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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사공의 글 - 백사집 해제 -

녹전 이이록 2010. 7. 31. 14:00

■  백사공의 글

 


◆《백사집(白沙集)》 해제(解題)

- 임형택(林熒澤) -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1. 머리말


이 책은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백사집(白沙集)》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백사집》은 1629년 강릉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로 여러 차례 출간되었다.

 

그 바로 7년 후인 1636년 진주에서 중간본이 나오고,

다시 100년이 가까운 1726년에 영영 신간본(嶺營新刊本)이 나온 것이다.

 

초간본과 중간본을 대조해 보면

편차는 유사하지만 서로 빼고 넣은 것이 있는데

영영판에서는 양자를 전부 포괄하고 누락분을 보충하였으며 관련 문자도 추가해서 덧붙였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기왕에 《한국문집총간》을 편찬할 때

초간을 취하는 뜻에서 강릉판을 영인의 저본으로 삼았던바

이번 국역에서도 역시 이를 대본으로 삼았다.

 

이항복은 본관이 익재 이제현을 배출한 경주 이씨로

자는 자상(子常)이며, 권율(權慄) 장군의 사위가 되어

처가 곳인 필운대(弼雲臺 인왕산 기슭의 현재 배화여고 교정) 근처에서 살아

젊은 시절엔 필운이란 호를 썼고

만년에는 서울 근교 망우리쪽에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짓고 은퇴하여 동강이란 호를 쓰기도 하였다.

 

따로 또 청화진인(淸化眞人)으로 자호한 바 있으나 백사로 널리 일컬어져 왔다.

 

그리고 ‘오성’이란 칭호는 그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의 봉작을 받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선조ㆍ광해군 사이의 명재상이자,

국난을 극복한 공신으로 이름 높은 한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도 두루 알려진 인물이다.

 

실로 그는 공업(功業)과 문장(文章)을 아울러 이룩한 사대부의 빼어난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백사집》은 이러한 그 자신의 체험적 기록이며, 정서적 표출인 동시에,

저 어렵고 복잡했던 시대에 대응한 논리가 잘 드러나 있는 내면의 형상이다.

 

이러한 《백사집》이 드디어 임정기 선생에 의해

현대 언어로 알기 쉽게 바뀌어 그 진면목을 일반 독자들까지 직접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필자는 이를 기뻐하며 그 책의 내용과 저자에 대해 대략 소개해 둔다.


2. 백사(白沙)의 시대와 행적(行績)


명종 11년 서울의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에서 태어나

광해군 10년 함경도 북청(北靑)의 적소(謫所)에서 63세로 생을 마감한

백사 이항복은 생애가 조선조의 전기와 후기의 분수령에 걸쳐 있다.

 

왕조 국가는 2백년 동안 외관상으로 말하면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어서

선조 연간에 이르러서는 극에 다달아 이른바 목릉 성세(穆陵盛世)로 일컬어지는 시대를 맞았다.

 

목릉 성세에서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일본군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 그리고 지배층 내부의 분열로 인한 당쟁이 바로 그것이다.

 

1592년에서 1598년에 이르는 전쟁은 한반도를 무대로 펼쳐졌으나

동북아 세계에 있어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거니와, 그 파동 역시 국제적 규모였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 열도는 새로운 막부(幕府) 체제가 성립하였고,

중국 대륙은 대규모의 파병으로 국력의 피폐를 가져와 결국 명ㆍ청의 교체로 이어진 것이다.

 

한반도는 전쟁의 접전지가 되었던 만큼 국토의 유린과 인민의 손실이 매우 컸고,

또 그런 만큼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해졌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는 무너지지 않고 그 체제를 존속시킬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두고 비역동적 역사 전개로 지목하는 부정적 시각도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사실에 대한 평가에 앞서 사실이 있게 된 요인을 알아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된다.

 

한반도는 17세기 동북아 국가의 역사 전환의 중심장이 되었음에도

오직 홀로 망하지 않고 어떻게 기존의 왕정을 그대로 지탱하여,

이후 무려 3백년이나 존속할 수 있었을까?

