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의 번창 - 6
■ 후손의 번창 - 6
이완(李浣)의 아버지 이수일(李守一) 역시 이름난 무장으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세 차례나 역임하면서 여진(女眞) 토벌에 공이 많았다.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부원수로 도원수 장만(張晩)과 함께 서울 길마재(안현(鞍峴)) 전투에서 반군을 격파한 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국당(菊堂)의 맏아들 경중(敬中)(고려ㆍ판병부사(判兵部事))의 후손에서는 손자 정보가 세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올랐고 정보의 후손에서 이정암 (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ㆍ이정형(李廷馨)(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형제가 명신으로 꼽혔다.
정암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의 동생 이정형(李廷馨)은 성리학의 대가로 형과 함께 임란(壬亂)에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이조참판(吏曹參判)ㆍ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지퇴당집(知退堂集)’ 등의 저서가 남아 전한다.
오천(梧川) 이종성(李宗城)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장조(莊祖)(장헌세자(莊獻世子))묘정에 배향되었다.
영조 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영조 4년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다.
영조 12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도승지(都承旨)ㆍ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조 20년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영조 28년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은 대원군(大院君)에 맞선 보수정치가로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에 반대하고 파직 당했다가 대원군(大院君) 실각 후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大院君)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1882년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일본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열게 될 때 전권대신으로 제물포(濟物浦)조약에 조인했다.
이시영(李始榮)은 백사(白沙)의 *11세손 ⇒ 10세손이며 이종성(李宗城)의 5대손으로 한말(韓末)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사위다
28세에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그는 일제(日帝)에 나라가 망하자 만주(滿洲)로 망명, 유하현(柳河縣)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워 독립군(獨立軍)양성에 힘썼다.
1919년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되자 법무총장(法務總長)ㆍ재무총장(財務總長)을 역임하였다.
193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에 피선(被選), 1933년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위원겸법무위원(國務委員兼法務委員)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委員長)을 지냈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부통령(副統領)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과 정치노선이 알라 1951년 물러났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이상용(李相龍)은 한일합방 직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 2세 교포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행하였고, 1912년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단장(團長)이 되어 교포 계몽에 힘썼다.
3ㆍ1운동 때는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동포들의 자치활동(自治活動)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조직에 참여하여 그 독판(督辦)이 되고, 1926년에는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