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제공파’는 ‘익재공파’입니다.
익재공파 대파시조(대파조. 파시조. 파조)이며 고려 말 정치가. 문학가. 사학가. 시인인 중조 17세 이제현(李齊賢)의 호가 익재(益齋)입니다.
드릴 益(익). 목욕재계할 齋(재)로 ‘익재’라고 읽고 씁니다.
종친님 대부분이 ‘익제’로 잘못 쓰고 있습니다.
한 분 어른이 ‘익제’로 글을 써 올리니 한자를 잘 모르는 종친님들이 따라서 ‘익제’로 써서 올리기 때문에 수많은 글에 ‘익제’라고 잘못 쓰고 있습니다.
밀양소식을 전하는 daum cafe ‘밀양 광장’에서 보내온 메일에 아래와 같은 글이 올라 있었습니다.
‘경주이씨 「익제공파」 밀양 신곡 문중회’
카페 ‘밀양 광장(밀양소식)’에 소개된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 소재 익재공파 문중의 追慕齋(추모재)의 옆에 있는 "國聖齋(국성재) 건물의 정면 좌측에 부착된 간판에 ‘경주이씨 익제공파 밀양 신곡 문중회’라고 한글로 판각되어 있습니다.
‘익재공파’를 ‘익제공파’라고 잘못 새겨져 있습니다.
이를 그대로 따서 카페 ‘밀양광장’에 게재된 글 제목에도 ‘경주이씨 익제공파 밀양 신곡 문중회’라고 되어 있어서 아래와 같이 글을 올렸습니다.
아래는 카페 ‘밀양광장’을 운영하는 레나님과 카페에서 주고받은 댓글입니다.
수정 요구 글)
글 제목과 사진자료에서 잘못된 곳을 지적하니 수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려 말에 활동하셨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공의 호(號)는 '더할 익(益)' . '재계할 재(齋)'자입니다.
위의 글 제목에 '익제'라고 표기하고 심지어 신곡 문중회에 걸어놓은 종회 간판에도 '경주이씨 「익제공파」 밀양 신곡 문중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익재공파'로 고쳐 써야 합니다.
조상님의 휘(諱)와 호(號)는 바르게 써야 할 것입니다.
┗ 레나
제가 적은 위 글(서두의 글)은 귀 문중 追慕齋(추모재)의 옆에 있는 "國聖齋(국성재) 건물의 정면 좌측에 부착된 세로로 된 간판(위 사진)에 판각된 글자(경주이씨 익제공파 밀양신곡문중회)"을 보고 적은 것입니다.
선생님의 글에 의거 위 서두의 글(파란 글자 "재")을 바로 잡습니다.
지적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이이록
감사합니다.
익재공파 신곡 문중회에서 ‘익제공파’로 잘못 판각하여 간판을 붙여 놓았네요.
그곳(신곡리)에 들리는 기회가 있으시면 잘못 판각해 놓았다고 한번 말씀을 드려 주시면 더욱 고맙겠네요.
좋은 날 되십시오.
┗ 레나
익재(益齋) 이재현(李齋賢) 선생은 우리 민족의 추앙을 받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저 역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오래 전부터 익재 선생에 대한 역사적인 교훈을 깊이 새겨 많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 이이록
선생님,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재현'에서 '재'자는 '제'자가 바릅니다.
'이제현(李齊賢)'이라고 해야 합니다.
┗ 레나
다시 확인을 해 보니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입니다.
호의 ‘재’와 함자의 ‘제’가 비슷하여 많이 혼동되고 있습니다.
익재 선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의 답글에 자세히 올려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참고자료 >
◈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3) ~ 1367(공민왕 16)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고려조의 인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의 아들이며, 고려 말의 정치가, 성리학자, 사하자, 외교가, 시인, 문장가였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년~1367년)이다.
그는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일곱 임금을 모시고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는데,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개척자인 백이정(白頤正)에게서 배웠다.
충렬왕 신축년(1301년)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이때 지공거 국재공 권부(權溥)가 사위로 맞이하였다.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나라의 학자인 요수(姚燧)ㆍ조맹부등과 함께 고전(古典)을 연구했다.
이듬해 선부의랑(選部議郞),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고,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하였다.
1319년 충선왕을 따라 강남(江南)을 유람하고 이듬해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충선왕이 토번에 유배되자 원(元) 조정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뒤에 심왕(瀋王) 고(暠)의 고려 왕위계승을 위한 오역사건으로 충숙왕이 잡혀가자 연경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해서 향리에 은거했다.
충혜왕이 원(元)에 잡혀갔을 때 글을 올려 사면을 청했다.
충선왕이 아들에게 고려왕위를 물려주고 조카 고(暠)에게 심왕위(瀋王位)를 물려준 후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원(元)정권에 의한 고려 왕위의 폐위, 복위가 반복될 때 일선에서 고려국의 왕위보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충성의 인물이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우정승(右政丞)ㆍ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발탁,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다음 해 우정승(右政丞)으로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어 관직을 사직하고 저술(著述)과 학문(學問)에 전심하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王)을 청주(淸州)로 호종(扈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당대의 명문장(名文章)으로 외교문서(外交文書)에 뛰어났고, 민간가요(民間歌謠) 17수(首)를 한시(漢詩) 7언절구(七言絶句)로 번역한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는 고려가요(高麗歌謠)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외에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이 있다.
그가 만권당(萬卷堂)에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하루는 충선왕이 중국의 문인(文人)들과 더불어 시를 지었다.
“닭울음소리는 흡사 문 앞 버들가지 같구나(계성흡사문전류(鷄聲恰似門前柳))”라는 한 구절을 충선왕이 읊자 중국 학사들이 그 출처를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충선왕이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이제현(李齊賢)이 선뜻 응대하기를
“우리나라(고려)의 시에 ‘집 머리 동트는 날 닭울음소리 수양버들 휘늘어져 한들거리듯 (옥두초일일금계창屋頭初逸日金鷄唱), 이사수양요요장怡似垂楊嬈嬈長)’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닭울음소리가 가늘고 긴 것을 버들가지에 비유한 것이니, 전하께서도 이 뜻을 취하심이요, 또 한퇴지(韓退之)의 싯귀에도 ‘뜬구름 버들가지처럼 뿌리도 꼭지도 없네(浮雲柳絮無根蒂부운유서무근체)’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곧 소리를 버들가지로 나타낸 것이 아니겠소?”하고 말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동인시화東人詩話)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益齋)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大家)>라고까지 평가했다.
그가 일찍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원(元)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학자 탕병룡(湯炳龍)이 찬(讚)을 썼는데 그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져 국보로 지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