 

해답이 간단히 내려질 성질의 물음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사대부층이 건재해서 정치ㆍ사회적 지도력을 발휘했었던 점에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외적의 침략을 당하자 왕정의 허약성과 무능력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일패도지로 무너진 위기 상황에서

외국 군대의 대규모 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다시 추스려서 전세를 만회,

드디어는 침략자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중흥의 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그 역량은 주로 사대부층에서 나왔던 것이다.

 

민중의 에네르기를 결집, 의병(義兵)으로 일으켜 세운 구심점에는 사대부층이 있었으며,

지도력 또한 전적으로 사대부층에 기반했던 것임이 물론이다.

 

그 전 과정에서 조정의 중신으로 역할이 컸던 인물로는

유성룡(柳成龍)과 이덕형(李德馨), 이항복 등이 손꼽힐 것이다.

 

이항복은 25세 때 문과에 급제,

국정에 참여 했던 바 임진왜란 당시는 나이 37세로서 도승지라는 요직을 맡고 있었다.

 

전황이 아주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되자

그는 자기 한 몸을 나라에 던지기로 각오한 나머지 가족들과의 접촉도 일체 끊고

오직 국사에만 노심초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왕을 모시고 피난길에 오르는 전날 밤에는

그의 측실(側室) 부인이 얼굴이나 한 번 보기를 애원하였으나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열어주지 않았고,

새벽녘 집을 나설 때 달려나와 관복의 띠를 붙잡자

그는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띠를 끊어 버렸다는 것이다.

 

국사에 전심전력하는 데 마음이 산만해질까 염려하여 과단을 내렸던 것임이 물론이다.

 

그는 국운이 걸린 사안에서 전략적 판단을 기민하게 하여,

큰 방향을 옳게 잡도록 하고 급박한 사태를 무사히 넘긴 일이 누차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명군과 아군의 협조 관계,

군수 지원 등 착잡하고 곤란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도

그가 업무를 관장하면 민활하고도 무리 없이 처리되었다.

 

그래서 전쟁을 수행하는 주무 장관인 병조 판서를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역임했던 것이다.

 

전후에 논공 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수훈(首勳)이 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이 때 그가 상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사양하자 국왕은,

 

“경(卿)은 승정원의 장(長)으로서,

병부(兵部)의 장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좌우에서 떠나지 않고

주선하며 진췌(盡瘁)하였으니 고충 경절(孤忠勁節)은 내가 잘 아는 바다.

 

나는 조종(朝宗)에 이미 죄를 졌지만 경은 실로 조종의 충신이다.

 

지금 공훈을 논함에 경이 아무리 수석을 차지하지 않으려 한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비답을 내렸다.

 

선조의 통치 기간에 시작된 당쟁은

당초엔 명망이 높은 몇몇 관인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으로 발단이 되었던 것이

단시간에 복잡하고 심각한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전란을 치르는 중간에도 당쟁은 중지되지 않았다.

 

의주로 파천(播遷)을 가 있을 때도

여전히 서로 상대방을 공박하며 아웅다웅하는 꼴에 선조는

“제신들, 오늘 이런 처지에 놓였는데 다시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느냐.”

고 탄성을 발한 일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로 붕당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으로 발전하면서

집권당파 내부에서 분열 작용이 활발해졌다.

 

즉 동인이 남북으로 갈리고, 북인이 다시 소북, 대북으로 갈려나갔다.

 

선조 말년에는 소북이 정권을 잡더니 광해군 통치기에는 대북이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당쟁은 한 당파를 실각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국왕이 축출 당하는 사태까지 연출했던 바

광해군은 당쟁의 희생 군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이조 후기의 정치 사회에 나름으로 고착된 붕당과 그 대결은

유교 국가, 사림 정치가 초래한 정치 형태로서

근대적 정당 제도와는 동류로 간주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은 물론이다.

