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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항.고(考).권지(權知).弔와傷외4편

녹전 이이록 2010. 6. 15. 11:43

● 안항(雁行)이란 ?



과거 급제자 명단을 보다 보면 급제자 밑에 안항(雁行)이란 용어가 나온다. 

 

‘기러기가 가는 모습’이란 뜻이다.

 

가을 하늘을 보면 기러기가 나란히 줄지어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과거급제자와 나란히 가는 존재인 형제를 말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과거 급제자 밑에 안항이라고 표시된 것은 급제자의 형이거나 동생을 뜻하는 것이다.

 

*行 - 보통 ‘행’으로 읽으나 行列. 雁行 같은 낱말은 ‘행(行)’이 아닌 항(行)으로 읽어 항렬(行列)과 안항(雁行)으로 읽는다.


 

● 아버지를 ‘고(考)’라고  하는 까닭 


한국어로 '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할까?' 하는 물음과 같다.

 

같은 의미로 ‘考’는 한문 글자이니 모를 수도 있다.

 

‘考’의 우리말 뜻은 '오래 살 고' . '죽은 아비 고' . '상고할 고' . '이룰 고' . '칠 고' 등 뜻이 여러 가지이다.

 

그 중  ‘죽은 아비 고(考)’의 뜻이 있으니 돌아가신 아버지를 말하기 때문에 ‘考’라는 글자를 쓰는 것이다.


 

● “권지(權知)”에 대하여 


고려와 조선 시대의 임시관직이다.

 

관직을 어떤 기간 동안 임시로 맡을 때 그 관직 이름 앞에 이 권지(權知)를 붙였다.

 

권지(權知)란 오늘날로 치자면 인턴 내지 수습직원, 시보(試補)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는 과거 급제자를 각 관청에 보낼 때 일단 권지로 임용하여, 일정 기간 임시로 직무를 맡겼다가 뒤에 실직(實職)을 주었다.

 

또 이미 관직을 가진 자가 다른 직책을 임시로 맡길 때도 이것을 붙여 권지목사(權知牧使) · 권지이부상서(權知吏部尙書)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과거 합격자를 권지로 임명하고 각 관청에 보내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실직을 주었다.

 

특히 갑과 합격자 이외의 과거 합격자는 성균관(成均館)· 승문원(承文院)· 교서관(校書館)· 훈련원· 별시위 등 이른바 권지청(權知廳)에 분관(分館)되어, 권지성균관 학유(學諭)· 권지승문원 부정자(副正字) 등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사람은 훈련원· 별시위에 보냈으며 이들 중 훈련원에 권지로 추천하는 것을 권지천(權知薦)이라 하였다.


 

● 조(弔)와 상(傷)의 구별


[지생자(知生者)면 조(弔)하고 지사자(知死者)면 상(傷)이니

지생이불지사(知生而不知死)는 조이불상(弔而不傷)하고

지사이불지생(知死而不知生)은 상이불조(傷而不弔)이라.]

 

- 산 사람을 알면 조(弔)를 하고 죽은 사람을 알면 상(傷)을 한다.

 

만일 산 사람만 알고 죽은 사람을 모를 경우에는 조(弔)만 하고 상(傷)은 하지 않으며, 죽은 사람만 알고 산 사람을 모를 경우에는 상(傷)만 하고 조(弔)는 하지 않는다.

 

즉 조(弔)는 상주를 위로하는 것이고, 상(傷)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애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죽은 사람만 알 경우에는 영위에 곡하고 재배만 할 뿐 상주에게 위문하지는 않으며(傷)

산 사람만 알 경우에는 상주에게 위로만 할 뿐 영위에 곡을 하거나 재배하지 않는다(弔)는 뜻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있는 글이다.

 

 

● 世와 代는 같은 뜻(同義)이다.


대부분의 성씨는 족보에 世를 쓰고 있는데 문화류씨(文化柳氏). 진성이씨(眞城李氏). 광주이씨(廣州李氏). 영일정씨(迎日鄭氏). 함안조씨(咸安趙氏) 등은 족보에 世를 쓰지 않고 代를 썼으며(시조1代) 일부는 지금도 代를 쓰고 있다.

 

이황(李滉)은 진성이씨 처음 족보에 ‘7代황’이었으나 이후 ‘7世황’으로, 정몽주(鄭夢周)는 영일정씨 족보에 ‘11代 몽주’이었으나 이후 ‘11世 몽주’로 되어있다.

 

이는 '世와 代는 같다'는 뜻이다.

 

선조들은 世와 代는 같다'고 했다.

 

김종직. 이퇴계. 송시열. 허목. 기대성. 조식 등 거유들이 지은 비문. 시장 등을 각 가문의 족보에 대조 검증한 결과 '世와 代는 같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밝혀졌다.

 

이황(李滉)은 진보이씨 이해(李瀣)의 묘갈명(眞寶李氏李瀣墓碣銘)을 찬술하였는데 '해(瀣)의 6세조 석(碩) - (瀣六世祖碩)' 이라 하였다.

 

진성 이씨 계대(系代)를 보면

 

시조 1世 석(碩. 해의 6세조)→ 2世 자수(子脩. 5세조)→ 3世 운후(云候. 4세조)→ 4世 정(禎. 3세조)→ 5世 계양(繼陽. 2세조)→ 6世 식(埴. 해의 1세조)→ 7世 해(瀣. *자신은 헤아리지 않음)이다.

