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휘(避諱)
"휘(諱)"란 포괄적으로 죽은 사람의 생전 이름을 높여서 이름 앞에 붙이거나 부를 때 이름. 성함이라는 말 대신에 쓰는 글자이다.
돌아간 제왕(帝王) · 성인(聖人) · 상급자 및 존경받는 사람의 이름자 앞에 존경의 뜻으로 붙이는 말이다.
‘피휘(避諱)’란 일반 백성들이 평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서 이러한 훌륭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자(字)와 같은 글자를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 이 사람들의 이름이나 字를 피하거나 혹은 고쳐 써야 하는 것을 ‘피휘(避諱)’라고 한다.
피휘(避諱)는 주대(周代-주나라 시대)에 생겨났으나 아직 완비된 제도가 아니었다.
진한(秦漢-진나라와 한나라) 이래 유학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면서 점차로 완비되었으며 날로 엄격해져 당송(唐宋-당나라와 송나라)시대부터 엄하게 적용하였다.
●피휘(避諱)의 종류.
1)국휘(國諱)
공휘(公諱)라고도 하며 백성이나 심지어 황제 역시 반드시 이를 지켜야만 했다.
주로 황제 본인 및 그 아버지와 조부(祖父)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나아가 황제의 자(字), 황후와 그 부조(父祖-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 전대(前代-앞 선 임금 대)의 연호.시호, 황제의 능명(陵名)을 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황제는 7대 위, 왕은 5대 위의 지배자까지 그 이름을 피했다.
2)가휘(家諱)
사휘(私諱)라고도 하며 친족 내부에 제한되는 것으로서 집안 조상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자식은 아비의 이름이 들어간 글자를 사용할 수 없는데,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간 글자를 쓰는 관직도 맡을 수가 없었다.
3)성인휘(聖人諱)는 성인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공자 또는 맹자의 이름 역시 피휘의 대상이 되었다.
후에는 중국민족의 시조라 불리는 황제(黃帝)와 주공(周公), 노자(老子)의 이름 역시 사용 금지되기도 했다.
● ‘피휘’하는 방법에 따라 구분.
첫째 전통적인 예절제도나 규정, 혹은 선조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것들과 관련된 글자를 피해 쓰는 경휘(憼諱).
둘째 미신적인 심리로 특정 글자를 쓰지 않는 기휘(忌諱)
셋째 어떤 사물이나 사건, 혹은 사람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으로 그것과 관련된 글자를 쓰지 않는 증휘(憎諱)가 있다.
●피휘(避諱)의 규칙.
첫째, 음이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글자는 피하지 않는다(不避嫌名).
둘째, 피해야 할 글자가 두 글자인 경우 한 글자만 피하면 된다(二名不偏諱).
셋째, 황제의 7대조 이상은 피할 필요가 없다.(已 不諱).
○‘피휘’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도 나누기도 한다.
대체로 闕字(궐자)와 厥劃(궐획), 改字(개자)의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궐자(闕字)는 해당되는 글자를 아예 쓰지 않고 공란, 즉 정사각형으로 처리하는 방법이다.
△궐획(厥劃)은 글자의 일부 획을 생략하는 방법으로 지난 회에 언급했던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경우 민(民)자를 씨(氏)자로 대치했다.
△개자(改字)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같은 뜻의 다른 글자로 바꾸는 것이다.
● 기타 방법으로 피휘.
△개자법(改字法)
피해야 할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꿔 쓰는 것으로 공자의 이름인 구(丘)를 피하기 위해 구(邱)로 쓰는 것이 그 예이다.
△공자성자법(空字省字法)
아예 그 글자를 비워두고 쓰지 않는 것이다.
△결필법(缺筆法)
그 글자를 쓸 때 한 획을 덜 쓰거나 더 쓰는 방법이다.
△가주법(加注法)
그 글자 대신 ‘무엇 때문에 이 글자를 쓰지 않음’이라는 주석을 덧대는 방식이다.
△'피휘공자법(避諱空字法)'
이름을 아예 쓰지 않고 모(某)로 기록하거나 비워두는 방식, 이 경우에는 주를 붙여 글자를 쓰지 않은 이유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피휘결필법(避諱缺筆法)' 또는 결획법(缺劃法)
피휘 할 글자를 쓰되 읽는 사람이 읽지 말라는 표식으로 글자의 획 중 한 획을 긋지 않는 방법으로, 이 방법은 문자 생활에 대단한 번거로움을 주었기 때문에 왕명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글자로 쓰는 관례가 나타났다.
* 외교문서를 주고받을 때 서로 상대방의 국휘(國諱)를 존중하는 것은 중요한 예절 중의 하나였다.
국휘(國諱)가 갖고 있는 보편성 때문에 제왕(帝王)의 이름 중에 일단 상용글자가 들어 있을 경우 정치와 일상생활에 매우 큰 불편을 초래했다.
