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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기록된 경주이씨 인물(이제현) - 13

녹전 이이록 2018. 6. 29. 09:15

고려사절요. 동문선 등 문헌에 기록된 경주이씨 인물(이제현) - 13



고려사절요. 동문선 등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조상님들의 행적을 공과를 떠나서 내용 그대로 올립니다.


해당 조상님 외에 경주이씨 조상님의 휘가 있으면 큰 글자체로 나타내어 올립니다.


이제현(李齊賢) - 4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을축 12, 원 태정 2


11이제현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5


충혜왕(忠惠王) 계미 4(1343), 원 지정 3


12월에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은 집에 있다가 왕이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창졸간에 달려갔으나 보지 못하였다.

*- 충혜왕


곧 조정에 진정하자고 채하중에게 말하여, 재상과 국가의 원로들을 민천사(旻天寺)에 모으고 글을 올려 왕의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청할 것을 의논하니, 예천군(醴泉君) 권한공(權漢功)이 말하기를, “옛날 은나라의 태갑(太甲)이 덕()을 밝히지 못하여, 이윤(伊尹)3년 동안 동(- 땅이름)에 추방하였다가, 뒤에 마음을 바로잡고 행실을 고치므로 왕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또한 어떤 나라가 교통의 요충이 되는 땅에 끼어 있었는데, 조회하러 들어오는 제후와 천자의 사신을 죽이니, 천자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죽였고, 또 어떤 나라의 신하가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돌아와 보니 천자의 사신이 와서 그 왕의 머리를 베어 가므로, 그 신하가 시체 놓인 곳에 나아가 제사를 차리고 곡을 하였더니, 역시 영을 내려 그를 죽였었다.


이제 왕이 무도하여 천자가 주벌(誅罰)한 것인데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전 정승(政丞) 강장(康莊), “황제의 뜻을 측량할 수 없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이를 어찌할 것인가." 하고, 전 정승 이능간(李凌幹), “이제 천자가 왕의 무도함을 듣고서 죄를 준 것인데, 만일 글을 올려서 논하여 아뢴다면 이것은 천자의 명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니 될 수 있는가." 하였다.


상락군(上洛君) 김영돈(金永暾)은 말하기를,

왕이 욕을 당하였을 때, 신하가 죽음으로써 그것을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김륜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신하는 왕에 대해서, 자식은 아버지에 대해서,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마땅히 그 은정과 의리를 다할 뿐이다.

그 아버지가 벌을 받는데, 그 자식된 자가 차마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황제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모든 재상들이 아무 말이 없었다.


김륜은 또 말하기를,


이제 행성(行省)에 글을 올리어, 비록 허락을 얻지 못할지라도, 왕을 구원하다가 죄를 얻는다는 일은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하였더니,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해서 드디어 상서할 것을 결의하고,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에게 그 글을 초하도록 하였다


충혜왕의 최후


계축일에 원 나라에서 왕을 함거(檻車)에 태워 게양현(揭陽縣 광동성(廣東省))에 귀양 보냈다.


황제가 왕에게 이르기를,


너는 백성들의 왕이 되어 백성을 너무 심하게 약탈하였으니, 너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나는 사람 죽이는 것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너를 게양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니 너는 나를 원망하지 말고 가라." 하였다.


게양현은 연경(燕京- 원나라 수도)에서 2만여 리나 되는 곳이다.


원자가 배전(裴佺)을 시켜 옷 한 벌을 바치게 하였을 뿐, 한 사람도 따라가는 이가 없었다.


갑신 5(1344), 원 지정 4


왕이 역의 수레로 달리니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게양현까지 이르지 못하고, 병자 일에 악양현(岳陽縣)에서 훙(- 사망)하였다.


독살 당하였다고도 하고, 귤을 먹고 운명하였다고도 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소민들은 기뻐 날뛰면서, “이제는 다시 살 수 있는 날을 보겠다." 고까지 하였다.


백성들에게 덕택이 미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처음에 궁중과 길거리에 노래가 유행하기를,


아야마고지나(阿也麻古之那)가 이제 가면 언제 오리."라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악양(岳陽)에서 죽는[亡故망고] 어려움[]이여, 오늘 가면 어느 때에 돌아올 것인가."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에 사용하였고, 나쁜 불량배들을 가까이하면서 음란하고 방종한 행동을 멋대로 자행해서, 안으로는 부왕에게 꾸지람을 받고, 위로는 천자에게 죄를 얻어, 죄수의 몸이 되어 길에서 죽었으니, 마땅하도다.


비록 늙은 신하 이조년(李兆年)의 간절한 간언이 있었으나 말을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5


충혜왕(忠惠王) 갑신 5(1344), 원 지정 4


여름 4월에 기()를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으로, ()을 익흥부원군(益興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채하중(蔡河中)을 우정승에, 한종유(韓宗愈)를 좌정승에, 이제현(李齊賢)을 판삼사사에, 김륜(金倫)ㆍ권겸(權謙)ㆍ박충좌(朴忠佐)를 찬성사에, 나익희(羅益禧)ㆍ손수경(孫守卿)을 참리에, 김승사(金承嗣)와 김상기(金上琦)를 삼사(三司)의 우좌사(右左使)에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