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사절요. 동문선 등 문헌에 기록된 경주이씨 인물(이제현) - 18
고려사절요. 동문선 등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조상님들의 행적을 공과를 떠나서 내용 그대로 올립니다.
해당 조상님 외에 기록 내용 중에 경주이씨 조상님의 휘가 있으면 큰 글자체로 나타내고 관계를 약술합니다.
◈ 이제현(李齊賢) - 9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기해 8년(1359), 원 지정 19년
○ 4월에 이제현(李齊賢)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참고 자료)
* 혜비(惠妃) - 고려 공민왕의 후비.
시대 - 고려
출생 - 미상
사망 – 1408년(조선 태종 8)
경력 - 왕비
직업 - 왕후(王后)
성별 - 여
분야 - 역사/고려시대사
본관 - 경주(慶州)
본관은 경주(慶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의 딸이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아들이 없자, 재상들이 명가의 딸로서 자식 둘 자를 청하였는데, 이에 이제현의 딸이 뽑혀 혜비로 봉하여졌다.
이 때문에 노국공주가 분하게 생각하여 [진수(珍羞 : 진귀한 음식)를 진상하지 않고?] 참소와 고자질이 다투어 일어났는데, 이는 공주가 투기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 말기에 홍륜(洪倫)· 홍관(洪寬)· 한안(韓安) 등 자제위(子弟衛)의 무리들이 제비(諸妃- 여러 비)를 강제로 욕보일 때에 혜비(惠妃)· 정비(定妃)· 신비(愼妃)는 완강히 거절하여 따르지 않았다.
공민왕이 시역(弑逆)을 당하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정업원(淨業院)에 머물렀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고 1408년(태종 8) 2월에 세상을 떠났다.
●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신축 10년(1361), 원 지정 21년
○봄2월에 이제현(李齊賢)에게 명하여 무일편(無逸篇)을 강독하게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恭愍王二) 계묘 12년(1363), 원 지정 23년
○ 봄 정월에 양부와 전 시중 윤환(尹桓)ㆍ이제현(李齊賢)ㆍ이암(李嵒)ㆍ염제신(廉悌臣)을 불러 환도할 일을 의논하니 모두 아뢰기를, “송도(松都)는 종묘가 있는 곳이요, 국가의 근본이옵니다. 서운관에서 음양에 구애되는 것이 있다고 아뢰니, 마땅히 먼저 성 남쪽 흥왕사(興王寺)로 행차하시어 그곳에서 머무르셨다가 강안전(康安殿)이 수리되기를 기다려 옮기소서." 하니, 왕이 이 말을 따랐다.
○ 여름 4월 밀직상의(密直商議) 홍순동(洪淳同)과 지밀직(知密直) 이수림(李壽林)을 원 나라에 보냈는데, 백관과 기로들이 원 나라 어사대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적을 평정하여 길을 통한 뒤에 첩서(捷書)를 바치고 신정을 축하하였으며, 사은하고 성절을 축하하는 등 사신을 계속 보냈으나, 한 사람도 동으로 돌아오는 자가 없으며, 또 봄이 다 가도록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고 대사(大赦)가 내려도 사신이 오지 않으니 이는 필시 조정이 참소하는 무리를 받아 들여 우리나라 腠(주) 소홀히 해서입니다.
지금 왕이 왕위에 오른 후로 조빙하는 예를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공경히 하였고, 마침 홍두적의 난리를 만났으나, 두 번이나 공을 세웠기에 혹 허물이 있더라도 여러 번 은사(恩赦)를 입었는데, 참소하는 말을 하는 자가 어떻게 모함하였기에 이렇게 딴 의논이 생겼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우리 왕의 공을 표창하시고 참소하는 사람의 죄를 바르게 다스리소서." 하고, 글을 중서성(中書省) 첨사원(詹事院)에도 바쳤다.
*이수림(李壽林)- 익재 이제현의 3자 운와공 휘 달존의 차자. 노언당으로 몰려 죽음
○ 대호군 임견미(林堅味)와 호군 김두(金斗)를 보내어 김용(金鏞)을 계림부(鷄林府)로 옮겨 가두게 하고 안렴사 이보림(李寶林)과 함께 국문하니, 김용이 말하기를,
“내 8년 동안에 세 번 재상을 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없었는데, 어찌 왕을 범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다만 홍시중을 없애고 싶어서 한 일이다." 하였다.
임견미 등이 힐난하기를,
“무엇 때문에 안도적(安都赤)을 죽였는가." 하니, 김용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드디어 김용을 죽여 그 머리를 경성에 전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도당 10여 명을 베었다.
그 밖에 곤장을 때려서 귀양 보낸 자도 수십 명이었다.
왕은 그래도 김용을 못 잊어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두 번이나 탄식하며,
“누구를 가히 믿을 것인가." 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김용이 가졌던 묘아안정주(猫兒眼精珠)를 얻어 도당에 바치니 일좌(一座)가 돌려가면서 구경했으나, 평리(評理) 최영만은 돌아다보지도 않고 말하기를,
“김용의 큰 뜻을 이런 물건들이 흐려 놓았는데 제공들은 무엇 때문에 구경하시오." 하였다.
*이보림(李寶林) - 중시조 19세로 익재공(휘 제현)의 장자 시랑공(휘 서종)의 장자 계림군(휘 보림)으로 익재공의 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