●국휘(國諱). 성휘(聖諱). 가휘(家諱)의 예
1)국휘(國諱)는 황제나 왕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진시황 정(政)은 자신의 이름인 政자를 쓰지 못하게 해서 모두 正(정)으로 바꾸게 했다.
▲漢나라에서는 漢 高祖 유방(劉邦)의 이름인 ‘邦’자를 피하여 논어에 나오는 '방'자를 국(國)자로 바꾸었다.
2)성휘(聖諱)는 聖賢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다.
청나라 옹정제가 교지를 내려서 사서오경 외의 책에 나오는 구자를 모두 구(邱)로 바꾸게 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대구도 大丘에서 大邱로 바뀌었다.
3)가휘(家諱)는 집안 어른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은 아버지 이름이 ‘談’이므로 그가 편찬한『史記』에서 담자를 同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휘법(諱法)은 주나라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송시대에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경우 세는 대(代)로(뜻이 비슷한 개자), 민은 씨(氏)로(획을 생략한 결획) 바꾸었다.
●기휘((忌諱). 증휘(憎諱).경휘(憼諱)의 예
1)기휘((忌諱)의 예
▲오(吳)지역의 사람들은 '離散(이산)'이란 말을 싫어하며, 이 글자들과 발음이 비슷한 글자들도 쓰기를 꺼렸다.
그래서 그들은 배(과일)를 나타내는 글자인 '梨(리)'가 離散의 '離'와 발음이 같다고 하여 배를 나타낼 때는 '梨'라 쓰지 않고 배가 둥그런 과일이므로, '圓果(원과)'라 표기했으며
▲비올 때 비를 막아주는 '傘(산)'도 '離散'의 '散'과 발음이 같아, 우산의 의미인 '竪笠(수립)'으로 바꾸어 썼다.
2)증휘(憎諱)의 예.
▲당나라 숙종(肅宗)은 안록산(安祿山)을 미워하여, 중국의 지명중에 '安'자가 들어가는 글자들을 모두 다른 글자로 바꾸도록 한 적이 있다고 한다.
3)경휘(憼諱)의 예
▲그런데 가장 일반적이고도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은 존경의 뜻으로 하는 경휘이다.
경휘의 범위는 이름으로 사용된 글자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도 자(字)'나 성(姓)으로 쓰인 글자를 피휘 한 것도 적지 않으며, 심지어는 능명(陵名)이나 시호(諡號), 혹은 연호에 사용된 글자까지 피휘 하기도 한다.
● 피휘의 방법.
이중 대표적인 것을 몇 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첫째, 본래 글자를 '모(某)'라는 자로 바꾸어 쓰는 방식이다.
▲『상서(尙書)』.「금등(金藤)」에 '元孫某'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元孫'은 무왕(武王)을 가리키는 말이다.
'元孫' 다음 자에는 당연히 무왕의 이름인 '發(발)'이 나와야 하나, 신하가 왕의 이름을 쓸 수가 없어 이를 '某(모)'로 바꾸어 쓴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주나라부터 한나라 때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다가 『삼국지』「제기(帝記)」에 이르러 '휘(諱)'라는 글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둘째, 글자를 아예 쓰지 않고 그 자리를 빈칸으로 비워두는 방식이다.
▲당나라 말기에 주온(朱溫)이 정권을 장악한 후 자기 아버지인 주성(朱誠)의 이름을 피휘 하기 위해 모든 지명 중 아버지 이름인 '誠'과 발음이 같은 '城'이 들어가는 글자를 없애버렸다.
그 결과 고성(考城)이나 양성(襄城)같은 지명은 모두 '城'자가 빠진 채 '考'나 '襄'이라는 한 글자 이름이 되었다.
▲또『수서(隋書)』에서는 "한(韓)이 호랑이를 잡았다"라는 문장을 기록하기 위해 '韓擒虎(한금호)'라고 써야 하는데, 당나라 태조인 경황제(景皇帝)의 이름이 이호(李虎)였기 때문에 '虎'자를 빼버리고 그냥 '韓擒'이라고만 적어놓아 의미가 애매하게 되어버리기도 했다.
3)셋째, 피휘하는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꾸어 쓰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글자로 바꾸어 쓸 때는 자기 마음대로 아무 글자나 선택하여 바꾸어 쓴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원칙을 지키려 했다.
즉 피휘하는 글자와 의미가 비슷한 것으로 쓴 것이 가장 많았으나, 나중에는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글자로 바꾸어 쓰기도 했고, 심지어는 글자들이 비슷한 한자로 바꾸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수*당 이전에 많이 통용되었다고 한다.
▲예컨대 한나라 사람들은 한고조(漢高祖)의 이름이 유방(劉邦)이었기 때문에 '邦'자를 써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이 글자와 뜻이 같은 '國'자로 바꾸어 썼다.
▲또『회남자(淮南子)』를 지은 유안(劉安)은 자기의 아버지 이름이 '장(長)'이었기 때문에 '長'자를 써야 할 때가 되면 역시 '길다'는 뜻을 가진 '修'로 바꾸어 썼다.
