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 제사는 “다례(茶禮) - 1
명절 제사는 ‘차례’가 아니고 “다례(茶禮)”로 써야 한다.
명절제사 <茶禮 (다례)>를 <차례>라고 말하는 것은 일본식 발음의 영향이다.
일본사람들이 <茶(다)>라는 글자를 <차 : ちやレイ 챠레이, 체아레이>로 읽고 조선 음은 다(da)였다.
‘차례’라는 말이 보편화 되어 바로 잡기에는 늦은 감이 들지만, 우리말 <절사>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에게 음식을 접대할 때의 궁중용어가 다례(茶禮)였고 다례를 행하는 관청은 태평관(太平館)이었다.
◑ 太宗實錄. 太宗元年辛巳三月癸卯條有曰 上如太平館, 與使臣, 行茶禮.
(태종실록. 태종 원년 신사 삼월 계묘 조유왈 상여 태평관, 여사신, 행다례.)
<임금이 태평관으로 가서 (중국) 사신에게 다례를 행했다>
<如(여)>는 왕이 갈 如(여)자다.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잎을 다려서 마시기에 사신을 대접하는 음식상 위에는 반드시 잎물(茶水)이 놓여지게 되었다.
조선왕조 궁중에서 중원사신을 대접하는 음식상 위에 온갖 먹거리가 올라가게 된다.
그들 먹거리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잎을 끓인 물이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국 왕이 차이나 사신을 대접하는 것을 두고 다례(茶禮)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그 뒤 만국사신(萬國使臣)이 오게 되자 <茶禮 다례> <茶禮床 다례 상>이라는 말이 없어졌고 나라를 잃게 되자 다례(茶禮)라는 궁중용어도 없어졌다.
잎을 끓여 마시는 풀을 <茶(다)>라고 하고, 그 글자 소리를 다(da)라고 했다.
경북 고령군에 다산면(茶山面)이 있다.
달성군 지묘동에 다천정(茶川亭)이라는 경주최씨 재실이 있다.
정종시대 정약용 호가 <茶山>이다.
‘차산’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다.
광복 후 리◌◌이 일본말 백과사전 <廣辭苑(광사원)>을 베끼기 하여 <국어사전>이라고 했다.
<茶禮 : 다례>를 <차례>로 적었다.
여기서 일본소리 <ちやレイ 체아레이. 차>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말이 우리나라의 말을 엉망으로 망쳤다.
고려시대에 나온 문집에 설날 아침에 조부모, 부모에게 올리는 세배(歲拜)가 있을 뿐, 제사가 없었다.
조선시대에 나온 문집에서도 설날 세배가 있을 뿐 제사가 없었다.
설날 제사가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고 하니, 1895년 을미년 음력 8월 민비가 시해되고, 유길준 무리가 병신년부터는 음력을 폐지한다고 했다.
양력을 사용한다고 건양(建陽)이라고 했다.
1895년 음력 11월 17일이 양력 1월 1일이 된다고 미리 알렸다.
다짐 제사(誓祭 서제)
이때 <음력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 집만이라도 음력을 굳게 지키겠습니다.>라는 다짐 제사(誓祭)를 설날에 올렸던 집이 나오게 되었다.
경북 성주군 벽진면 징기 마을 수촌리 려촌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끌었던 선비가 수촌(守村) 려진규(呂軫奎)였다.
<내가 나라를 지킬 재주가 없으나, 우리 마을은 내가 지키겠다.>고 하고는 자기 호를 <守村(수촌)>이라고 했다.
세배를 올리고 난 뒤에 ‘다짐제사’를 올리고는 이름을 ‘원조절사(元朝節祀)’라고 지었다.
세배 후 사대합설(四代合設) 무축단잔(無祝單盞)하라고 시켰다.
로석 려구연(老石呂九淵)이 수촌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