을 주어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박혁거세(朴赫居世)이다.
그런데 이때에 6촌민들이 회의를 하면서 준수해 오던 ‘논의와 결의의 방법’ 이 바로 ≪화백(和白)≫이라는 것이다.
이 ≪화백≫제도는 신라 후대에 전통화 된 관례인데, 중국에까지 소문이 나서 저들의 사서(史書)에도 간략한 기록이 보인다.
『수서(隋書)』 신라 전(新羅傳)에는 “共有大事 則聚群官 詳議完之” (공공의 큰일에는 많은 관리들을 모아놓고 자상하게 의논하여 완결 짓는다.)고 있고 『당서(唐書)』 신라 전에는 “事必與衆議 號和白 一人異則罷”(일은 반드시 많은 사람과 더불어 의논하는데 ‘화백(和白)’ 이라고 부른다. (논의하다가도) 한 사람이 의견을 달리하면 그만둔다.)고 있다.
이 ≪화백제도(和白制度)≫는 기록으로는 기원전 69년의 알천 안상의 6촌 회의에서 유래했는데, 어떤 이는 이 화백제도를 민주주의의 발상(發祥)이라고 하였으나 민주주의의 발상이라기 보다는 완성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철칙(鐵則)이 있다.
[*그러나 ≪화백≫은 100명이 지지하더라도 그 중 1명이 반대하면 그 안건을 아예 폐기해버리는 것이니 ⇒ 그러나 ≪화백≫은 6부 촌장 6명 중 1명이 반대하면 그 안건을 아예 폐기해버리는 것이니] [아무리 시간이 걸리고 비용이 들더라도 ⇒ 삭제) 참석인원 전원의 지지 없이는 가결하지 않는다는 철칙 ― 이것이 ≪화백≫이다.
참석인원 전원의 지지로 결의하였으니 책임도 또한 전원이 질 것 아닌가?
신라가 992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누린 배경에는 이와 같은 ≪화백의 철칙≫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6촌이 단순한 원시부족사회가 아니라 이미 “민주주의가 완성된 사회” 이기 때문에 화백제도와 같은 고도의 도덕사회가 탄생하고 또 준용(遵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으로는 기원전 69년의 사로국 <건국회의>에서도 “아이들이 버릇이 없고 방자하니 덕이 있는 이를 찾아서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우자”는 민주적 건국 논의에서도 충분히 감지되는 일이다.
알평공이 내려온 박바위(瓢巖. *표주박 표. 바위 암)가 ‘밝사상’ (단군신앙)의 “남부연원(南部淵源)의 구실”을 했다는 점이다.
‘밝사상’은 신라만의 독점물은 아니지마는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발해까지 모조리 멸망했으므로 단절의 위기를 만났었는데 신라가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서 고려에 전수하고 고려가 다시 조선에 전해주어서 오늘에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최초의 구실을 한 것이 양산촌이고 그 상징적인 표상이 바로 밝바위(瓢巖) [*박바위]인 것이다.
박혁거세의 ‘박’ 을 비롯하여 ‘빛’ 과 ‘밝’을 의미하는 용어를 신라의 왕명(王名)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례는 도처에서 산견(散見)된다
2. 경주 이씨(慶州 李氏) 유래(由來) :
시조(始祖)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은 박혁거세(朴赫居世) 탄생(誕生) 설화(說話)에 나오는 초기(初期) 신라(新羅)의 6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 급량부)의 촌장(村長)이다.
이알평(李謁平)은 신라(新羅)의 좌명공신(左命功臣)으로 <경주이씨 대종보>에 의하면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王)이 된 뒤 아찬(阿粲)에 올라 군사(軍事)업무(業務)를 장악(掌握) 했으며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양산촌 이씨(李氏)로 성(性)을 하사(下賜) 받았다고 한다. ⇒ 及梁部(급량부) 이씨(李氏)로) 사성(賜姓) 받았다고 한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23년 [*익호(謚號)를 ⇒ 시호(諡號)] [*문선공(文宣公)으로 하였고, ⇒ 충헌공(忠憲公)으로 하였고 (소견) 문선(文宣)은 공자의 호로 성인의 호를 함부로 내리지는 못할 것으로 보아 일부에서 말하는 ‘충헌’의 호가 바르다고 사료됨.] 무열왕(武烈王)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後)의 후손(後孫)에 대(對)한 계대(繼代)가 전(傳)해지지 않아 [*이알평(李謁平)의 36세손(世孫)이며 ⇒ *이알평(李謁平)의 원대손(遠代孫)이며] 신라(新羅)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出身)인 [*이거명(李居明)을 1세조(世祖)로 하고 있다. ⇒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 1세(世)로 하고 있다.]
3. 경주 이씨(慶州李氏) 세계도(世系圖) - ‘35대로 된 실전세계’
1세 : 알평 - 2세 : 유 - 3세 : 타 - 4세 : 중가 - 5세 : 석 - 6세 : 문상 - 7세 : 방 - 8세 : 방 ⇒ 수장 -
9세 : ? ⇒ 유 - 10세 : 기정 ⇒ 11세 : ? ⇒ 미선 - 12세 : 성립 - 13세 : 서 - 14세 : ? ⇒ 계훤 -
15세 : 걸 - 16세 : 선장 - 17세 : 기첨 - 18세 : 인흥 - 19세 : 황 - 20세 : 선정 - 21세 : 체 -
22세 : 태휘 - 23세 : ? ⇒ 우영 - 24세 : 준 - 25세 : ? ⇒ 소 – 26세 : 경지 - 27세 : 욱 -
28세 : ? ⇒ 원장 - 29세 : 한로 – 30세 : 계탕 - 31세 : 도 - 32세 : 사언 - 33세 : ? ⇒ 기
- 34세 : 희두 - 35세 : 계 - [ * 36세 : 거명 ⇒ 원대손 : 거명]
소견)
*시조 2세 유 ~ 35세 계]까지의 계대는 여러 가지 내용으로 사실적이지 않은 계대입니다.
‘35대로 된 실전세계’는 [참고용]으로 사용될 뿐으로 바른 계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35대로 된 실전세계’는 어떤 보서에도 없던 계대가 1902년에 갑자기 나타난 경주이씨 세계(世系)입니다.
내용적으로 ‘경주이씨 대종보 총편’에 게재된 [실전세계의 고찰] 논문에서 자세히 밝혀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