발음이 비슷한 글자로 대체하는 경우로,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지으면서 자기의 아버지 이름이 '담(談)'이었기 때문에 '장맹담(張孟談)'을 표기할 때 '談'과 발음이 비슷한 '同'으로 바꾸어 '장맹동(張孟同)'이라고 썼다고 한다.
▲또 남조(南朝) 때의 송나라 사람 범엽(范曄)은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태(太)'였기 때문에 『후한서(後漢書)』의 '곽태(郭太)'를 '郭泰'로 바꾸어 썼다.
▲형체가 비슷한 글자로 바꾸어 쓴 예로는,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이 아버지 이름이 '병(昺)'인데, 昺자를 피휘하는 것은 물론 발음이 같은 '秉'이라는 글자도 피휘했다.
▲그래서『북사(北史)』에서 '최병(崔秉)'의 이름을 쓸 때, 秉과 글자 모양이 비슷한 '康(강)'으로 바꾸어 썼다고 한다.
4)넷째, ‘피휘’하는 글자의 필획 중에는 한 두 획을 생략하여 쓰는 방식이다.
이 방법은 당나라 초기부터 시작하여 청나라 말기까지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공자의 이름인 구(丘)를 쓸 때는 필획을 하나 생략하여 쓴다.
자기 조상의 이름을 써야 하는 경우, 자기가 직접 쓰지 않고 빈칸으로 남겨두었다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글자를 써넣도록 하고 있다.
▲명나라 때 소경방(邵經邦)은『일감정기(一鑒亭記)』를 지으면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감(鑒)'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자기가 직접 쓰지 않고, 이경(李坰)이란 사람에게 부탁하여 쓰게 하고는 "이경(李坰)이 휘(諱)를 써넣었다"라는 주석을 달아놓았다고 한다.
이밖에도 글자는 그대로 적어놓고 읽을 때는 '모(某)'라고 읽는다든가, 글자를 직접 쓰지 않고 그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를 설명하는 내용을 덧붙이는 방식, 그 글자의 뜻과 관련있는 낱말로 바꾸어 쓰는 방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어쨌든 이런 피휘자들을 모르고 옛글을 읽는다면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하거나, 아예 해석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문 문장을 읽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점을 경계해야만 한다.
● 중국과 우리나라의 피휘 예
1)중국의 피휘
▲진시황이 황(皇)자와 고(辜)자의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고(辜)를 죄(罪)로 바꾸었다.
진시황의 이름 정(政)자를 피하려고 정월(正月)을 단월(端月)이라 고쳐 불렀다.
▲한나라 경제의 이름이 유계(劉啓)였기 때문에 계(啓)자를 쓰지 않기 위해 이십사절기 가운데 계칩(啓蟄)을 경칩(驚蟄)으로 바꾸었다.
▲한나라 명제의 이름이 유장(劉莊)이었기 때문에 장(莊)을 뜻이 같은 엄(嚴)으로 고쳤다.
▲삼국시대 위나라에서는 황제의 이름이 조황(曹璜)에서 조환(曹奐)으로 바뀌었다.
‘황’(璜)이라는 글자가 많은 사람들이 쓰는 글자라,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변경한 것이다.
▲당나라 고조의 부친이 이병(李昞)이었다.
그 이름을 피하려고 육십간지에서 병(丙)을 모두 경(京)으로 바꿔야 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성씨 이(李)와 소리가 같은 이(鯉)가 뜻하는 잉어”를 먹지 못하게 되었고, 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잉어를 이(鯉) 대신에 적선공(赤鮮公)이라고 고쳐 썼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자 세(世)를 피하려고 대(代)자로 바꿔 썼다.
예를 들면 절세가인(絶世佳人)을 절대가인(絶代佳人)으로 바꾸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자 세(世)를 피하려다 보니, 역사서 수서(隋書)를 편찬할 때 왕세충(王世充)을 왕□충(王□充)이라고 세(世)자를 공백으로 남겨 놓았고, 이 탓에 전한의 왕충(王充)과 혼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한 이세적(李世勣)도 이적(李勣)이라고 바꾸어 기록했다.
▲송나라 휘종은 [용(龍), 천(天), 군(君), 옥(玉), 제(帝), 상(上), 성(聖), 황(皇)]의 여덟 자로 이름이나 자호를 짓지 못하게 하고, 이미 지은 이름과 자호도 고치게 (개명) 하였다.
이 글자들은 황제나 왕을 상징하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금나라 때에는 ‘주공과 공자의 이름’을 피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청나라 때에는 강희제의 이름인 현엽(玄燁6)을 피해 북경 자금성의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을 신무문(神武門)으로 바꾸었다.
▲1777년 청나라에서는 학자 왕석후(王錫侯)가 건륭제의 이름을 책에 써서 본인을 포함해 수십 명의 관련된 사람이 처형당한 경우가 있다.
2)우리나라의 피휘
▲신라 시대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와 숭복사비문(崇福寺碑文)에서 육십갑자의 병진(丙辰)과 병오(丙午)를 각각 경진(景辰)과 경오(景午)라고 썼다.
