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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全州李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 - 2

녹전 이이록 2024. 4. 24. 08:44

전주이씨(全州李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 - 2

 

따라서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전주(全州)는 대륙에서 옮겨진 지명인 것이 분명해 집니다.

 

아마도 신라 사람들 중 이한(李翰)을 시조로 하는 많은 사람들은 대륙의 전주에서 살다가 조선시대에 반도로 옮겨와 정착하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아래에 다시 설명함)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승하하시고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全州)에 태조 李成桂의 사당을 짓고 영정을 모시는 과정에서 全州를 본관(本貫)으로 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시작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주이씨라는 것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지어낸 것이며 全州李氏(전주이씨)라는 것은 역사적(歷史的)으로 없는 것이었다." 라는 표현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절하지 못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전주이씨의 족보가 처음으로 쓰여 지게 된 동기를 朝鮮王朝(조선왕조) 3대 태종(太宗 AD. 1401~1418)말 이후 세종(世宗)때 부터라는 주장을 강조하려다보니 그렇게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여하튼 전주(全州)는 대륙에 있는 전주(全州)이지 우리나라에 있는 전주(全州)를 태조 이성계의 본관(本貫)이라고 하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대종회(大宗會)의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경주이씨대동보 / 전주이씨(全州李氏)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부터 분적(分籍)되었다.

 

이한(李翰)의 지석문(誌石文)에 의하면 이한(李翰)은 후당(後唐) 천보(天寶 AD. 742~756) 13년에(AD. 755)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한(李翰)의 선조는 누구일까요?

 

신라 56대 경순왕이 고려태조 왕건으로부터 받은 봉지가 경주(慶州)입니다.

 

경순왕은 그곳 경주에서 왕건의 딸과 혼인을 하고 여생을 제후왕으로 살았습니다.

 

경순왕이 왕건으로 부터 감숙성 경양현에 있는 땅을 봉지로 받고 처음으로 경주(慶州)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그 후 이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로 망명해왔습니다. (신라말기 북방육로로 이동해옴 : 추정)

 

또 다른 기록으로 신라 33대 성덕왕(기원후 699~733)때에는 신라의 유민들이 서역인 돌궐로도 도망을 갔다는 기록이 고려도경 시봉편에 적혀있습니다.

 

이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후 발해와 전쟁을 치를 때입니다.

 

당시 돌궐은 청해성과 신강성 일대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경주(慶州)에 안착한 신라유민들은 처음에 선진 이주민들(高句麗)과 영토분쟁을 치루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전무한 상태입니다.

 

여하튼 우리나라 동해물가에 도착한 신라의 유민들은 다시 옛 신라를 복원하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경주를 비롯한 경상남북도 일대에는 신라보다 고구려 계통의 유물들이 더 많습니다.

 

지금 학자들은 어거지 쓰기로 이지역의 유물이 신라와 가야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륙으로부터 이주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된 시기로 볼 때 이들 신라계 유민들이 가장 늦게 들어온 것입니다.

 

한반도의 경주와 공주 등에는 왕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비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반 백성이 죽어도 묘비를 세우는 게 상식인데, 하물며 왕릉에 묘비가 없다는 것은, 몰래 이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왕릉이 비문 하나 없이 공동묘지처럼 한 곳에 몰려있다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