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다 알기 쉬운 경주이씨 씨족사 - 1
모 블로그에 ‘보다 알기 쉬운 경주이씨 씨족史’라는 제목의 글이 아래와 같이 올라 있습니다.
많은 경주이씨에 대한 글에 잘못된 내용이 너무나 많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내용은 원문에 * 표시를 하고 ⇒ 뒤에 수정하여 올립니다.
【 경주이씨 씨족史
시조 이알평(李謁平) 이후의 실전세계(失傳世系)에 대하여는 백사파(白沙派)의 '무진보(戊辰譜)'에서 ‘28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했고, 또 광무 연간의 '갑진보(甲辰譜)'에서도 ‘35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하였는데, 이 자료의 발견경위와 내용 등이 분명치 않아 신빙할 수 없다는 점이 '정묘대종보(丁卯大宗譜)' <실전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에 밝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本)의 이씨(李氏)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본관(本貫) ⇒ 분관(分貫)한 것이다.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이개(李開)를 *시조 ⇒ 분관조(분적조)로 하는 *협천이씨 ⇒ 합천이씨(陜川李氏), 이위(李渭)를 *시조 ⇒ 분관조(분적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 이구를 *시조 ⇒ 분적조(분관조)로 하는 우계이씨(羽溪李氏)가 *갈라졌다. ⇒ 분적되었다.
또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중시조인 이거명(李居明)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졌다.
* 이거명(李居明)의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 이씨(平昌 李氏)로, ⇒ 삭제
*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 이씨(加平 李氏)로, ⇒ 삭제
5세손 이주좌(李周佐)를 분적조(분관조)로 한 그 후손이 아산 이씨(牙山李氏)로,
6세손 이우칭(李禹稱)을 분적조(분관조)로 한 그 후손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이양식(李陽植)을 시조로 하는 우계 이씨(羽溪李氏) ⇒ 삭제
*17세손 (18세) 이영행(李永倖) ⇒ 이영재(李永榟)와 이군재(李君榟) 형제를 분적조로 한 그 후손이 진주 이씨(晉州李氏),
*22세손 (23세) 이반계(李攀桂)를 ⇒ 분적조로 한 그 후손이 원주 이씨(原州李氏)로 갈려 나갔다.
17세손( ? ) 이임간(李林幹)을 분적조로 한 그 후손이 장수이씨(長水李氏) 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고려 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배출하면서 삼한(三韓)의 명족(名族)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고려 말에 생존했던 14~21세의 조상님을 파시조(派始祖)로 하여 14개 대파로 나누어진다.
*17세조인 이규 ⇒ 16세 이인정(李仁庭)을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평리공파(評理公派),
17세 이관(李琯)을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이암공파(怡庵公派),
17세 이제현(李齊賢)을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익재공파(益齋公派),
17세 이지정(李之正)을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호군공파(護軍公派),
17세 이천(李蒨)을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국당공파(菊堂公派),
17세 이매(李邁)을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17세 이과(李薖)을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
17세 *이수(李蓚) ⇒ 이조(李蓨)를 파시조로 한 그 후손이 사인공파(舍人公派)로 나누어진다.
15세조 ⇒ 15세인 이강(李康+羽)을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이고
21세조 ⇒ 21세 이지수(李之秀)를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19세조 ⇒ 이양오(李養吾)를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직장공파(直長公派),
19세 이존오(李存吾)를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석탄공파(石灘公派),
19세 이존중(李存中)를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19세 이존사(李存斯)를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교감공파(校勘公派)이다.
이 14대파(大派) 아래에서 *70여 ⇒ 80개의 소파(小派) ⇒ 중소파(中小派)로 다시 나누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융성하기는 상서공파(尙書公派)의 오신(五臣)집 중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이른바 <8별(鼈)집> 중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집>. 그리고 매죽헌(梅竹軒)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조선조에 <백사(白沙)집>에서만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이 각각 1명,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 좌의정 1명을 내 조선조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융성은 사실상 이 3파가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