이것은 당나라 고조(高祖)의 아버지 휘 ‘병(昞)’의 음을 피하기 위해 ‘경(景)’을 썼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의 역사서인《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구당서》, 《신당서》등의 중국 문헌에서 당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성을 천(泉)으로 고쳐 쓴 것을 알지 못하고 그대로《천개소문》이라 표기하였다.
▲고려 시대 봉암사(鳳巖寺) 정진대사탑비문(靜眞大師塔碑文)에서 '문무양반(文武兩班)'을 '문호양반(文虎兩班)'이라고 썼다.
이것은 고려 혜종의 휘 "무"(武)를 피하기 위해 "호"(虎)를 썼기 때문이다.
중국 황제가 아닌 한국 왕의 휘를 피한 기록은 이것이 처음이다.
▲고려 시대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중국의 요(堯)임금의 휘를 피하여 고려 정종의 이름 왕요(王堯)를 고(高)라고 표기하였다.
▲조선 시대 대구군의 한자 이름은 원래 ‘大丘’였으나 공자의 휘 ‘구(丘)’를 피하기 위해 ‘大邱’로 바뀌었다.
1750년 대구의 유생(儒生) 이양채(李亮采)가 공자의 휘가 ‘구(丘)’이므로 ‘大丘’를 ‘大邱’로 바꾸어달라고 상소했으나 영조의 윤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정조 때부터 점차적으로 ‘大邱’라는 지명을 쓰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청나라 고종(高宗)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홍례문(弘禮門)의 이름을 흥례문(興禮門)이라고 바꿨다.
▲조선 시대 유교 경전이나 서적을 펴낼 때 ‘丘’자를 붉은 종이로 덮어두거나, 붉은 네모 테두리로 둘렀다.
조선 시대에 공자의 이름 ‘孔丘’(공구)를 피하기 위함이고 말하거나 읽을 때는 ‘공모’(孔某)라고 하기도 했다.
3)특수한 경우
▲남송의 진회 때문에 중국 사람은 이름에 회(繪)자를 쓰지 않는다.
충신 악비를 죽이고 회하 이북을 금나라와 화의하여 양도했기 때문에 사후에 간신 ·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원래(原來)라는 말은 원래(元來)였으나, 그 말의 다른 뜻(元이 온다) 때문에, 한자문화권의 국가에서는 元나라가 물러난 뒤에 원래(原來)로 바꾸었다.
오늘날은 둘 다 쓰인다.
▲명나라 초기에 많은 관리가 원년(元年) 대신 원년(原年)으로 고쳐 썼다.
▲시계판에 종종 IIII(4)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IV(4)가 로마의 주신인 유피테르 (IVITER)의 처음 두 자(IV)와 겹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이것이 유일한 ‘피휘’이다.
●휘 때문에 관명(官名) · 지명(地名) · 물명(物名) 등이 개폐(改廢)된 일은 허다하다.
특히 조선시대에 오면 엄격히 시행돼 백성들의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조선시대의 왕은 되도록 이름을 僻字(벽자-잘 사용되지 않는 한자)로 사용해 백성을 배려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왕의 이름은 쉽게 읽을 수조차 없는 어려운 글자가 많다.
避諱(피휘)를 범하면 불경죄로 엄한 처벌이 따랐다.
●기타 예
▲진시황 정의 아버지의 이름은 자초(子楚)다.
여불위의 권유로 초(楚)나라 출신인 화양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그가 진나라 왕으로 즉위하자 문제가 생겼다.
이후 진나라에서는 초(楚)자가 공문서에서 사라졌다.
초나라를 형(荊)나라로 바꿔서 표기했다.
초나라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상산 조자룡. 삼국지에 나오는 조운을 일컫는 별명이다.
상산 출신의 조자룡이라는 말인데 상산(常山)은 원래 항산(恒山)이었다.
그런데 한나라 황제 가운데 유항(劉恒)이란 이가 있어서 그 이후에 상산으로 바뀌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이름 외에도 다른 많은 글자를 제한했다.
그가 젊을 때 잠시 중이 된 일이 있었는데 주원장은 이것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자를 쓰거나 '승(僧)'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자를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는데 이것을 '문자의 옥'이라고 한다.
▲김처선(金處善)은 환관으로 연산군의 실정을 비판하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김처선을 죽인 연산군은 처(處)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연산군이 쫓겨날 때까지 이 명령은 지켜졌다.
▲唐太宗 이 세민 때에 이름자 世를 代로 바꾸었다.
▲蘇東坡(소동파)가 조부의 이름 蘇序(소서)를 피해 평생 서문(序文)을 인문(引文), 또는 서문(敍文)이라고 썼다.
▲淸의 乾隆(건륭) 때 王錫侯(왕석후)는 字貫(자관)이란 책을 썼다가 斬刑(참형)을 당했다.