 

또한 그것은 고질적 병폐를 무한히 재생산했던 터이나

한편으로 상호 견제 작용을 하여 왕정의 안정에 기여한 면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백사는 바야흐로 붕당이 성립하는 출발점에서 입조(立朝)하여

당쟁의 와중에 있었지만 당인(黨人)이 되지 않으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이 당파로 편을 지어 어진 사람이건 못된 사람이건

누구나 다 표방(標榜)을 하는 판에 공은 유독 기울어지지 않고 가운데 서서

태산교악(泰山喬嶽)처럼 우뚝하니 아무도 감히 헐뜯지 못했다.”

는 평을 듣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 정치 무대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당쟁과 무관하게 비켜서 있을 수 없었다.

 

결국은 서인의 계보로 들어간 셈이 되었으나 오직 중도를 지키고 정론을 펴고자 했다.

 

기축옥사(己丑獄事) 때는 문사랑(問事郞)이란 직책을 맡았던 바

억울한 자가 나지 않도록 힘을 썼으며,

서인이 동인을 공격하여 유성룡을 죄에 연루시킬 때는

이런 인재는 나라를 위해 죄를 주어서 안 된다 하여 구해 냈고,

대북파가 회재(晦齋)와 퇴계(退溪)를 비판하고

문묘(文廟)에서 축출하려고 분란을 일으켰을 때는 회재와 퇴계를 방어하여 분란을 잠재우려 하였다.

 

급기야 광해군의 계모(繼母)인 인목대비를 몰아내는 소위 폐모(廢母)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유교 국가의 대원칙에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그는 병이 침중한 몸을 일으켜 결연히 엄정한 논리로 의리를 천명하였고,

이 때문에 그 자신 멀리 북청으로 유배를 가 그 곳에서 최후를 맞은 것이다.


3. ‘문장치신(文章致身)’의 인간 유형과 그 문장의 특징


이항복이란 인물은 굳이 현대 사회의 분화된 개념을 적용해 본다면

신분적으로 정치인 혹은 고급 관료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인간 면모를 형성함에 있어

자신이 갖춘 문장의 역량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이 점을 그의 가까운 후배인 신흠(申欽)은

《상촌(象村)》구정록(求正錄)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선조 중기부터는 나라 안이 무사하여

인민들은 생업을 즐겨 소강(小康) 시절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임금은 문학지사(文學之士)를 마음에 두어 기용하니

신진의 젊고 재주 있는 사람- 한음(漢陰 李德馨 1561~1613)ㆍ백사 같은 분들-이

모두 능히 ‘문장으로 몸을 바쳐(文章致身)’ 마침내 나라의 큰 쓰임이 되었다.

 

그 효력을 얻었다 할 것이다.”

 

문장이란 오늘날의 개념의 범주로는 문학에 해당하겠으나

내용이나 성격의 면에서는 차이점이 크다.

 

유가적 입장에서의 문장은 즉 경국대업(經國大業)ㆍ불후성사(不朽盛事)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도덕 및 공업(功業)과 더불어 ‘삼불후’로 중시되었다.

 

그런데

“문장은 도덕에서 나온다[文章出道德].”고 하여,

도덕과 문장의 사이에는 본말의 관계가 이미 전제되어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각기 변별성이 있었으니,

‘정주도학(程朱道學)’과 ‘한구문장(韓歐文章)’을 구별해서 생각한 것이다.

 

당시는 지식 기능이 분화된 사회가 아니었으므로 뚜렷하지는 못하지만

도학에 치력하는 자와 문장에 치력하는 자의 사이에 인간 유형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후자로 분류되는 바 특히 ‘문장치신’의 전형으로 손꼽힌다.

 

여기서 그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된 일과 아울러

이덕형과의 관계를 잠깐 언급해 두기로 한다.

 

연보 등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소년기에는 개구쟁이로 자유분방하게 놀았으며,

장성한 이후로도 사람됨이 활달ㆍ쾌활하여 익살을 좋아했다.

 

아무리 어려운 경우에 처해도 오히려 낙천적인 태도로 유머를 잃지 않는 성격의 인물이었다.

 

이런 특이한 면모가 그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데 작용했을 듯싶다.

