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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侯) 와 공(公)의 의미

녹전 이이록 2011. 2. 24. 20:55

 

● 후(侯) 와 공(公)의 의미

 

 

東國 十八賢人中 (동국18현인 중) 諡號(시호)를 보면 崔致遠,(최치원- 문창후文昌侯)과 薛聰(설총- 홍유후弘儒侯)은 후(侯)로 하고  安裕(안유- 문성공文成公) 등 많은 인물은 대부분 公(공)자를 붙혔는데, 侯(후)자 와 公(공)자의 차이나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십습니다.  (天安市 稷山鄕校 儒林입니다.)

 

○ 草庵  

 

公(공)은 五等爵(5등작) 중 첫째이며 侯(후)는 두 번째입니다.

 

▶周禮春官大宗伯公執桓圭註公二王之後及王之上公

▶周書文帝編公等勿疑庚戌太祖率騎六千云云

▶王制王者之制祿爵 公侯伯子男 凡五等 註孟子言 天子一位 子男同一位

▶孟子萬章章 天子一位 公一位 侯一位 伯一位 子男同一位 凡五等也

君一位 卿一位 大夫一位 上士一位 中士一位 下士一位

凡六等 註此班爵之制也五等通於天下六等施於國中

 

○이이록

 

◆ 해당인물에 대하여 간략히 알아보자. 

 

▲ 최치원(崔致遠- 文昌侯) (857~?)

 

신라 말기의 문장가,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868년(경문왕 8년) 당나라 유학을 떠나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벼슬함.

 

귀국하여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상소해서 아찬이 되었다.(6두품)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이 《삼국사기》를 통해 남아 있다.

 

우리말 고문(古文)으로 된 천부경(天符經) 한문 번역본을 남겼다는 주장이 있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 설총(薛聰- 弘儒侯)

 

생몰년 미상이나 기록으로 보면 대강 생존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신라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이며,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3문장(新羅三文章)으로 불린다.

 

자는 총지(聰智). 할아버지는 나마(奈麻) 담날(談捺)이며, 아버지는 원효(元曉)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년)을 충고한 일화가 있으며 719년(성덕왕 18)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를 지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년) 때의 학자로도 소개하고 있다.(6두품)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 안유(安裕. 文成公. 安珦) (1243∼1306)

 

충렬왕 때 원나라를 왕래하며 직접 주자서(朱子書)를 베껴오고,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는 등 성리학의 도입과 보급에 힘썼다.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裕). '향'(珦)자가 조선 왕조 문종의 이름자와 같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모두 초명으로 불렀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 공(公)과 후(後)에 대한 검색 내용은 아래와 같다.

 

▲ 공(公)

 

남자’를 높여 일컫는 말.

 

‘그분’과 비슷하다. ~의 업적을 기리다. <참고> -공(公).

 

성명. 호 뒤에 붙어서 높임의 뜻을 나타내는 말.

 

①상대를 높이는 말 ②벼슬 ③존칭(尊稱) ④귀인(貴人) ⑤제후(諸侯)...

 

아래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전에 나오는 ‘공(公)’에 대한 내용들이다.

 

△ 오등작 가운데 첫째. <준말> 공(公). <참고> 공작. 남작. 백작. 자작. 후작 등 오등작.

 

△ 경순왕- 고려에 항복하자 고려 태조 왕건이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함. 태자보다 위 서열

 

△ 중국에서 열 가지의 신분 등급(身分等級)으로서 왕(王)• 공(公)• 경(卿)• 사(士)• 조(皁)• 여(輿)• 예(隸)•

요(僚)• 복(僕)• 대(臺) 등을 가리키는 말.

 

이것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7년조(條)의 ‘하루[日]의...

 

△ 통치영역으로서 '공(公)',

 

공자의 '윤언(論語)'를 통해서는 종법적 질서로서 '공(公)',

 

'공자(孟子)'에서는 군주의 권위로서 공(公),

 

주자의 '회암집(晦菴集)'에서는 정치적 지배영역으로서 공(公),

 

고염무의 '일지록(日知錄)'은 공사(公私)의 일원성으로서 공(公)으로 각각 나누고...

 

△ 박린(朴璘)의 호는 청라(靑蘿)인데 25세 때 적성 감악산 보제암(積城紺岳山菩提庵)에서 문학을 공부하는데 성우계(成牛溪) 이율곡(李栗谷)이 찾아오니 청라공(靑蘿公)이 극진히 영접하였다.

 

△ 삭녕 최씨==도원공(道源公) 묘지문

 

△ 정익공(貞翼公) 이완(李浣)의 묘소에 치제한 글

 

△ 임충민공 충렬사(林忠愍公忠烈祠)에서

 

△ 중국 당나라 태종 때 공신들에 내린 작위

 

사도(司徒)인 조국공(趙國公) 무기(无忌),

사공(司空)인 하간왕(河間王) 효공(孝恭),

사공인 태자태사(太子太師)인 정국공(鄭國公) 위징(魏徵),

이부상서(吏部尙書) 진국공(陣國公) 군집(君集),

병부상서(兵部尙書)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

 

▲ 후(侯)

 

△ 《위략(魏略)》에 의하면 BC 4세기경에 조선의 후(侯)가 중국의 연과 거의 같은 시기에 <왕>을 칭하였다고 하였는데....

 

△ 주무왕은 주왕실의 세력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기 위해서, 희발은 작위를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5등급으로 나누어 친족과 공신들을 책봉하고, 그들에게 제후국을 세우도록...귀족 신분의 작위서열(爵位序列). 오서(五瑞)

 

△ 중국에서 오정후(烏亭侯)- 오정현의 제후(提侯).