凡例(범례)중에서
乾隆(건륭)의 조부와 부친인 康熙(강희), 雍正(옹정)의 이름자를 사용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신라 태종무열왕의 아들 문무왕(文武王)을 문호왕(文虎王)으로 바꾸었는데 武列王의 ‘武’자를 피하여 문호왕(文虎王)으로 한 것이다.
▲고려 2대 혜종의 이름이 왕무(王武)였으므로 武를 피하여 의미가 통하는 호(虎)로 대신했다.
▲관계(官界)에서는 일종의 헌휘(憲諱)라는 것이 통용되었는데 이것은 하급자가 상급자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金代에는 周公이나 孔子의 이름을 피하도록 규정하였다.
▲청나라 雍正帝 때도 공자와 맹자의 이름을 피하도록 하였다.
姓이나 이름 및 지명에 "丘"자가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 "邱"로 바꾸도록 하였다.
●피휘 방법에 따른 예
△첫째가 개자법(改字法)이다.
▲진수(陳壽)는 삼국지(三國志)에서 병주자사(幷州刺史) 장의(張懿)를 장일(張壹)로 고쳤다.
▲요(遼) 통치하의 여진(女眞)은 요흥종(遼興宗)의 이름(야율진종. 耶律眞宗)을 피해 여직(女直)으로 바뀌었다.
▲당조(唐朝)는 이호(李虎)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호(虎)"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모두 "무(武)" 혹은 "맹수(猛獸)"로 바꾸었다.
△둘째는 공자법(空字法)이다.
이는 피해야 할 글자가 들어갈 부분을 공백으로 남겨 놓는 방법인데, 혹은 "모(某)"자를 써넣기도 하고, 혹은 바로 "휘(諱)"라고 쓰기도 하였다.
▲수서(隋書)를 찬할 때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왕세충(王世充)"을 "王□充"으로 고쳤다.
△셋째는 결필법(缺筆法)이다.
소위 결필(缺筆)이란 피해야 할 글자의 마지막 한 획을 쓰지 않는 것이다.
이 방법은 당초에 나타나 송대에 크게 유행했다.
△넷째는 개독법(改讀法)이다.
▲예를 들어 홍루몽(紅樓夢)에서 임대옥(林黛玉)은 책을 읽다가 모친의 이름인 "민(敏)"자가 나오면 이를 "밀(密)"로 고쳐 읽었다.
▲진시황 정의 아버지의 이름은 자초(子楚)다.
자초는 여불위의 권유로 초나라 출신인 화양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바꾼 이름이다.
그런데 자초가 진나라 왕으로 즉위하자 문제가 생겼다.
이후 진나라에서는 초(楚)자가 공문서에서 사라졌다.
초나라를 형(荊)나라로 바꿔서 표기했다.
초나라 입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다.
●우리나라에서의 피휘 시작과 사례
우리나라는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삼한에도 피휘의 풍습을 따르게 되었고 신라시대부터 피휘를 했던 기록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나 숭복사(崇福寺)의 비문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문무왕릉비의 건립연도를 <경진건비(景辰建碑)>라 하였으니 이때 경진(景辰)의 경은 당(唐)나라 고조(高祖)의 아버지 이름 병(昞)의 음을 피휘한 것이라 한다.
병진(丙辰)을 당고조(唐高祖)의 아버지 이름 병(昞)의 음을 피휘하여 경진(景辰)이라 하였다.
▲신라 시대만 아니라 그 후 고려시대 역시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단군(檀君)의 개국연대를 여요동시(與堯同時- 중국 요 임금 때와 같은 시기)를 여고동시(與高同時)라 하였으니 고(高)는 고려 정종의 휘인 요(堯)를 피휘한 것이며 봉암사(鳳巖寺) 정진대사탑비문(靜眞大師塔碑文)에서 무반(武班)을 호반(虎班)이라 칭한 것도 고려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피휘한 것이다.
▲조선시대 유관(柳觀)의 아들이 관찰사로 부임하려 했으나 관찰사의 관(觀)이 아버지 이름과 같아 부임할 수 없다고 하자 이름을 관(寬)으로 바꾼 것도 피휘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청나라 시대 건륭(乾隆) 42년(1777)에 왕석후(王錫侯)라는 학자가 책을 쓰면서 건륭(乾隆) 황제의 이름을 범했다 하여 본인은 물론 관계된 인물 수십 명이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피휘(避諱)의 방법 중 대표적인 것에 같은 뜻의 다른 글자로 바꾸는 것이 있다.
일례로 一은 單(단), 旺(왕)은 昌(창), 元은 首(수) 등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기(禮記)에 보면 부모와 자식 간을 一世라 하여 30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조상을 언급할 때 ‘世’라고 했다.
그러나 당태종의 이름이 이세민(李世民)이었으므로 당나라 280여 년간은 世와 民 두 자는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世와 같은 뜻인 代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이 두 글자를 피휘(避諱)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이 두 자가 함께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世代’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당(唐)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해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고 적은 것이 좋은 예이다.
▲1776년 5월 22일 정조실록에 의하면 “호조의 산학 산원(算學算員)을 주학 계사(籌學計士)로 고치다”라고 되어 있다.
