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사절요. 동문선 등 문헌에 기록된 경주이씨 인물(이핵. 이제현) - 10
◈ 이핵(李翮) - 2
중시조 15세로 익재 이제현(4촌형제간인 국당 이천)의 할아버지로 경주이씨 종인들은 '중흥조'로 모신다.
● 목은집(牧隱集) 목은문고 제8권 서(序)
죽계 안씨(竹溪安氏) 삼 형제의 등과(登科)를 축하한 시의 서문 이색(李穡)
○재상(宰相) 김근(金覲)의 아들 셋이 과거에 급제했으니, 부일(富佾)과 부식(富軾)과 부의(富儀)가 바로 그들이다. 평장사(平章事) 민공규(閔公珪)의 경우는 아들 다섯 명이 과거에 급제했으니 강균(康鈞)과 적균(迪鈞)과 광균(光鈞)과 인균(仁鈞)과 양균(良鈞)이 바로 그들이요, 평장사 임유(任儒)의 경우는 아들 셋이 과거에 급제했으니 경숙(景肅)과 경겸(景謙)과 경순(景純)이 바로 그들이다.
증(贈) 복야(僕射) 이핵(李翮)은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급제했으니, 인정(仁挺. 원문 빠짐)과 진(瑱)과 세기(世基. 원문 빠짐)가 바로 그들이요, 검교 정승(檢校政丞) 김태현(金台鉉)도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급제했으니 광철(光轍)과 광재(光載)와 광로(光輅)가 바로 그들이다.
이 밖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겠으나 다 상고할 수가 없다.
자네가 알아낸 바, 청주 한씨(淸州韓氏)에는 사기(謝奇)와 사겸(謝謙)과 사보(謝譜)가 있고, 함양 박씨(咸陽朴氏)에는 장(莊)과 이(理)와 계원(季元)이 있고, 진양 박씨(晉陽朴氏)에는 인간(仁幹)과 인지(仁祉)와 인우(仁祐)가 있고, 죽주 박씨(竹州朴氏)에는 문화(文華)와 효수(孝修)와 송생(松生)이 있고, 화평 노씨(化平盧氏)에는 승관(承綰)과 승조(承肇)와 승신(承愼)이 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에서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이로는 김해 김씨(金海金氏)에 동양(東陽)과 광윤(光閏)과 광원(廣元)이 있고, 밀성 박씨(密城朴氏)에 밀양(密陽)과 대양(大陽)과 삼양(三陽)과 계양(季陽)이 있고, 곡성 염씨(曲城廉氏)에 국보(國寶)와 흥방(興邦)과 정수(廷秀)가 있고, 창녕 성씨(昌寧成氏)에 석린(石磷)과 석용(石瑢)과 석연(石珚)이 있고, 흥안 배씨(興安裵氏)에 중보(中甫)와 중성(中誠)과 중유(中有)와 중륜(中倫)이 있고, 전주 유씨(全州柳氏)에 극강(克綱)과 극서(克恕)와 극제(克齊)가 있고, 단산 우씨(丹山禹氏)에 홍수(洪壽)와 홍강(洪康)과 홍득(洪得)이 있다. 또 배가 다른 형제로는 월성 이씨(月城李氏)와 양천 허씨(陽川許氏)와 회홀 설씨(回鶻偰氏)의 예를 들 수가 있다.
◈ 이제현(李齊賢) - 1
이제현(李齊賢. 충렬왕 13(서기1287) ~ 공민왕 16(서기1367))은 고려 말의 정치가이며 성리학자였고 원(元)의 위협 속에서 기울어가는 고려의 사직(社稷)을 버텨낸 위인이었다.
자는 중사(仲思),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검교정승 진(瑱)의 아들이다.
충렬왕 27년(서기1301) 나이 15세로 성균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문과의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예문춘추관에 들어갔다. 성균악정에 이르렀을 때에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고 부르므로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의 명사들인 요수(姚燧)·염복(閻復)·조맹부(趙孟頫) 등과 교우하며 학문이 심오해졌으며 이 때에 진감여(陳鑑如)가 공의 초상화를 그렸고 원(元)의 석학 탕병룡(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이 그림과 글씨가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되어있다.
충숙왕 10년(서기1323)에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 등이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성(省)으로 만들어달라”고 원나라에 간청하니 원나라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고려를 얻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온 조정이 들떠서 후속조치에 여념이 없는데 공은 분연히 일어나 도당(都堂. 원나라의 의정부)에 글을 보내서 고려 400년의 사직(社稷)이 이로써 무너진다고 개탄하고 유청신 등의 청원이 부당함을 이로정연하게 설명하여 고려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위급을 구하였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 뒤에 충선왕이 서번(西蕃)에 귀양가게 되자 함께 따라갔으며 가고 오는 과정에서 밀직사사· 첨의평리· 정당문학· 삼사사 등의 벼슬이 내려졌다.
충숙왕 복위 8년(1339)에 정승 조적 등이 심왕(瀋王) 고(暠)와 공모하여 모반하다가 잡혀죽자 그의 무리들이 연경(燕京)에 남아서 충혜왕을 음해하므로 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잘 무마하였으며 충목왕이 즉위하자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우정승을 맡고 정동성사를 겸하였다.
그 후 원종공신 조일신(趙日新)이 시기할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았으므로 뒤의 ‘조일신의 난리’에 화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 후 우정승을 두 번 지내고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공민왕 6년( 서기1357)에 벼슬을 떠났고 왕명으로 고려의 실록을 수찬(修撰)하고 종묘와 위패의 서차(序次)를 정했으며 사후에 공민왕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낙옹비설』·『익재집(益齋集)』등이 있다.
공은 당대의 문호(文豪)였으며 『익재난고』 소악부(小樂府)에는 당시의 민요 17수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수록되어 있는데 국문학계에서 고려시대의 가요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益齋)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라고 평가했다.
경주이씨 14대파 중 익재 이제현을 분파조로 하여 그 후손들로 이루어진 익재공파 파시조이다.
● 고려사절요 20권
충렬왕 5(忠烈王五) 병오 32년(1306), 원 대덕 10년
○ 9월에 첨의중찬으로 치사한 안향(安珦)이 졸하였다.
안향은 흥주(興州 경북 순흥(順興)) 사람이다.
사람됨이 장중(莊重)하며 조용하고 자세하여, 재상으로 있을 때에 계획을 잘 세우고 결단을 잘 내리니, 동료
들은 다만 순순히 좇고 삼갈 뿐이며,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항상 인재를 양성하고 유학(儒學)을 부흥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하고 생각하였다.
또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었다.
김이(金怡)ㆍ백원항(白元恒)을 처음 보고 말하기를, “뒤에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하였고, 또 이제현(李齊賢)과 이이(李異)는 모두 젊을 때 유명하였는데 불러서 시를 짓게 하여 보고 말하기를, “제현은 반드시 귀하게 되고 또 장수할 것이나, 이(異)는 수명이 짧을 것이다."하더니, 뒤에 모두 맞았다.
이이(李異)는 만년에는 항상 회암 선생(晦庵先生)의 화상을 걸어 놓고 경모의 뜻을 극진히 하더니 마침내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문장이 맑고 힘이 있어 볼 만하였다.
장사 때에는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가 모두 소복차림으로 길에서 제사를 지냈다.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