 

그가 이덕형과 친교를 맺게 된 것은, 백사 연보에 23세 때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둘이 단짝으로 어울려 만들어 낸 세상에

전하는 일화들은 모두 사실 그대로라고 믿기는 어려운 것이다.

 

두 분은 문과에 동방(同榜)으로 급제, 평생을 나란히 활동했거니와

기본적으로 인간 유형에서 서로 합치되었다.

 

대개 이런 연유로 후세에 오성과 한음이 연계되어

허다한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꾸며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문장치신’이란 문장의 역량으로 국가에 공헌함을 뜻하였다.

 

당시 ‘국가에 공헌’하는 길이란 오직 관인으로 중앙 정부에서 활동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이재(吏才)’-행정 관리 능력-가 요망되기 마련이다.

 

사대부들에 있어서는 본디 ‘문장’과 ‘이재’의 역량을 두루 갖출 필요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어느덧 ‘이재’는 소홀히 되고 있었다.

 

‘이재’는 사대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항복은 ‘이재’에서 빼어난 역량을 발휘했던 것이다.

 

임진 왜란시 정승의 위치에 있었던 윤두수(尹斗壽)는 이항복을 가리켜

 

“문한사(文翰士)로서 전곡(錢穀 재정ㆍ군량 관계) 업무를 능숙하게 다룰 줄 생각지 못했다.

참으로 통재(通才)로다.”

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이항복과 이덕형, 그리고 이들의 앞세대로서 유성룡(柳成龍) 세 분이

문장과 ‘이재’를 겸비한 통재라는 평판은 대체로 공론이 되어 왔다.

 

이들은 ‘문장치신’의 인간 유형으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함에 있어 역량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분들의 경우 문장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이항복 또한 자기는 문장의 전문가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동행하는 월사(月沙李廷龜)ㆍ해월(海月黃汝一)은

다 문장을 잘하기로 한 시대에 알려진 사람들이다.

 

나는 비록 두 분에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소시부터 자못 시짓기를 일삼았었다.

 

해를 넘기며 사행(使行)길에 있을 적에 짓고 읊기를 자못 많이 했는데

항시 경구(警句)를 얻지 못해 마음에 부족함을 느꼈다.”

 

명 나라와의 외교상에서 발생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사절단을 이끌고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이 때 지은 시문으로 ‘조천록(朝天錄)’을 남기고 있다.

 

그가 정사였으며, 이정귀는 부사, 황여일은 서장관으로 동행한 것이다.

 

그 자신 문장의 전문가로서의 수완은 이정귀와 황여일에게 양보하고 있다.

 

문장의 일에 전적으로 치력하지 않고 견문소회를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경구(警句)를 얻기는 쉽지 않았을 터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의 문학은 수준이 미흡했다거나 독자적인 성격을 갖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신흠은 또 이 점을 지적하여

 “공은 문장에 있어 본디 힘써 하는 식은 아니지만 법을 취하는 것이 예스러워서

웅매 기준(雄邁奇俊)하여 스스로 일가를 개척했다.”고 하였다.

 

이정귀(李廷龜) 역시

“이 어른은 고문사(古文辭)를 하기 좋아하고 송유(宋儒)의 진부한 문체를 답습하지 않았다.”

고 언급한 것이다.

 

이항복은 조선 사대부의 특이한 전형이다.

 

그 자신 ‘문장치신’으로 정계에 참여, 활약하여 ‘통재’라는 인물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의 입신(立身)의 바탕인 문장은 도덕에 근거를 두었던 만큼

정신적 기초는 도학에 있었거니와, 목적하는 바는 국정에 이바지함에 있었다.

 

그와 동시대의 후배로서 문장 4대가로 일컬어지는

월ㆍ상ㆍ계ㆍ택(月象谿澤)과 공통 분모를 가지면서도 상당히 다른 타입이다.

 

삼불후의 기준을 적용해 보면 그는 문장이 아니고

공업(功業)으로 불후의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당초 ‘문장치신’을 하였던 만큼 문장의 분야에 이루어 놓은 바 상당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