(6세조와 6대조는 같다)

 

후손이 조상을 헤아려 ‘몇 대조’라 한다.

 

이황은 ‘몇 세조(6세조)’라 하였고 ‘몇 세조’를 헤아릴 때는 자신(이해)을 빼고 헤아린다.


 

● 외명부(外命婦) 

 

조선시대에 왕족 및 문무관(文武官)의 처에게, 남편의 품계에 따라 내리던 봉작(封爵)이다. 

 

왕실· 종친의 여자로는 공주(公主:임금의 嫡女)와 옹주(翁主:임금의 庶女)는 품계를 초월한 무계(無階)로서 외명부의 최상위에 두었고, 대군(大君)의 처와 왕비의 어머니를 정1품 부부인(府夫人), 왕자군(王子君)의 처에게는 종1품의 군부인(郡夫人)에 봉하였다.

 

또한 왕세자의 적녀는 정2품의 군주(郡主), 서녀에게는 정3품의 현주(縣主)에 봉하는 등 적 · 서의 차이를 두었다.

 

정· 종1품 문무관의 처에게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라는 명호(名號)와 함께 벼슬아치의 부인으로서는 최상의 영예를 누리게 하였으며 2품 이상의 외명부에게는 본관(本貫)의 읍호(邑號)를 붙이도록 허락하여 예를 들면 ‘신안주씨부부인(新安朱氏府夫人)’ 등으로 부르게 하였다.


[외명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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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계........왕의 유모...................왕비 어머니............왕의 딸..............세자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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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1품....부부인(府夫人).............공주(公主,적녀)................................옹주(翁主,서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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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1품....봉보부인(奉保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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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2품............................................................................................군주(君主, 적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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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3품.............................................................................................현주(縣主, 서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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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계.................종친의 처(妻)..........문무관의 처(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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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1품...............부부인(府夫人)

.......................군부인(君夫人)........정경부인(貞敬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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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1품...............군부인(君夫人)........정경부인(貞敬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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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2품...............현부인(縣夫人)........정부인(貞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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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2품...............현부인(縣夫人)........정부인(貞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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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3품(당상관)...신부인(愼夫人)........숙부인(淑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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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3품(당하관)...신인(愼人)...............숙인(淑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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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3품................신인(愼人)...............숙인(淑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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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4품...............,혜인(惠人)..............영인(令人)

종4품...............,혜인(惠人)..............영인(令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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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5품................온인(溫人)..............공인(恭人)

종5품................온인(溫人)..............공인(恭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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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6품................순인(順人)..............의인(宜人)

종6품.............................................의인(宜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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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7품. 종7품...................................안인(安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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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8품. 종8품...................................단인(端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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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9품. 종9품....................................유인(孺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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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孺人)

 

① 조선 때 정9품· 종9품인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

 

② 생전에 벼슬하지 못한 사람의 아내의 신주나 명정에 쓰던 존칭.


 

● 보첩의 의의 


(1) 가문의 정치사요, 생활사이다.

 

(2) 혈통의 실증과 혈족여부를 가늠하는 문헌.

 

(3) 소목(昭穆)의 서열 및 촌수의 분간(分揀).

 

(4) 존조경종(尊祖敬宗) 정신의 앙양.

 

(5) 혈족간 화목단결의 강화


 

● 족보가 없는 경우 


불에 타 버렸다.(난리나 집에 화재가 나서)

 

팔아 버렸다.(개화기 양반의 신분을 사고팔면서)

 

북에 두고 월남했다.

 

큰집에서 가지고 만주로 떠났다.

 

홍수 등 천재지변으로 분실하였다.

 

원래부터 없었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기타 등등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실에는 일제 때 조선총독부에 납본했던 전국 각지에서 온 족보 13,000여권이 소장 되어 있다.

 

족보란 신성한 문건으로서 또한 족보란 모시는 것인 만큼 "책 가지러 간다."가 아니고 "족보를 모시러 간다."고 까지 하는 족보가 자세히 보면

뜻밖에도 사실과 다르거나 의도적으로 조작된 내용이 허다한 것이 또한 이 족보 책이다.

 

조상들이 역임한 적이 없는 관직을 적어 놓거나 문과나 생원, 진사시를 비롯한 각종과거 시험에 급제하였다고 거짓으로 기록한 부분도 적지 않다.

 

진실로 족보의 가치를 높이려면 사실 하나하나가 전거(典據)에서 나와야 한다.

 

족보에 기재 사항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문과방목" .  "생원진사방목" .  "무과방목"등과 조선왕조실록 등으로 내용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의 대다수는 족보에 입록(入錄)되지 못하였으나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족보를 모시고 있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현재 전하는 16-7세기 호적단자를 검토해보면 당시 성씨를 사용하지 못한 노비들이 3-40%나 되었고, 그 보다 상위계층인 평민들, 양민은 인구의 40-50%를 차지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제는 폐지되었으며, 노비의 폐지는 곧 신분의 폐지였다.

 

그러나 1894년 이전에는 족보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평민들은 신분 상승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시골 호족은 서울의 양반과 혼인하려고 애썼고, 서울 양반은 권세가와 인척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일명 빠꿈교지라는 게 돌아 다녔는데 이는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 구입하여 이름을 적어 넣도록 된 것이다.

 

요즘 백지 수표처럼 백지 교지가 성행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각 성씨마다 시보(始譜)를 살펴보면 고려 말(1300년대 말)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나 조선개국(1392년)이후 1400-1700년 사이에 각 성씨의 시보(始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