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의 번창 - 1
■ 후손의 번창 - 1
‘제목 : 주요세거지’ 로 하여 경주이씨에 대하여 올라 있는 글인데 잘못 기술된 내용으로 붉은 글자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정묘보(丁卯譜)’에 보면,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에 대대로 분묘(墳墓)를 썼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상계(上系)가 일찍이 고려가 건국할 무렵에 금천(金川)에 터를 잡았다고 믿어진다.]
⇒ ‘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 - 우봉도리천)에 고려가 건국할 무렵부터 대대로 분묘를 썼든 사실’이라는 말이다. 위 내용은 잘못된 글이다.
고려의 건국은 중시조 3세 중원태수 호부랑중 이금서(李金書)에서 고려에 첫 벼슬을 하였고 우봉도리촌(지금의 황해도 금천)에 분묘를 쓴 것은 기록에 남겨진 분묘는 중시조 16세 동암공(휘 진. 익재공 아버지)과 송암공(휘 세기. 익재공 동생). 17세 익재공( 휘 재현)과 송암공의 3자 상서공(휘 과). 중시조 18세 밀직공(휘 창로. 익재공의 3자) 등 다섯 분이 우봉도리촌에 묘를 쓴 기록이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중시조 16세, 17세, 18세 대에서 분묘를 쓴 것이지 고려 건국부터 대대로 묘를 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17세 이규의 자손들은 이규의 증손(曾孫) 이석(李碩)이 려말(麗末)에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전남 나주(羅州)로 퇴거(退居)한 뒤에 일부가 그 곳에 자리 잡았던 것을 비롯해서 대체로 23세 이절(李節)의 대 이래로 경기도 안성(安城), 경북 예천(醴泉)ㆍ안동(安東)ㆍ상주(尙州)ㆍ경주(慶州), 전남 함평(咸平) 등지에 나뉘어 살았던 것 같다.
17세 이관(李琯)의 자손들은 21세 이인로(李仁老)가 단종손위(端宗遜位) 때에 전북 임실(任實)의 두곡리(杜谷里)로 살았던 이후에 임실에 많이 살았다고 믿어진다.
이관(李琯)의 동생 이제현(李齊賢)의 자손들 중에서 18세 이서종(李瑞鍾)의 후계(後系)가 21세 이지회(李之會). 이지대(李之帶)의 대에 경산(慶山)의 자인(慈仁)과 경주(慶州)에, 23세 이성지(李成枝)의 대에 제천(堤川)에 각각 정착하여 살게 되었고, 18세 이달존(李達尊)의 후계(後系)는 20세 이미(李美)가 태종조에 제주(濟州)로 유배된 이후 일부가 제주(濟州)에 터를 굳혔던 것을 비롯해서 안성(安城)의 죽산(竹山)ㆍ완주(完州)의 고산(高山) 청원(淸原)ㆍ영일(迎日)의 흥해(興海)ㆍ상주(尙州)의 함창(咸昌) 등지에 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제현(李齊賢)의 셋째아들 이창로(李彰路)의 후계(後系)는 21세 이문(李聞)이 경북 영일(迎日)의 흥해(興海)로 낙향(落鄕)하였고 20세 이종지(李鍾地)가 단종조 갑술년(甲戌年)에 지금의 함남 이원(利原)으로 유배되었으므로 이 무렵부터 이들 지역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한편 17세 이천의 자손들이 22세 이만선(李萬善)ㆍ이완원(李完元)의 대에 의성(義城)ㆍ대구(大邱)ㆍ산청(山淸). 철산(鐵山)에, 23세 이간(李簡)ㆍ이시영(李時迎)의 대에 안동(安東)ㆍ선산(善山)ㆍ청도(淸道)ㆍ순천(順天) 등지에 정착했던 사실이 ‘정묘보(丁卯譜)’에 보이며, 이천의 동생 이매(李邁)의 자손들은 18세 이경원(李敬元) *이애로 ⇒ 아래로 4대에 걸쳐 용인(龍仁)ㆍ봉산(鳳山)ㆍ상주(尙州) 등지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17세 이과의 자손들은 안동(安東)ㆍ양양(襄陽)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과의 동생 *이수(李蓚) ⇒ 이조(李蓨)의 자손들은 *이수 ⇒ 이조(李蓨)가 여말(麗末)에 평북 곽산(郭山) 땅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 머물러 살았던 이 후에 곽산에 세거했던 것 같다.
15세 *이수(李蓚) ⇒ 이강(李康+羽)의 자손들은 20세 이귀산(李龜山) 이래로 경주(慶州)에 살았으며, 17세 이손보(李孫寶)의 자손들은 21세 이득산(李得山) 이래로 의성(義城)에 살았다고 믿어진다.
1930년 당시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충북 청원군(淸原郡)일원, 충남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 전북 완주군(完州郡) 봉동면(鳳東面), 임실군(任實郡) 덕치면(德峙面), 전남 해남군(海南郡) 화산면(花山面), 무안군(務安郡)ㆍ영암군(靈岩郡)ㆍ진도군(珍島郡) 일원, 경북 달성군(達城郡) 성서면(城西面), 의성군(義城郡). 다인면(多仁面), 월성군(月城郡) 천북면(川北面)ㆍ강동면(江東面), 청도군(淸道郡) 청도읍(淸道邑), 상주군(尙州郡). 낙동면(洛東面), 영일군(迎日郡)ㆍ경산군(慶山郡) 일원, 경남 밀양군(密陽郡) 단양면(丹陽面), 남해군(南海郡). 삼동면(三東面), 울주군(蔚州郡) 일원, 평북 박천군(博川郡) 동남면(東南面), 정주군(定州郡) 임포면(臨浦面), 함남 이원군(利原郡) 남면(南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오늘날 자손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은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망호리(望湖里)이다.
이곳에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처음 자리잡은 것이 4백 여 년 전, 이제현(李齊賢)의 9대손인 이기(李琪)가 을묘사화(乙卯士禍)를 피해 이 마을로 오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이 마을 1백여 가구가 경주이씨(慶州李氏) 자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