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암과 표암재 (연대미상) - 1
경주신문의 신 모 기자와 김 모 기자의 글입니다.
- 기념물 제54호(경주표암) - 1985년 10월 15일
동천동 석탈해왕릉 옆에 있다.
소금강산 기원전 117년 갑자년에 알천 양산촌장 이알평이 이 바위에 내려와 어둠에 쌓여있는 세상을 밝혔다하여 ‘밝은 바위’ 즉 ‘박바위’라고 전해온다.
동경잡기(1669년)에는 신라 사람들이 이 바위가 월성(서울. 경주)에 해롭다하여 박을 심어서 안보이게 했다고 하여 ‘박바위의 한자표기인 표암(瓢岩)이라고 했다 한다.
바위로 이루어진 산 전체를 표암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산위에 하트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하트 안에 표주박 2개를 을 엎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매끈한 둥근 모양의 바위를 말하기도 한다..
- 신라 화백과 민주주의 발상지, 표암재
매년 3월 중정일에 개최되는 표암춘향대제가 3일 오전 경주시 동천동의 표암재에서 열렸다.
특히, 이날 초헌관에는 이명박 전 서울특별시장, 아헌관에는 경주이씨 중앙종친회 이두철 회장, 종헌관에는 이철우 경상북도 정무부지사가 참여했으며 이밖에도 이재오, 이종걸 의원 등 종친 국회의원와 기업인들이 향사에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표암재는 경주이씨의 시조로 일컬어지며 초기 신라의 6촌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乃梁部)의 촌장으로 전해지는 표암공(瓢岩公) 알평(謁平)을 기리는 향제이다.
또, 표암공이라는 호칭은 알평이 애초에 경주 박바위에 강림했다는 전설에서 취해진 것이며 경주이씨는 스스로 정통파 대종임을 내세우는데, 이씨 중에는 표암공에 연원을 두고있는 본관이 많아 합천ㆍ가평(×)ㆍ장수ㆍ원주ㆍ아산ㆍ재령ㆍ우봉(×) 이씨 등이 이에 속하며, 이밖에도 우계 이씨와 성주(×) 이씨의 일부도 알평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표암재는 신라를 건국할 때 육부촌장이 박바위에 모여 화백회의를 결의해서 건국한 민주주의의 발상지이며 만장일치의 화백정신을 계승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 ‘표암(瓢巖)’은 동천동 소금강 산록에 있는 바위산이다.
이 바위산과 주변은 198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경주이씨 시조이자, 신라 6촌 가운데 근본이 되는 알천양산촌의 시조인 이알평(李謁平)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고 전해지며 신라의 개국과 박혁거세의 옹립에 관련된 이야기를 간직한 유서깊은 유적지다.
고대사의 수많은 사례가 그러하듯이, 표암에 대한 이야기에도 설화와 역사가 혼용되어 있어 연구와 해석에서 수많은 이견을 보여 왔다.
강석근(동국대학교 파라미타칼리지) 교수는 신라문화연구소 발간, 신라문화 44집에 실린 논문 ‘문헌자료로 살펴본 표암(瓢巖)의 문화적 가치와 의미’에서, 표암과 알평에 대한 정보가 실린 고문헌자료를 통해 경주의 소금강산 동록에 있는 표암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탐색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강 교수는 표암에 대한 고기록을 탐색하고 ‘감표암사(感瓢巖辭)’와 ‘남정기행(南征紀行)’의 표암, 이집성의 표암 각자의 문화적 의미 등을 통해 ‘박바위(瓢巖) 전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집중 연구, 발표했다.
지난 7일, 강 교수와 경주이씨 표암화수회 회장이자 재단법인 표암문화재단 이상록 이사장 일행과 표암재에서 만났다.
- 표암...화백회의 열고 신라건국 의결한 성스러운 유적지
표암은 6촌의 촌장들이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건국을 의결한 성스러운 유적지로 악강묘(嶽降廟), 광임대(光臨臺), 유허비각, 석제단, 표암재(瓢巖齋)등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으며 해마다 3월 중정에 향사를 봉행한다.
