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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에 대하여 – 1

녹전 이이록 2020. 8. 10. 09:37

■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에 대하여 – 1

 

모아 둔 자료에서 순서대로 정리하여 올리다 보니 전에 올린 글일 수도 있습니다.

 

daum blog경주이씨 항렬 세는 법 네이버 지식 검색에서 펌하여 제목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에 대()하여의 글입니다.

너무나 많은 잘못된 내용이 지적됩니다.

 

경주이씨에 대한 이러한 장문의 글이 하나같이 조리 있게 잘 썼으나 내용에서 잘못 기술된 곳이 많습니다.
이러한 오류투성이인 글은 1987년도 정묘년에 간행한 경주이씨 대종보가 표준보로 모든 경주이씨 뿌리에 관한 근거 자료가 되는 대종보인데 이를 표준으로 하지 않고 9년 전인 1978년 무오년에 간행된 경주이씨 대동보를 근간으로 하여 쓴 글을 토대로 쓴 글이기 때문에 잘못된 내용으로 기술한 것으로 보입니다.

 

잘못된 내용은 원문 ............*로 표시하고 아래에 [*............]로 나타낸 뒤 소견)을 올립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에 대()하여

 

1. 시조 : 이알평(李謁平)

 

2. 유래 :

시조(始祖)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은 박혁거세(朴赫居世) 탄생(誕生) 설화(說話)에 나오는 초기(初期) 신라(新羅)6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 급량부)의 촌장이다.

이알평(李謁平)은 신라(新羅)의 좌명공신(左命功臣)으로 <경주이씨 대종보>에 의하면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이 된 뒤 아찬(阿粲)에 올라 군사업무를 장악 했으며 *32(신라 유리왕 9)에 양산촌 이씨로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23년 익호(謚號)를 문선공(文宣公)으로 하였고, 무열왕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후손(後孫)에 대한 계대(繼代)가 전()해지지 않아 이알평(李謁平)35세손(世孫)이며 신라(新羅)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出身)인 이거명(李居明)1世祖(세조)로 하고 있다.

 

[*32(신라 유리왕 9)*양산촌 이씨로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급량부 이씨로 성을 사성(賜姓) 받았다.]

 

소견)

6(혹은 6)에서 6부로 개칭할 때 양산촌(혹은 양산부)에서 급량부로 개칭하면서 이씨 성을 사성(賜姓)받았으니 당시로는 급량부 이씨라고 함이 바를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공통적으로 경주이씨라 합니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23*익호(謚號)를 문선공(文宣公)으로 하였고.....]

⇒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23년 시호(諡號)를 충헌공(忠憲公)으로 하였고

 

소견)

()()자가 한자로 비슷하다보니 諡號(시호)謚號(시호)로 잘못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문선공(文宣公)은 공자님의 시호인데 성인의 시호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무언가 잘못 착각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 검색에서 3~4 군데 시조님의 시호를 충헌(忠憲)으로 올린 것이 있는데 이 시호가 바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전 뿌리공원 내 경주이씨 성씨 조각 탑에 충헌으로 각자되어 있음)

 

[그러나 그 후의 후손(後孫)에 대한 계대(繼代)가 전()해지지 않아 *이알평(李謁平)35세손(世孫)이며 신라(新羅)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出身)*이거명(李居明)1世祖(세조)로 하고 있다.]

 

소견)

*이알평(李謁平)35세손(世孫) ⇒ 이알평(李謁平)의 원대손(遠代孫)

*이거명(李居明)1世祖(세조)⇒ 이거명(李居明)을 1世(=1대)로. 1世^ 祖로. 1세인 조상

 

신라 전 시기인 약 900년의 계대는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중시조(휘 거명)님을 '이알평의 35세손'으로 읽는 것은 잘못입니다.

(900년간의 계대는 모르기 때문에 시조님의 34세손, 35세손인지.....40세손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35대로 된 실전세계35대 상계 계대도 중시조(휘 거명)님은 시조 36로 기록하고 있지 시조 35세가 아닙니다.

 

1904년부터 언급되고 1932년 분적종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 발굴되어 게재되었다는 ‘35대로 된 실전세계는 사실적이지 아니한 잘못된 계대임이 밝혀져 시조 35세 상계 세수는 헤아려 말하지 않습니다.

