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항렬자를 사용하는가?
[왜 이름에 돌림자(항렬자)를 사용했을까요?]
답변) 이이록
어느 때부터인가 각 성씨는 한 인물을 시조로 하여 성(姓)과 본(本)이 주어지고 그 아래로 자손들이 번창하여 왔습니다.
경주이씨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토대로 6촌장의 천강설(天降設)로 진한6촌(辰韓六村- 斯盧六村사로6촌)이 일어나고 시조 표암공(瓢巖公. 李謁平이알평)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촌장으로 부족민을 다스리다가 신라건국의 원훈으로 아찬(阿飡. 阿餐아찬) 관직에 올라 군무를 보살폈으며 유리왕 32년에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양산촌(楊山村)에서 급량부(及梁部)로 개칭하고 이씨 성(李氏姓)을 사성(賜姓)하였다는 기록과 오랫동안 몰랐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찬한 익재(益齋 李齊賢이제현)공의 묘지명(墓誌銘)에서 신라 말에 생존하여 소판(蘇判) 관직으로 활동하였던 소판공(蘇判公. 李居明이거명)이 시조이후 최초로 거론된 경주이씨로 확인됨에 따라 후손들이 중시조로 받들었으니 실전세계 1400연 중 500년의 계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후손들이 고려 말에 생존하셨던 중시조 15세 열헌공(휘 핵)이하 3세 9자 열세분이 모두 현달하여 가계를 중흥시켰으니 중흥조로 받들어 모시고 있습니다.
이를 기준으로 중조 15세 ~ 21세에 각 대종회 별로 14개 대파로 분파하고 그 아래로 중소 70여개 파로 분파시키고 분파명이 부여된 것입니다.
후손들이 윗대에서 계대별로 14개 대파로 분파하여 대파를 이루고 이 대파가 또 자손들이 많아지자 또 중파로 분파하고 아래로 소파, 지파로 까지 같은 뿌리의 자손들이 분파한 것입니다.
일부는 어느 시기에 누구로부터 분적(分籍) 되었는지는 몰라도 같은 성씨인 것만은 틀림없어 경주이씨의 분적종으로 된 성씨도 8본이 있습니다.
여하간 신라 말 중시조이후 10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8본 분적종에 14개 대파와 70여개 중파와 소파로 분파되어 140만 명의 후손들이 경주이씨 시조님의 잎과 줄기로 번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각 성씨는 대. 중. 소 조직을 결성하고 중앙. 지방으로 나누어 같은 종씨끼리 친화하고 돈목하는 것입니다.
파(派)에 관계없이 경주이씨 전체를 아우르는 중앙 화수회(종친회)와 각 지역 화수회(종친회)가 결성되어 있고 각 계대의 종인들로 이루어진 대파(익재공파)별 – 중파(창평공파)별 - 소파(재사당공파)별 - ○○문중별로 조직되어 일가끼리 집안 여러 일과 행사를 논의하고 친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많은 후손들이 한 뿌리로 하는 자손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방법으로는 세수와 항렬이 필요한 것입니다.
경주이씨는 현재 중시조 35세부터 ~ 70세까지 대동항렬을 제정하여 경주이씨이면 누구나 이항렬을 세수애 따라 적용하여 항렬자를 넣어 이름을 짓습니다.
아래는 중시조 38세 ~ 47세까지의 항렬 재차 표입니다.
38세→39세→40세 - - → 41세→42세 -- → 43세 -- → 44세→ 45세 -- → 46세 -- → 47세
○雨...相○....○熙.○炯...在○...○鎬.○鍵...濟○.濬○...○東....心○.丙○...○世.○敎....鎭○
○우...상○....○희.○형...재○...○호.○건...제○.준○...○동....심○.병○...○세.○교...진○
*항렬자는 성을 제외한 이름 2자 중 앞. 뒤. 앞, 뒤에 배열하여 동항렬. 숙질항, 조손항으로 구별하여 ‘동’ 항렬이면 형, 아우로, 나보다 1항렬 앞서면 아저씨로, 2항렬 앞서면 대부님(할아버지)으로, 나보다 1항렬 낮으면 조카나 조카님으로, 2항렬 뒤이면 손자뻘이지만 서로 존경하는 처지로 사회적 직위명으로 호칭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종친님이나 종인들끼리 서로 수인사를 나눌 때 남이 아닌 일가의 차서(次序)를 알아 예를 다하기 위하여 만든 제도입니다.
◆ 아래는 경주이씨 항렬자 제정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 35세 ‘영’항렬 사용 이전 즉 대동항렬 제정이전에는 아래와 같이 경주이씨 4집안에서만 항렬자를 사용하였습니다.