정조의 이름이 산(示+示)으로 산학산원(算學算員)의 ‘算‘자 음이 산(示+示)과 같기 때문이다.
▲사용 빈도가 높은 글자를 임금의 이름으로 삼을 경우 생활에 불편이 뒤따르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에 조선의 왕들은 정조의 경우처럼 거의 쓰임이 없는 글자를 선택하여 외자로 이름을 지었다.
그 중 예외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종 이방과, 태종 이방원, 단종 이홍위, 철종 이원범, 고종 이재황 등이다.
이성계(후에 ‘단’으로 개명)와 이방과(후에 ‘경’으로 개명), 이방원은 고려 시대의 신하로서 모두 왕이 되기 전에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외자일 이유가 없었다.
또 이원범(철종. 후에 ‘변’으로 개명)과 이재황(고종. 후에 ‘형’으로 개명)도 왕과 세자의 위치에서 먼 자리에 있다가 갑작스레 등극한 경우였다.
그렇게 볼 때 원손으로 태어나 일찍이 세자로 책봉된 단종 이홍위는 매우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그럼 왜 단종은 조선 시대의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두 자 이름을 지니게 되었을까.
그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일설에 의하면 단종의 사주팔자가 명이 매우 짧은 것으로 나타나 그것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두 글자로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441년 7월 28일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세종이 원손(元孫)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자의 이름을 개명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즉, 단종의 이름을 짓기도 전에 미리 원손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에 대해서도 피휘 하도록 명을 내린 것이다.
●기타 사례 모음
▲진시황의 이름은 정(政)이다.
원래 1년의 시작은 政月인데,
이는 새해의 첫 달에 군주와 신하들이모여 한 해의 대사를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그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政과 발음은 같지만 성조가 다른 正을 쓴 正月이 되었다.
▲후한의 광무제의 이름은 유수(劉秀)라서 수재(秀才)를 무재(茂才)라고 썼다.
▲이성경(李姓敬)은 후진을 세운 석경당(石敬瑭)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경(敬)을 문(文)으로 고쳤다.
얼마 후에 후진이 망하고 후한이 들어서자 다시 경(敬)으로 고쳤다.
후한이 망하고 송(宋)이 건국하자 송 태조 조광윤의 할아버지의 이름이 조경(趙敬)이었기 때문에 다시 문(文)이 되었다.
▲송 태종의 이름은 조광의(趙光義)인데, 원래의 이름은 광의(匡義)였다.
그의 형인 조광윤(趙匡允)이 황제가 되자 그의 형제들은 모두 이름을 광(光)으로 고쳤기 때문에 조광의(趙光義)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김홍집(金弘集)은 청나라 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의 이름 “홍력(弘曆)”의 “弘”을 피해 이름을 김굉집(金宏集)으로 고쳤다.
▲공자의 이름은 공구(孔丘)이다.
송 대중상부 7년 (1014) 공자의 이름을 피해 구성(丘姓)을 구(邱)로 고쳐 쓰게 했으며 읽을 때는 칠(七)자로 읽게 했다.
丘성과 邱가 존재하는 것은 원래 같은 성이었는데 후에 일부가 구(丘)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당대의 시인 이하(李賀)의 아버지의 이름은 진(晉)으로 진(進)자와 발음이 같다.
때문에 그는 평생 진사(進士)가 되지 못하고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했다.
▲사마천의 아버지 이름은 사마담(司馬談)이다.
때문에 「사기」에서 그는 아버지의 이름과 같은 사람이 나오면 모두 다른 글자로 고쳤으며 장맹담(張孟談)은 장맹동(張孟同)으로, 조감(趙談)은 조동(趙同)으로 바꾼 것이 그 예이다.
▲후에 「후한서」를 지은 범엽(範曄)의 아버지 이름이 범태(範泰)라서 후한서에 나오는 곽태(郭太)와 정태(鄭太)는 본래 이름이 곽태(郭泰)와 정태(鄭秦)인데 범엽(範曄)이 피휘를 위해 고쳐 쓴 것이다.
▲당대의 시인 두보는 아버지의 이름이 두한(杜閑)이었다.
때문에 그는 그의 시 속에 '한가하다(閑)'는 글자를 사용하지 못했다.
또한 두보의 어머니의 이름이 해당(海棠)이라서 그의 시집 「두집(杜集)」 중에는 해당(海棠)을 노래한 시가 없는데, 이는 그가 어머니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육유(陸遊)의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모 관부의 관리가 자신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인 등(燈)자를 피휘할 것을 명했다.
정월 15일에 ‘등을 3일간 달 것(放燈三天)’이란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 등(燈)자가 피휘에 걸려버리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3일간 방화할 것(放火三日)’으로 써야 했다.
때문에 “우리 사또는 불을 지르는 것은 허락해도 등을 다는 것은 막는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왔다.
▲소순(蘇洵)의 아버지의 이름은 서(序)였다.