'35대로 된 실전세계'‘35대 시조세수중시조세수를 넣어 시조 36로 하고 시조의 35세손으로 읽는데 이는 계대를 알지 못하는데 35세손이니 하는 것은 잘못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시조세수는 헤아려 읽지 않는 것이 원칙이고 바릅니다.
계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중시조님(휘 거명)은 시조님(휘 알평)'원대손(遠代孫)'으로 말하는 것이 바릅니다.

 

[진골(眞骨) 출신(出身)인 이거명(李居明)1세조(世祖)로 하고 있다.]

진골(眞骨) 출신(出身)인 이거명(李居明)1()로 하고 있다.( 1세^ 조. 1세인 조상世祖)

 

소견)

잘못된 표기입니다.

본디 '몇 세조'의 의미가 아랫대 후손 기준으로 윗대 조상님을 헤아려 말할 때 '몇 세조(=대조)'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셈 법상 나의 아버지를 1세조(=1대조). 조부님을 2세조(=2대조). 증조부님을 3세조(=3대조). 고조부님을 4세조(=4대조)로 읽고 고조의 5세조(=5대조)로 호칭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시조님(소판공 휘 거명)‘1세조(一世祖)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럴 경우의 一世祖一世+2단어로 보고 '1세인 조상'으로 해석하여 읽어야 바릅니다.
왜냐하면 중시조님은 시조의 遠代孫(원대손)’으로써 후손들이 ‘1世祖가 아닌 '1'로 하여 아랫대 후손을 순번대로 헤아려 세수로 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경주이씨는 '시조세수'로는 헤아려 읽지 않고 '중시조세수'로만 말하는 것입니다.

 

3. 가문의 번영

경주이씨는 고려(高麗) ()에 크게 세력(勢力)을 떨쳤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도 문과(文科) 급제자 178, 상신 8,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다.

 

*오성(鰲城)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조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묘는 경기도포천군 가산면 금현리에 있다.

의정부에서 포천 가는 43번 도로로 축석령을 넘으면 송우리가 나온다. 하송우리에서 우회전하여 316번 도로를 따라 가산 쪽으로 약 2Km 정도 가다 보면 우측에 "백사 이항복 묘소 입구"라는 표시판이 나온다.

이 표시판을 따라 우측으로 구불구불한 마을길을 따라 가보면 정면2칸 측면1칸의아담한 사당이 나오는데 사당 뒤 야트막한 동산에 이항복 묘와 부인인 권율 장군 딸 안동권씨(安東權氏) 묘가 나란히 쌍묘로 있다. ⇒ 삭제

 

소견)

위의 글은 백사공 묘의 소재지를 말해주는 글로 이 글에서는 필요 없는 글로 삭제하여야 합니다.

 

*8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세칭 8() 집으로 불리우는 익재공파와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 문형 가운데 백사집에서 영의정 4, 좌의정 2,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8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세칭 8() 집으로 불리는 익재공파와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 14개 대파 중 상서공파는 ‘오신(五臣)집’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익재공파는 세칭 ‘8별(八鼈)집’으로 불리는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집안과 매죽헌(梅竹軒)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소견)

이를 자세히 언급하면 14개 대파 중 상서공파의 오신(五臣)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 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다음으로 익재공파로 세칭 ’8()화곡(華谷)이경억(李慶億) 집안과 국당공파는 8(八廷)집과는 계대가 다른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매죽헌(梅竹軒)집안이 그에 버금간다.

 

고려(高麗)()의 대학(大學)()이자 외교가(外交家), 문장가(文章家), 충신(忠臣)이기도 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고려(高麗) 때의 경주(慶州) 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忠宣王)부터 공민왕(恭愍王)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文章家)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卓越)한 외교가(外交家)였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8형제(兄弟)가 모두 문장(文章)에 뛰어나 8문장(文章)으로 꼽히는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린(李公麟)의 아들들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지자 유성룡을 도와 병참 책임을 맡는 등 큰 활약을 한 이시발(李時發)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 전후 정승에 올라 당쟁 을 막는데 힘쓴 조선시대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청백리에 올랐다.

근대 인물로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과 재계의 거목이었던 삼성그룹의 이병철회장이 있다.

 

[이제현은 충선왕(忠宣王)부터 공민왕(恭愍王)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 이제현은 충렬왕(忠烈王)부터 공민왕(恭愍王)까지 일곱 임금을 섬기며...

 

소견)

'이제현은 충렬왕(忠烈王)부터 공민왕(恭愍王)까지 일곱 임금을 섬기며...'라고 고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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