이곳에는 다소 위엄 있고 기이한 형상의 암벽들이 표암재 경내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 서 있었다.
군수 이집성이 1785년에 ‘표암(瓢巖), 월성이씨 시조 알평공강처(月城李氏始祖謁平公降處)’라는 글씨를 새긴 바위를 볼 수 있었다.
평평한 자연석을 비석처럼 다듬어 새겨 인상적이었다.
이시발 부윤 유애비도 멀리 보였다.
경내뒤뜰에는 묘우를 확장하면서 나온 옛 석재들도 많았다.
- 표암은 경주이씨 성산일 뿐 아니라 신라 건국 유적지지만 구체적인 연구 아직 미진해
강 교수는 “표암 연구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 위치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씨 시조인 알평이 하늘에서 하강한 표암봉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알평이 알천(閼川) 양산촌의 촌장이라는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표암은 알천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만으로는 표암의 위치에 대한 논란이 해결될 기미가 없었고, 최근에는 표암이 일제 강점기 유적 또는 현대 유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고 했다.
“언제부터 경주 이씨 문중에서 지금의 표암을 시조의 탄강처로 인식해 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표암과 알평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조선 중기 이전의 자료들은 대부분 경주 이씨 현조들의 세계(世系)를 기록할 때 사용된 단순한 정보였다.
표암은 경주 이씨의 성산일 뿐 아니라 신라 건국의 유적지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원인은 표암에 대한 자료 부족에 있지만 다른 왕경 유적에 비해 과소평가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했다.
- 박바위 전설, 킹과 킹 메이커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협력과 갈등의 내용 담고 있어
논문에서 강 교수는 ‘표암이 경주 이씨의 성산이라는 인식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문건은 1602년 표암 경내에 세워진 경주부윤 이시발의 이부윤 유애 비문(李府尹留愛碑文)이다.
이 문건은 경주 이씨 문중에서 표암을 성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간접적 증거가 된다’
‘지금의 표암을 경주 이씨의 성산으로 인식한 글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도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이휘일의 감표암사(感瓢巖辭)다.
이 기록에는 표암이 백률사 동록이 끝나는 지점에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표암이 그가 인식한 표암과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효종 4년(1653)이므로, 461년 전부터는 경주 이씨들은 표암을 문중의 성산으로 인식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영천군수 이집성은 1785년에 –표암(瓢巖), 월성이씨 시조알평공 강처(月城李氏始祖謁平公降處)-라는 글씨를 표암 바위에 새겼는데 이 작업은 경주 이씨 문중에서 표암을 선조 알평의 탄강지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행위였고 이후 이 작업은 표암 성역화의 기점이 됐다.’고 했다.
이외에도 경주 이씨 문중에서 표암을 성산으로 인식하고, 이곳을 성역화하는 과정은 17~18세기에 불기 시작한 각 문중들의 정체성 세우기 경향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한편, 강 교수는 박바위 전설에 대해 이휘일, 이현일 형제의 ‘감표암사’와 ‘남정기행’에 가장 먼저 나타나고 이후 동경잡기와 금오승람, 정정표암지, 최상수의 한국민간전설집에도 실려 전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휘일의 감표암사와 동경잡기에 전하는 ‘알평이 박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나, ‘박바위가 신라 왕실에 위해를 끼친다.’는 박바위 전설은 박혁거세의 신라 왕실과 혁거세왕을 옹립한 알평 가문, 즉 킹과 킹 메이커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협력과 갈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전설들은 외형적으로는 모두 다르지만 내용적으로는 3건 모두 신라 왕실과의 갈등을 의미한다.
즉, 박으로써 바위를 덮었다는 뜻은 ‘이박제표(以朴制瓢)’는 ‘박으로써 박바위를 제압’했고, 혹은 ‘종표이복(種瓢以覆)’은 ‘박을 심어 바위를 덮었다’는 것이니 이것은 그동안 알평 가문이 신라왕실로부터 받은 수많은 핍박을 의미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