때문에 소순(蘇洵)은 서(序)자를 쓸 곳이 오면 인(引)으로, 소순의 아들인 소식은 조부의 휘 서(序)를 서(敘)로 고쳐 썼다.
▲진시황의 아버지의 이름은 초(楚)였기 때문에 초(楚)땅을 가리킬 때는 형(荊)으로 쓰게 했다.
▲한고조의 부인이었던 여후의 이름은 치(雉)였다.
때문에 꿩(雉)을 말할 때 치(雉)란 글자를 쓰지 못하고 ‘들판의 닭(野雞)’이란 글자를 사용했다.
▲한 문제의 이름은 유항(劉恒)이었다.
당시 항산(恒山)을 상산(常山)이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한 명제의 이름은 유장(劉莊)이었 때문에 당시 「장자(莊子)」는 「엄자(嚴子)」라 불렀다.
▲당태종(唐太宗)의 이름은 이세민(李世民)이었기 때문에 6부 중 민부(民部)의 이름을 호부(戶部)로 부르게 된 것은 이 때 시작되었다.
▲당 고종의 이름이 치(治)라서 사람들은 치(治)자를 써야 할 때는 이(理)자를 대신 썼다.
▲송 고종의 이름이 구(構)였는데 성조가 같은 구(夠),구(媾),구(購),구(遘)... 등 50여개의 발음이 비슷한 모든 글자가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대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유지기(劉知幾)는 원래 당 현종 이융기(李隆基)의 기(基)자를 범하였기 때문에 자현(子玄)으로 바꿔 썼다.
후에 청대에 들어와 청 성조 강희제의 이름이 현엽(玄燁)이었기 때문에 다시 글자를 고쳐 자원(子元)으로 바꾸었다.
▲왕사정(王士禎)은 청대 옹정제의 이름인 윤진(胤禛)의 이름을 범하였기 때문에 바뀌었다가 그의 공적을 인정한 건륭제의 명으로 다시 복귀된 것이다.
정(禎)과 진(示+眞. 禛)은 발음이 같다. (zʒen)
▲전한의 선제는 본 이름이 유병기(劉病己)인데 사람들이 그 글자를 사용하는데 매우 불편해 할 것을 생각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순(詢)으로 고쳤다.
▲피해야 할 글자가 왔을 때 ‘某’ 또는 ‘口’자를 쓰기도 하였고 ‘피휘(避諱)’ . ‘금휘(禁諱)’ , ‘상휘(上諱)’ , ‘어명(御名)’이라고 쓰기도 했는데 이는 그 글자가 피해야 할 글자를 범했다는 뜻이다.
▲고려왕들의 이름에 대한 피휘(避諱):‘융(隆, 태조의 아버지)’ 을 ‘풍(豊)’으로 대치한 것과 ‘무(武, 혜종의 이름)’를 한 획 생략한 경우가 있으나,
▲고려 말 명나라 태조의 연호인 ‘홍무(洪武)’를 ‘홍호(洪虎)’로 바꾸어 쓴 것도 혜종의 휘가 ‘무(武)’였기 때문이다.
▲영조는 재위 31년(1755) 나주 벽서사건 관련자를 처벌한 후 역적 토벌을 축하하는 과거인 토역경과(討逆慶科)를 실시했다.
이때 답안지 대신 올라온 윤혜(尹惠)의 ‘상변서(上變書)’에 선왕들의 휘(諱)가 여럿 쓰여 있자 종묘로 달려간 영조가 엎드려, “저의 부덕(不德)으로 욕이 종묘에까지 미쳤으니 제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라고 흐느낄 정도로 선왕들의 휘는 금기였다.
임금의 이름만 기휘(忌諱)하는 것은 아니었다.
▲연암 박지원은 53세 때인 정조 13년(1789) 사헌부(司憲府) 감찰로 전보되자 중부(仲父)의 이름 사헌(師憲)과 같다는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고 박지원의 아들이 쓴 ‘과정록(過庭錄)’은 전하고 있다.
대신 태조의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齊陵)을 돌보는 제릉령이 되었는데,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제릉을 돌보는 것은 큰 고생이었지만 기휘를 위해 마다하지 않았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성씨 이(李)와 소리가 같은 이(鯉)가 뜻하는 “잉어”를 먹지 못하게 되었고, 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잉어를 이(鯉) 대신에 적선공(赤鮮公)이라고 고쳐 썼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자 세(世)를 피하려고 대(代)자로 바꿔 썼다.
예를 들면 절세가인(絶世佳人)을 절대가인(絶代佳人)으로 바꾸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자 세(世)를 피하려다 보니, 역사서 수서(隋書)를 편찬할 때 왕세충(王世充)을 왕충(王充)이라고 세(世)자를 공백으로 남겨 놓았고, 이 탓에 전한의 왕충(王充)과 혼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태종의 이름은 이세민이었기 때문에 6부 중 民部의 이름을 戶部로 부르게 된 것은 이 때 시작되었다.
