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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시조와 표암'글에서 - 2

녹전 이이록 2016. 7. 28. 09:11

■ '경주이씨 시조와 표암'글에서 - 2



daum의 경주이씨 관련 모 카페에 올라 있는 신라 천년의 전설 “3) 경주이씨 시조와 표암의 글입니다.


잘못된 내용으로 쓰여진 글이라 원문에 [*..........]를 하고 뒤에 바로 수정합니다.


앞 회에서 삼국사기 : 본기 - 혁거세 거서간(38) - 38(BC 20) 의 기사를 올렸습니다.


이 기사와 비슷한 내용의 글이 1932년에 새로 발굴되어 알려진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시조 3세 타()의 행적과 거의 비슷한 내용입니다.


본디 경주이씨 중앙화수회에서는 이 ‘35대로 된 실전세계를 사실적이지 못한 계대라고 일찍부터 밝혔으니 이 실전계대의 내용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를 활용하여 시조님 이하 여러 조상님과 결부시켜 글을 올리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35대로 된 실전세계' 시조 3세 타()의 행적


[庸伯이고 瓢公先生이니 少能文章하고 事孝悌之道하며 行賢聖之禮하고 年十六遊學三國하니 時人稱之曰大賢也라하다.
開國建都初以佐命功臣으로 爲太輔太師大司徒하고 命遣馬韓하니 其人責以事大之禮어늘
先生曰 我國自二聖肇興으로 人事修而天時和하고 倉庫實而人民讓하다.
辰韓弁韓樂浪倭人莫不畏懷而吾王謙虛하야 使臣修聘하니 可謂過於禮라 하야 馬韓王左右諫止하다.
三韓尙戰爭하되 先生獨行仁義하고 不務威力하며 以忠事君하니 時人謂賢相이러라.
官至大匡承博士農令都尉令尙書事左右內史侍中太師公하고 太宗 丙辰太史令하다.
贈大輔成國功臣太師鷄林侯 諡文成公이라.
女雲悌外孫儒理王]


[역문]


자는 용백이고 호는 표공 선생이니 어려서 문장에 능하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의 도리를 하고 현자와 성인의 예법을 행하고 16세에 진한. 변한. 마한 삼국을 유학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뛰어난 현인(賢人)이라 하였다.


개국하여 도읍을 세울 때 좌명공신으로 태보, 태사, 대사도 벼슬을 하고 명을 받아 마한에 파견되니 마한 왕이 대국에 대한 예를 꾸짖을 때 (마한 왕이 진한辰韓· 변한卞韓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직공(職貢)을 보내지 아니하니 대국을 섬기는 예의가 이 같을 수가 있느냐는 뜻) 선생(瓢公)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두 성인(二聖-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계셔서 인사(人事)를 잘 다스리고, 천시(天時)를 조화롭게 이루며, 창고에는 양식이 가득하여 백성들은 서로 사양한다.


진한. 변한. 낙랑. 왜인들을 막론하고 모두 두려워하나 우리 왕은 겸허하여 사신을 수빙(修聘-서로 불러 길을 틈. 인사를 닦음)하니 가위 예에 지나치지 않는다고 하니 마한 왕 좌우신하가 간하여 중지되었다.


당시 삼한(三韓- 마한. 진한. 변한)이 늘 전쟁을 하되 홀로 인의(仁義)를 행하고 위력으로 누르러 하지 않으며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니 당시의 사람들이 현상(賢相- 어질고 유능하여 임금을 잘 보필하는 신하)이라 일렀다.


벼슬은 대광승박사 농령도위영 상서사좌우내사 시중 태사공에 이르고 *태종 병진(656)년에 태사령으로 바뀌었다.


증직으로 대보성국공신. 태사. 계림후가 되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따님 운제(雲梯)의 외손이 유리왕이시다.


(소견)


삼국사기본기 호공(瓠公)에 대한 기록과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시조 3세 표공 선생(瓢公先生. )의 내용이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호공(瓠公)은 동해를 건너왔고 표공 선생(瓢公先生)은 시조 3세이 휘 타(- 35대 실전세계)로 온전히 다른 인물임이 명확합니다.


이는 삼국사기 본기의 내용을 사실적이지 못한 계대인 ‘35대로 된 실전세계를 만들 때 시조 3세 표공선생 휘 타()의 기록으로 거의 비슷하게 옮겨 적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해서 35대로 된 실전 세계 중 시조 3세 표공 선생(휘 타)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비교하여 더 전문적인 조사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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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로 올린 글에서


慶州李氏 시조 알평(謁平) 유허지 생략


제목은 [*경주이씨 시조 알평 유허지]라고 해 놓고 본문은 [*경주의 연혁]을 연대별로 올려놓았습니다.


아래쪽에 또 경주이씨 시조에 대한 글이 올라 있습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는 이 알평(李謁平)으로 신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이었다.


경주이씨 대종보(大宗譜) 상계편에 박혁거세(朴赫居世) 때 아찬(阿粲)에 올랐고, [*32(유리왕 9) 양산촌(楊山村) 이씨(李氏) 유리왕 9년 서기 32년에 6(혹은 6)6부로 개칭하면서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 사성(賜姓) 받았다고 한다.


536(법흥왕 23)[*문선공(文宣公)으로 충헌공(忠憲公)] 시호(諡號)를 받았고 656(무열왕 3)에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대(繼代)를 실전하여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 거명(李居明)이후의 세계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가 [*중조(中祖)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우리나라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한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경주이씨 이알평공의 후손에서 분관한 것이다.


이알평의 후손에서 이위(李渭)의 차성이씨(車城李氏)와 이개(李開)의 합천이씨(陜川李氏). (이양식李陽植의 우계이씨羽溪李氏)가 갈라졌다.


중조인 이거명의 후손에서는 5세손 이주좌(李周佐)가 아산이씨(牙山李氏), 6세손 이우칭(李禹偁)이 재령이씨(載寧李氏), [*이양식(李陽植)이 우계이씨(羽溪李氏), ] 삭제. - 시조 후손에 넣음. 


설명)


우계이씨(羽溪李氏)는 시조 후손에서 분적된 분적종이지 중시조 후손에서 분적된 분적종이 아니기 때문에 파란색 글자로 앞에 (.............)로 삽입하였습니다


경주이씨에 대한 모든 내용은 1987년도 간행 정묘보인 경주이씨 대종보를 중앙표준보로 하여 근간자료로 하는데 대종보의 분적도와 중앙화수회 홈페이지 분적도에는 처음에는 우계이씨 분관시조는 이양식(李陽植)이 아닌 이구(李球)로 기록하고 있었으나 근년에 다시 이양식(李陽植)을 분적시조로 하고 있다.


17세손(중시조 18세) 이영재(李永梓)와 이군재(李君梓)가 진주이씨(晉州李氏), [22세손(중시조 23세)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22세손(중시조 23세) 이반계(李攀桂)를 분적조(분적시조)로 하여] 원주이씨(原州李氏), (16세손(중시조 17세) 이임간(李林幹- 李直幹)을 분관조(분관시조)로 하여 장수이씨長水李氏)로 나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