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사절요 등 문헌에 기록된 경주이씨 인물(이진) - 4
◈ 이진(李瑱)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9권
인종 공효대왕 1(仁宗恭孝大王一) 정미 5년(1127) - 김종서 등(金宗瑞 等)
○ 11월에 석준(石峻)을 금 나라에 보내어서 생신을 하례한 데 대하여 사례하고, 이진(李瑱)은 새해를 하례하게 하였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24권
충숙왕(忠肅王) 신유 8년, 김종서 등(金宗瑞 等)
○여름 4월에 삼사사 김순(金恂), 밀직사 백원항(白元恒), 밀직부사 윤석(尹碩)ㆍ전영보(全英甫)와 감찰 언부관(讞部官)에게 명해서, 권한공ㆍ채홍철에게 장형을 가하여 먼 섬에 귀양보냈다.
한공은 상왕이 소중히 여기는 신하였다.
그때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이 교외에서 전송하니, 한공이 말하기를, “천지가 비록 넓고 크나 한 몸을 감출 데가 없습니다." 하였다. 진이 말하기를, “뒷간이 좋다." 하니, 한공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한공ㆍ홍철ㆍ광봉(光逢)ㆍ정지(廷芝) 등이 섬에 들어가지 않고 홍주(洪州) 지경에 모여서 백성들에게 끼친 폐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고봉집(高峯集)
고봉속집 제2권 잡저(雜著) 천사(天使)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의 문목(問目)에 대해 조목조목 답함 - 기대승(奇大升)
○ 안유(安裕)는 흥주(興州) 사람입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제수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장엄하고 정중하고 안온하고 자상하였으며, 일찍이 인재를 길러서 사문(斯文)을 흥기하여 회복시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학교의 제도가 크게 무너지고 유학(儒學)이 날로 쇠퇴해짐을 걱정하여 문교의 진흥을 위해 국학(國學)에다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서 길이 인재 교양의 자본으로 삼았습니다.
또 남은 돈을 중국 강남(江南)에 보내어 공자 및 그의 제자 70명의 화상(畫像)을 그려 와 모셨고, 또 제기(祭器)ㆍ악기(樂器)와 육경(六經)ㆍ제자(諸子)ㆍ사서(史書) 등의 서적을 구입해 와서 비치하였습니다.
또 이산(李㦃)과 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교관(敎官)으로 삼으니, 경서를 펴 놓고 수업을 하는 생도가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만년에는 회암(晦庵 주희) 선생의 진영(眞影)을 벽에 걸어 두고 경모의 뜻을 다하였으며, 회헌(晦軒)이라 자호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가 모두 소복을 입고 노제(路祭)를 지냈습니다.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리고 문묘 서무(西廡)의 아래쪽에 배향하였으며, 후인들이 또 서원을 건립하였습니다.
● 동사강목(東史綱目)
동사강목 제13상신축 고려 충렬왕 27년부터, 기묘 고려 충숙왕 후 8년까지 39년간 정미년 충렬왕 33년(원 성종 대덕 11, 1307) 안정복(安鼎福)
○ 폐왕이 이진(李瑱)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삼았다.
폐왕이 본국의 오랫동안 쌓인 폐해를 개혁하려 하자, 전법 판서(典法判書) 이진이 글을 올리기를,
“전하께서 제실(帝室)에 공훈을 세워 돌보고 대우함이 날로 융숭하여 가니, 진실로 공이 있더라도 마땅히 자랑하지 말 것이며 총애를 받으면 놀란 것처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공이 없는 사람에게는 벼슬을 함부로 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그 족당(族黨)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왕(父王)이 사급(賜給)한 것이라 자칭하고 부고(府庫)의 전곡(錢穀)을 절취(竊取)하는 자를 모든 사람이 미워하니 살피셔야 합니다.
사급한 토지는 공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일체 회수하시고, 필요 없는 관원이 많아 늠록(廩祿)을 낭비하고 있으니 육부의 상서(尙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겸병하여 줄이도록 하소서. 이 몇해 동안 한재와 흉년으로 백성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급하지 않은 공사는 중지시키는 것이 온당합니다.”
하니,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정당문학을 초배(超拜)하였다.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 제15권 시(詩) 이생(李生)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 이색(李穡)
시(詩)
이생(李生)의 시권(詩卷)에 제하다.
계림에서 세 걸출한 이가 나와 / 鷄林出三傑
동국 문장의 종사가 되었으니 / 東國文章宗
부지런히 힘써 가업을 지키면 / 勉勉守家業
후일에 의당 습봉을 받으리라 / 他年當襲封
*[주]계림(鷄林)에서 …… 되었으니 : 계림은 경주(慶州)의 고호이다.
세 걸출한 이란 곧 경주 이씨(慶州李氏)로서 모두 학문과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세 사람을 가리킨 것으로, 즉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정(文定)인 이진(李瑱)과 이진의 아들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충(文忠)인 이제현(李齊賢)과 이제현의 당질(堂姪)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정(文靖)인 이달충(李達衷)을 가리킨듯하나 자세하지는 않다.
● 목은집(牧隱集)
목은문고 제7권 서(序) 익재 선생 난고(益齋先生亂藁) 서문 이색(李穡)
○ 익재 선생은 저술을 매우 많이 하였다.
그러면서도 늘상 “선친인 동암공(東庵公 이진(李瑱)의 문집도 아직 세상에 행해지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소자(少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고는, 시문을 한 편 지으면 곧장 버리기 일쑤였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그 글을 간수하여 보관하곤 하였다.
이제 막내아들인 대부 소경(大府少卿) 창로(彰路)와 맏손자인 내서사인(內書舍人) 보림(寶林)이 서로 더불어 몇 권 분량의 글을 모은 다음에 간행할 계획을 세우고는 나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 제24권 시(詩) 곡성 대인(曲城大人) 좌하(座下)께 받들어 올리다. - 이색(李穡)
시(詩)
곡성 대인(曲城大人) 좌하(座下)께 받들어 올리다.
구경의 당 앞에 백일은 길기도 하여라 / 具慶堂前白日長
익재의 성대한 일은 동방에 으뜸인데 / 益齋盛事冠東方
이제는 문득 그 일을 동정에 양보하여 / 如今却讓東亭步
문생의 헌수하는 잔을 재차 받는구려 / 再領門生獻壽觴
*[주]구경(具慶) : 부모가 다 생존한 것을 가리킨 말이다.
*[주]익재(益齋)의 …… 으뜸인데 :
고려 충숙왕(忠肅王) 7년 경신년(1320)에 익재 이제현(李齊賢)이 34세의 나이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당시 익재의 아버지 문정공(文定公) 이진(李瑱)과 어머니 진한국 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 다 건강하였으므로, 익재가 손수 술잔을 들어 부모님께 칭수(稱壽)하여 온 세상이 이를 흠모하게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주]이제는 …… 받는구려 :
동정(東亭)은 곧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의 아들인 염흥방(廉興邦)의 호인데, 그가 우왕 6년 경신년(1380)에 과거를 주관하고 마치 익재 때와 같이 잔치를 베풀어 자기 부모인 곡성부원군 양위(兩位)에 칭수를 올렸으므로 이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