▲ 第一派 - 익재공후 창평공후 재사당공파
[行列字自黿表之集(항렬자 자원 표지집)]
- 8별(八鼈)집 중조 24세 재사당공(再思堂公) 원(黿)부터 시작하여 34世 집(集)자 까지 항렬자를 표시.
▲ 第二派 - 국당공후 문정공파
[自廷馨始至顯(자정형 시지현)]
- 8정(八廷)집 27세(世) 지퇴당(知退堂) 정형(廷馨)부터 시작하여 34세 현(顯)자까지 표시.
▲ 第三派 - 국당공후 정순공파
[自塢始至容(자오시지용)]
- 중조 21세 오(塢)에서 시작하여 34세 용(容)자까지 표시.
▲ 第四派 - 상서공파
[自成茂始至裕(자성무시지유)]
- 22세 성무(成茂)에서 시작하여 34세 유(裕)까지 표시.
◈ 화수회 발족과 진청문중 항렬자 의정 및 ‘우’항렬이하 항렬자 제정
무진년 중추(고종 5년. 1868년 가을) - 충북 진천군 초평면 연촌(現龍亭里陽村部落- 현 용정리 양촌부락)에 모여서 화수회를 창립 발족하고 10여 간의 초가를 세우고 경주이씨 화수실(慶州李氏花樹室)이라 편액을 걸고 화수회가 모이는 곳으로 삼았다.
여기서 진천 문중(鎭川門中)에서 정하여 준용하고 있는 항렬자를 따라서 작명키로 의정(議定-의논하여 결정함)하였으며 [-당시 미정(未定)인 우(雨)자 이하의 5대 항렬자를 새로 정하였다.-]
- 무진년 중추(고종 5년. 1868년 가을)에 경주이씨 화수회를 창립 발족하고 진천 문중(鎭川門中)에서 정하여 준용하고 있는 항렬자를 따라서 작명키로 의정(議定- 의논하여 결정함)하였으며 [당시 미정(未定)인 우(雨)자 이하의 5대 항렬자를 새로 정하였다.]하는 것으로 보아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第一派 - 익재공후 창평공후 재사당공파] 로 중시조 24세 재사당공(휘 黿- 黽)부터 34세 집(集)자까지 항렬자를 사용하였고 35세 영(榮). 36세 규(圭). 37세 종(鍾)까지는 대동항렬로 정하기 전에 진천 문중(鎭川門中)에서 정하여 준용하고 있는 항렬자로 하였고 1868년 가을 미정(未定)인 우(雨)자 이하의 5대 항렬자를 새로 정하였다.
1) 진천문중(익재공파)에서 사용하던 항렬자를 준용하기로 의정
35세 ~ 70세 이후 대동항렬 제정 전에 진천문중에서는 아래 35세 영(榮)항렬, 36세 규(圭)항렬, 37세 종(鍾)항렬을 사용하였음에 따라 이 준용하여 사용하고 38세 우(雨)항렬이하 5대 항렬자는 아래와 같이 제정하였습니다.
35세 → 36세 → 37세 →
○榮......圭○......鍾○...
○영......규○......종○...
2) 미정(未定)인 우(雨)자 이하의 5대 항렬자를 새로 제정.
38세 → 39세 → 40세 - - → 41세 → 42세→
○雨.....相○.....○熙.○炯.....在○.....○鎬.○鍵...
○우.....상○.....○희.○형.....재○.....○호.○건..
◈ 1987년에 간행된 경주이씨 대종보(정묘보) 총편 익재공파편 P298 ~ 299에 아래와 같이 세수와 항렬자를 기록. 이는 아마 구보에서 발췌하여 올린 내용으로 보입니다.
【三十五代로 된 失傳世系의 序文一節 - (中略) - 正三品通政大夫時慶山郡守啓弼記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서문 1절 – (중략) - 정3품 통정대부 시경산군수 계필 기)
[行第字亦爲預先講定錄于譜序下以示敦睦之誼(항제자 역위예선 강정록우보서하 이시돈목지의)
- 항렬 제자를 미리 정하여 족보에 순서대로 올리니 이를 보고 돈묵지의 하라.]】
43세 - - → 44세 → 45세 - - → 46세 - - → 47세
濟○.濬○....○東.....心○.병○....○世.○敎....鎭○
제○.준○....○동.....심○.병○....○세.○교....진○
◈ 중조 48세 이하 세수와 항렬자는 ‘경주이씨 항렬제차’에 따른 항렬자입니다.
48세 이하 세수와 항렬자는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