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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六촌장의 사실과 사성(賜姓)

녹전 이이록 2024. 9. 19. 17:51

촌장의 사실과 사성(賜姓)

 

알천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

 

휘는 알평(謁平)이요. 신라 3대 유리왕 9(서기32) 2월에 양산촌(陽山村)이 양산부(陽山部) 로 고쳐지고 양산부 대인(陽山部大人)으로 삼았으니 성()을 이씨(李氏)로 내리셨다.

 

관할 영역은 경주의 북악(北岳)인 소금강산하 표암봉(小金剛山下瓢巖峰)에서 경주의 금오산(金鰲山, 南山)의 서구릉(西丘陵)인 양산원(陽山原)까지의 영토이며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라 하였고, 육촌장중 최연고(六村長中最年高)로 수촌장(首村長)으로서 육촌연석회의시(六村連席會議時) 의장(議長)이 되었다.

 

()는 천서(天瑞) ()는 표암(瓢巖). 시호(諡號)[*문선공(文宣公)이고 ] 忠憲公(충헌공이고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

 

()는 소벌도리(蘇伐都利) 신라 3대 유리왕 9(서기32) 2월에 고허촌(高墟村)이 사량부(沙粱部)로 고쳐지고 사량부 대인(沙粱部大人)으로 삼았으니 성은 최씨(崔氏)로 내리셨다.

 

관할 영역은 경주의 금오산(金鰲山, 南山)의 돌산(突山, 양산원 쪽 돌이 많으므로 石山이라고도 함)에서 내남 일대(內南一帶)를 거쳐 울산 두동면 면고허(蔚山斗東面高墟)까지의 영토이며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이라 하였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시조왕(赫居世居西干)10여세(十餘歲)까지 길러내어 六村長이 왕위(王位)에 추대(推戴)했다고 했다.

 

가승(家乘)에 신라 건국 좌명공신(新羅建國佐命功臣)으로 신라 법흥왕 3(丙申)에 시호(諡號)를 충선군(忠善君)으로 내리셨고, 태종무열왕3(丙辰)에 문열왕(文烈王)에 추봉되었다.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는 구례마(俱禮馬), 신라 3대유리왕 9(서기32) 2월에 대수촌(大樹村)이 점량부(漸粱部)로 고쳐지고 점량부대인(漸粱部대인)으로 삼았으니 성()을 손씨(孫氏)로 내리셨다.

 

관할영역은 경주 서면 무산(慶州西面茂山, 현 건천읍)에서 견곡대수(見谷大樹, 小見)까지의 영토이다.

곧 건천읍과 소견면 전역이며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이라 하였다.

 

가승(家乘)에 신라건국좌명공신(新羅建國佐命功臣)으로 시호(諡號)를 충열군(忠烈君)으로 내리셨고, 문의왕(文義王)에 추봉되었다.

 

취산진지촌장(觜山珍支村長)

 

(, 이름)은 지백호(智伯虎)요 신라 3대 유리왕 9(서기32) 2월에 진지촌(珍支村)이 본피부(本彼部)로 고쳐지고 본피부 대인(本彼部大人)으로 삼았으니 성()을 정씨(鄭氏)로 내리셨다.

 

관할 영역은 취산(觜山, 花山)에서 구() 내동(內東) 일대(一帶)를 거쳐 외동(外東) 일대(一帶)의 영토(領土)이며 취산 진지촌(觜山珍支村)이라고 하였고, 가승(家乘)에 신라건국 좌명공신(新羅建國佐命功臣)으로 시호(諡號)는 문화공(文和公)이요, 감문왕(甘文王)에 추봉되었다.

 

()는 내남면 백운대(白雲坮)에 있다.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는 지타(祗沱), 신라 3대유리왕 9(서기32) 2월에 가리촌(加利村)이 한지부(漢紙部)로 고쳐지고 한지부대인(漢紙部大人)으로 삼았으니 성()을 배씨(裵氏)로 내리셨다.

 

관할 영역은 경주금산(慶州金山, 小金剛山)이니 덕동일대(德洞一帶)에서 산동지방(山東地方, 陽北, 陽南) 일대의 영토이며,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이라 하였다.

 

가승(家乘)에 신라건국좌명공신(新羅建國佐命功臣)으로 시호(諡號)는 문양공(文讓公)이요, 장열왕(壯烈王)에 추봉되었다.

 

명활산고야촌장(明滑山高耶村長)

 

()는 호진(虎珍), 신라 3대 유리왕 9(서기32) 2월에 고야촌(高耶村)이 습비부(習比部)로 고쳐지고 습비부대인(습비部 大人)으로 삼았으니 성()을 설씨(薛氏)로 내리셨다.

 

관할 영역은 경주 명활산(慶州明滑山, 普門)에서 천북면(川北面) 일대와 안강(安康)까지의 영토이니 명활산 고야촌(明滑山高耶村)이라 하였다.

 

가승(家乘)에 신라건국 좌명공신(新羅建國佐命功臣)으로 시호(諡號)는 무신공(武信公)이요, 장무왕(壯武王)에 추봉되었다.

 

양산재(楊山齋)

 

경북 경주시 탑동 690번지에 있으며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양산의 북쪽에 한 언덕이 있으니 바로 숭덕전의 동남쪽 손짓하거나 부를만한 거리이다.

 

1970년 가을에 착공하여 1979년 낙성하여 6부촌장의 위패를 봉안한 묘우(廟宇)를 입덕((立德)이라 하였으니 덕()이 있는 이를 찾아 나라를 세우자는 데에 뜻을 취하였고, 신문을 홍익(弘益)이라 하였으니 환웅(桓雄) 할아버지의 인간(人間)을 넓게 이익(利益)되게 한다는데 뜻을 취하였고, 정문(正門)을 대덕(大德)이라 하였으니 중용(中庸)에 큰 덕()은 반드시 천명(天命)을 받는다는데에 뜻을 취하였고, 동서(東西)의 두 재실(齋室)에는 익익(翼翼)이라 하였으니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에 세대(世代)세대가 드러남으로서 오직 공경(恭敬)한다는데 뜻을 취하였고, ()을 윤적(允迪)이라 하였으니 시경의 시경(詩經)의 고도(皐陶謨編)에 진실로 그 덕()에 나아간다는 데에 그 뜻을 취하였고, 양산재(楊山齋)라 함은 그 지명에 인하였다.

 

건축당시 오릉보존회와 박경원 내무부장관의 부단한 관심이 독보였으며, 도비와 군비가 투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