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 차례’ 대신 ‘명절 절사’라고 해야 한다? - 1
인터넷에 올라 있기에 감히 소견을 올려 봅니다.
아래의【............】안의 글은 모 교수님의 글입니다.
일부 필요한 글만 발췌하여 올립니다.
【추석명절에 지내는 차례는 절사(節祀)라고 해야 한다.
................*아래의 (.........)안의 글은 현재의 상황을 나타낸 글인 것 같습니다.
(傳統的(전통적)인 節祀(절사)명절에는 제사를 茶禮(차례)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節祀(절사)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명절 중에서 차례를 가장 많이 지내는 명절은 설과 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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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제사를 <명절차례>라고 말하는 것은 엄청나게 틀린 것이다.
<절사>라고 말해야 한다.
근세조선시대 왕이 중국 사신에게 음식 대접하는 것을 두고 일컫는 궁중용어가 다례(茶禮)였다.]
다례를 행하는 관청이 태평관(太平館)이었다.
◑太宗實錄. 太宗元年辛巳三月癸卯條 有曰 上如太平館, 與使臣, 行茶禮.
<임금이 태평관으로 가서 중국사신에게 다례를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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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람들이 <茶>라는 글자를 <차>로 읽는다.
조선 음은 da(다) 였다.
잎을 끓여 마시는 풀을 <茶>라고 하고, 그 글자 소리를 da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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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일본 친일학자 이희승이 일본백과사전 <廣辭苑(광사원)>을 베껴 <국어사전>이라고 명명하고는<茶禮>를 <차례>로 적었다.
여기에서 일본발음인 <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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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나온 문집에는 설날 아침에 조부모와 부모에게 올리는 세배(歲拜)가 있을 뿐, 제사가 없었다.
근세조선시대에 나온 문집에서도 설날 세배가 있을 뿐 제사가 없었다.]
['설날 제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면,] 1895년 을미년 음력 8월 민비가 시해되고, 유길준 무리가 병신년부터는 음력을 폐지한다고 했다.
양력을 사용한다고 건양(建陽)이라고 했다.
1895년 음력 11월 17일이 양력 1월 1일이 된다고 미리 알렸다.이때 <음력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집만이라도 음력을 굳게 지키자>는 다짐제사(誓祭)를 설날에 올렸던 가정이 나왔다.
경북 성주군 벽진면 징기 마을 수촌리에서다.
그것을 이끌었던 선비가 수촌(守村) 여진규(呂軫奎)였다.
<내가 나라를 지킬 재주가 없으나, 우리 마을은 내가 지키겠다.>하고는 자기 호를 <守村>이라고 했다.
[세배를 올리고 난 뒤에 다짐제사를 올리고는 이름을 원조절사(元朝節祀)라고 지었다.]
세배 후 사대합설(四代合設) 무축단잔(無祝單盞)하라고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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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제사>라는 말에서 줄인 말이 절사(節祀)이다.
<절사>라는 말이 차이나(중국) 말이어서 사용하기 싫은 사람은 <설날제사> <설제사>라고 하면 된다.
일본말인 <차례>는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 위의 글 요지는 ‘茶禮’를 우리 말 ‘다례’라 하지 않고 이희승 선생이 국어사전을 편찬 하면서 ‘차례’라고 한 것이 ‘차례’로 널리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모 교수님의 논지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로 나타내고 이에 대하여 아래에 소견을 올립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나온 문집에는 설날 아침에 조부모와 부모에게 올리는 세배(歲拜)가 있을 뿐, 제사가 없었다.]
소견)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나온 문집에는 ‘설날’ 아침에 조부모와 부모에게 세배는 올렸는데 ‘제사가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설날(정조. 원조. 원단. 원일 등)에 세배는 하였는데 '제사가 없었다'는 것은 황당한 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검색에서 얻은 자료에서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설날 제사에 관련된 글을 찾아 올립니다.