녹전 이이록(우)
● 이병혁 박사의 ‘世를 代의 쓰임’을 읽고
부산대학교 명예교수이며 문학박사인 이병혁 선생께서는 ‘세와 대의 쓰임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아래와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세(世)와 대(代)의 쓰임을 정확히 알려면 이 말이 쓰이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청(淸)나라 선종(宣宗) 도광(道光) 26년(1846)에 편집하여 지경학재장판(知敬學齋藏板)에서 출판한 ‘피휘록(避諱錄)’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중국 역사상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 나올 때 이것을 감히 바로 읽지 못하고 달리 읽는 것을 고증하여 보인 것이다.
이 책 3권에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을 당시 사람들이 다른 글자로 고쳐서 읽는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당태종의 이름이 이세민이기 때문에 당나라 사람들은 이를 감히 읽을 수 없어 모든 글에서 世는 代자로 바꾸어 읽었다.
이를 학술적인 용어로 ‘피세작대(避世作代)’라고 했다.
즉 世자를 피해 代자로 바꾸어 섰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잘 다스려진 세상을 ‘치세(治世)’라 하는데 이를 ‘치대(治代)’로 고쳤다.
또 ‘세종(世宗)’은 ‘대종(代宗)’이라 고쳤다.
이 처럼 세(世)자만 바꾼 것이 아니라 민(民)자도 바꾸어서 본래 ‘민부(民部)’라 쓰던 것을 ‘호부(戶部)’라고 했다.
이때부터 몇 世라는 말도 몇 代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 라는 내용이다.
○ 당시는 唐太宗 李世民의 이름자인 ‘世와 民’자가 들어가는 말을 사용하거나 글자로 나타내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짓으로 여겨 다른 글자로 바꾸어 써야만 했다.
‘世’를 피하여 ‘代’로 고쳐 섰으니 이를 ‘피세작대(避世作代)’라고 하였다고 한다.
4가지 사례로 든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世와 民’자를 피해
①‘치세(治世)는 치대(治代)’로
②‘세종(世宗)은 대종(代宗)’으로
③‘민부(民部)는 호부(戶部)’로
④ ‘몇 世는 몇 代’로 바꾸어 쓰게 된 것을 말하고 있다.
이세민(李世民)은 중국 당(唐)나라 제2대 황제이다.
당 태종의 생몰(生沒)년 시기가 서기 626년∼649년이니 이때가 우리나라로서는 신라 선덕여왕(632-647)과 진덕여왕(647-654) 시기이다.
당나라가 이후 태종무열왕 때에 신라의 삼국통일에 힘을 실어주었고 뒤에는 점령지인 고구려 영토와 백제 영토를 두고 수년간 다투었음을 볼 때 당태종의 이름인 ‘世民’의 ‘世’와 ‘民’의 避諱(피휘) 제도가 당시의 신라에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고는 볼 수 없다.
‘민부(民部)라는 관직명을 호부(戶部)’라고 고쳤다면 이는 고려 때 1308년 충렬왕 34년과 1369년 공민왕 18년 두 번에 걸쳐 민부라는 관직명을 쓴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는 당태종 시절과는 600년 후의 일이다.
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피휘록(避諱錄)’은 청(淸)나라 선종(宣宗) 도광(道光) 26년 즉 1846년(조선 헌종 12)에 출판한 것으로 보아 위에 든 3~4개의 사례는 당태종 이세민이 살았던 시대의 사례들로 여겨진다.
피휘록이 발간된 시기와 당태종이 살았던 시기와는 1200년의 차이가 있다.
중국의 이 피휘(避諱) 제도를 우리나라가 받아들여 중국의 여러 황제의 이름과 유명인의 이름을 피휘(避諱)하였으며 우리나라 임금의 이름도 일반 백성들이 피휘 했다는 사실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임금의 이름이 대부분 ‘두’자가 아닌 ‘외’자라는 것과 잘 쓰이지 않는 어려운 글자로 임금의 이름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당태종의 이름이 이세민(李世民)이었으므로 당나라 280여 년간은 ‘世와 民’ 두 자는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世’와 같은 뜻인 ‘代’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이 두 글자를 피휘(避諱)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이 두 자가 함께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世代’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왕조가 계속되는 한 황제의 휘는 피휘(避諱) 해야만 했고 공자(孔子) 같은 유명인의 휘(諱)는 수천 년 간을 피휘 해야만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위에 든 4가지 사례는 唐太宗 당시와 그 이후인 당 멸망하기까지 적용되었던 사례로 보이고
위의 사례들은 모두 당태종 시절의 사례로 여겨진다.
민부(民部)를 호부(戶部)’로 고친 것도 당시 행정관서명인 ‘民部‘의 ’民’자를 ’戶’자로 바꾸어 부른 것이다.
‘몇 세(世)를 몇 대(代)’로 ‘치세(治世)를 치대(治代)’로 바꾼 것도 물론 당태종 시절의 피휘 사례이다.
‘民’자에서 1획을 떼어내어 비슷한 글자 ‘氏‘로 피휘 했다는 기록도 있다.
녹전 이이록(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