 

공이 있는 신하를 제후로 봉할 때 공적이 큰 사람은 현(縣)에, 공적이 작은 사람은 향정(鄕亭)에 봉하여 그곳 지명을 덧붙여 부르게 했다.

 

△ 4명의 백제 장군들은 남제의 장군호를 제수 받게 된다.

 

이들은 장군호에 이어 어김없이 왕이나 후(侯)로 봉해지는데, 왕과 후 앞에는 지명을 관칭(冠稱)하고 있다.

 

△ 연문후(燕文侯. 기원전 361~333) 28년(B.C 344)에 소진(蘇秦)이 말했던 "燕東有朝鮮遼東(연동유조선요동)" ...이 시대에는 이미 군신의 도가 무너진 지 오래되어 후(侯)가 감히 왕(천자)이라 칭하고, 천왕의 나라 제후국인 천왕격인 번조선왕을 친 것이 된다.

 

△ 소진(蘇秦)은 연문후(燕文侯)에게 합종책을 유세하여 성공했다. .....

 

그는 이어서 조숙후(趙叔侯), 한선왕(韓宣王), 위양왕(魏襄王), 제선왕(齊宣王), 초위왕(楚威王)를 차례로 방문하여 여섯 나라가 힘을 합하여 ...

 

△ 조선 때 정성군(定城君)이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

 

이때 명나라 황제가 그를 우대하여 공(公)· 후(侯) 다음 자리에 앉게 하였으며,

 

△ 후국(侯國)- 예전에, 제왕의 밑에서 제후가 다스리던 나라.

 

구빈(九賓)- 구경3(九卿)이라 하여 임금이 우대하는 아홉의 손님.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고(孤), 경(卿), 대부(大夫), 사(士)가 있다.

 

△ 侯- ㉠제후(諸侯) ㉡임금 ㉢후작

 

△ 증(贈) 판서(判書) 완산군(完山君) 이공(李公)의 묘비명(墓碑銘)

 

“완산군(完山君) 행통훈대부(行通訓大夫). 봉산군수(鳳山郡守). 황주진관(黃州鎭管)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이공(李公)의 묘비명(墓碑銘) 내용에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다.

 

[이후질부(李侯質夫)가 죽은 지 4년이 되었을 때, 고자(孤子) 후재(厚載)가 나의 거처를 찾아와 후(侯)의 묘갈명(墓碣銘)을 청하며 말하기를 “삼가 비석을 갖추어 후일을 기다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후재(厚載)의 동생 후원(厚源)이 후(侯)의 행적을 엮어서 잇따라 청하기를 “우리 선고(先考)가 불후(不朽)하게 될 것은 이것에 의지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후(侯)와 가까이 지냈는지라 그 뜻을 슬퍼하며 사양치 못했다.]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세자사(世子師) 신흠(申欽)이 짓다.“

 

에서 완산군 이질부(李質夫)를 후(侯)라고 칭하였다.

 

*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문에 공(公)으로 불리었는데 후(侯)로 불린 것은 왕족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 전한 고조 유방 때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

 

△ B.C 3세기경에 지은 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은(殷)나라가 멸망한 후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의 후(侯)에 봉(封)하였다고 적혀 있고

 

△ 영천후 전손사(潁川侯顓孫師)

 

당(唐) 현종 개원27년(739)에 진백(陳伯)으로 봉해졌고, 송(宋) 진종 대중상부 2년(1009)에 완구후(宛丘侯)로 가봉되었으며, 정화(正和) 원년(1111)에 영천후(潁川侯)로 봉해졌다.

 

△ 무후사(武侯祠)

 

제갈량을 모시는 무후사(武侯祠, Temple of Marquis)가 있다.

 

무후사는 제갈량의 사후에 내려진 시호 충무후(忠武侯)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 중국 전국시대에 오기는 서쪽의 위(魏)나라로 갔다.

 

위나라 문후(文侯)는 곧 오기를 장군으로 삼아 진(秦)나라를 쳐서 성 다섯 개를 ...


(정리)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이나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고(孤), 경(卿), 대부(大夫), 사(士)’에서 공(公)다음의 서열이 후(侯)임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侯)가 꼭 공(公) 다음의 작위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위의 자료를 보면 후(侯)가 대체로 공(公)보다는 서열이 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公이 우선하고 어떤 경우에는 王도 侯로 읽어 侯가 우선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해서 [崔致遠(최치원 文昌侯문창후), 薛聰(설총 弘儒侯홍유후)과 安裕(안유 문성공文成公)에서 후(侯)자와 공(公)자 차이]는 시대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대체로 후(侯)는 특별한 인물에게 부여되는 것 같고 공(公)의 쓰임은 범위가 넓은 것 같습니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와 홍유후(弘儒侯- 설총)의 추시(追諡- 추후에 내린 시호)는 고려 현종 임금 때 내린 것입니다.

 

고려 때의 존칭으로는 대부분 公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비문에서 많이 확인이 됩니다.

 

그런데 신라 때 사람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와 홍유후(弘儒侯- 설총)에게 추시(追諡)를 내리면서 고려 때에 많이 사용한 公을 붙여 말하지 않고 侯를 붙여 추시(追諡)하였다는 것은 후세 사람이 선대의 선조에게 최대 존칭을 써서 侯를 붙여 추시(追諡)한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해서 위의 소자료에서 보면 公도 侯도 시대에 따라 어느 것을 먼저 서열적으로 나타내기는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侯는 제후(諸侯)를 뜻하는 용어로 더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公보다는 侯가 더 지위와 존경을 더하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