◈ 조선왕조실록의 ‘절사(節祀)’에 대한 설명 글입니다.
'절사(節祀)'는 사절일(四節日) - 정조(1월1일)ㆍ한식(4월5~6일)ㆍ단오(5월5일)ㆍ추석(8월15일)에 받드는 제사를 말한다.
이 때 ‘茶禮(차례. 다례)를 행한다.’ 라고 하였다.
◈ 원단(元旦)의 절사(節祀) 즉 차례(茶禮)의 사례입니다.
고려 말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쓴 시(詩)에서
○ 가정집(稼亭集) 제17권 율시(律詩) 정단(正旦)의 눈 이곡(李穀)...................
새해엔 상서로운 일이 많을 줄 벌써 알겠나니 / 便是新年多瑞氣
초주 함께 민간의 가요도 바쳐 올리고 싶네 / 願隨椒酒進民謠
* ‘초주(椒酒)’를 풀어 쓴 글에 아래와 같은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초주(椒酒)’는 ‘새해아침 다례(茶禮)를 지내고’ 웃어른에게 바쳐 축수하며 하례하는 술 이름이다.]
*‘초주(椒酒)’의 풀이에서 ‘설날(원단. 정조)아침 차례((茶禮)를 지내고‘라고 하였으니 제사를 모신 것입니다.
다음은 한국 고전 번역원 정조다례(正朝茶禮). 원조다례(元朝茶禮)의 기록을 찾았습니다.
◈淵齋集(연재집) 淵齋先生文集(연재선생 문집)) 卷之十四(권지14)
書(서) 答宋涵卿(답 송함경) - 송병선(宋秉璿)
[忌日在正朝。則旣行忌祭。而復行茶禮。不嫌於再祭否。正朝茶禮。一廟之內。不可以忌祭之行而獨爲昧然。豈有一日再祭之嫌耶]
◈俛宇集(면우집)) 俛宇先生文集(면우선생 문집) 卷之三十九(권지39) 書(서) 答河殷巨(답 하은거)
- 곽종석(郭鍾錫)
[至除日受衰絰。與諸生及里人並披縞。元朝茶禮。果因悲遑不及行。待立春日。]
[不可行朔奠。鄙人當以晦日成服。然元朝茶禮。有難猝行]
◈ '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 부록 14권, 순종 16년 2월 16일 양력 1번째기사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정조(正朝)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 옛 설날인 정조(正朝). 원조(元朝)에 다례(茶禮)라고 하였으니 설날에 차(茶)로 예(禮)를 올렸음을 알 수 있고 이는 즉 절사(節祀)인 것입니다.
▲[세배를 올리고 난 뒤에 다짐제사를 올리고는 이름을 원조절사(元朝節祀)라고 지었다.]
- 正朝茶禮(정조다례), 元朝茶禮(원조다례)에서 정조(正朝)와 원조(元朝)는 음력 1월1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원조절사(元朝節祀)에서 원조(元朝)는 정조(正朝)와 같은 말이고 '절사(節祀)'는 즉 '차례(茶禮)'와 같은 말이니 '원조절사(元朝節祀)'는 '正朝茶禮(정조다례)', '元朝茶禮(원조다례)'로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별다르게 경북 성주군 벽진면 징기 마을 수촌리의 선비 수촌(守村) 여진규(呂軫奎) 선생께서 '설날 제사' 를 새로 만들어 전한 것이 아니고 ['설날 제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면, 1895년 을미년...] 운운으로 기술하여 오해가 있는 것입니다.
1895년 을미년 유길준 무리가 병신년부터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권장 했을 때 이에 반발하여 예부터 지켜오든 설날인 '원조절사(元朝節祀)'를 계속 잇도록 한 것인데 '설날 제사'를 이때부터 새롭게 지낸 것인양 말하여 오해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음력 1월 1일을 뜻하는 정조(正朝). 원조(元朝). 원단(元旦). 원일(元日) 용어대신에 '설'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