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과 표암재 (연대미상) - 2
■ 표암과 표암재 (연대미상) - 2
경주신문에 게재되었던 신 모 기자와 김 모 기자의 글입니다.
- 박바위 전설과 알평이 이끌었던 화백제도, 표암이 가진 가장 중요한 문화콘텐츠적 자산
강 교수는 “지금까지 경주 이씨 문중에서는 이 박바위 전설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전설들은 결코 부정적인 내용이 아니다.
경주 이씨의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컸음을 의미한다.
이 전설들의 주요 내용은 영웅의 탄생이고, 표암에서 서라벌을 위압할 상서로운 기운이 나온다는 것이니, 이는 큰 인물의 탄생을 암시한다.”면서 “왕조사회에서는 왕기가 드러나는 것은 반역을 의미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이런 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박바위 전설과 알평이 이끌었던 화백제도는 표암이 가진 가장 중요한 문화콘텐츠적 자산이다.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표암을 찾을 수 있도록 이것들을 흥미있는 이야기로 스토리텔링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다.
- 6부의 흔적이 있는 곳은 이곳 뿐, 민주주의 발상지로서 새로운 신라의 명소로 부각되길
경주이씨 표암화수회 회장이자 재단법인 표암문화재단 이상록 이사장은 “6부의 흔적이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아직은 경북도 지정기념물이어서 사적물로의 등급을 올리려 하고 있다.
문화재로의 추진상황은 현재 보완해야하는 서류를 완비했으며 12월 심의를 앞두고 있다”면서 문화재로 지정된다면 일가들의 단합이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고 했다.
“결국, 신라건국사는 수석 촌장인 우리를 중심으로 6부를 빼놓을 수 없다. 왕경복원도 중요하지만 6부를 먼저 짚어야 하는 것 아닌가. 민주주의 발상지로 부각해 새로운 신라의 명소로 부상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사적지로 승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고 했다.
실질적인 표암문화재단 사업을 이끌고 있는 이 회장은 “표암화수회는 서울의 경주이씨 중앙화수회가 있지만 표암이라는 시조 호를 쓰는 곳은 경주뿐이다.
표암이 우선되는, 완전히 독립적인 화수회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신라 건국사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신라초기 역사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고 우리와 나머지 5성들도 학술대회를 통해 건국초기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관 주도가 아닌 우리의 재원으로 학술대회만 4번을 치렀다. 이는 표암재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신라초기역사를 학자들이 구전과 설화와 함께 심도있게 연구하길 바라는 것뿐이다”
- 양산촌장 알평 탄생지 표암은 소도 유적으로 추정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六村)이 있었다. ①
삼한시대에 진한(辰韓)의 한 소국인 사로국(斯盧國)을 구성했던 여섯 개의 촌이 육촌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혁거세거서간’ 조에도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 등 육촌의 이름이 나온다.
육촌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경북 일원으로 보는 견해와 경주시와 옛 경주군 일대를 포함하여 보는 견해, 그리고 경주 내지 경주 분지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견해 등이 있다.
촌이라는 이름 때문에 현재 경주 내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촌이라고 부를 때는 말이다.
이 조목부터 일연 스님은 계속해서 ‘신라’ 이야기를 참 많이 하신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 (閼川 楊山村)이다.
남쪽에 지금의 담엄사(曇嚴寺)가 있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라 한다.
비로소 표암봉(瓢嵒峰)에 내려와 급량부(及梁部)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급량부라 하였다.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년(940)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中興部)라 하였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담엄사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오릉(五陵)의 남쪽에 있었던 절이다.
따라서 담엄사 북쪽이 양산촌이 되므로 경주시 한가운데 대릉원 일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신라시대 전불칠처가람(前佛七處伽藍) 가운데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서청전(壻請田)에 있었던 절이다.
서청전은 ‘사위 맞아들인 밭’이라는 뜻이다.
창건 연대는 신문왕 때로 추정된다.
고려 중기까지 7대 사찰의 하나로 중시되어 오다가 차차 퇴락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 폐사되었다.
민족 항일기에 사지 중앙을 관통하는 길을 내면서 이 절터는 거의 파괴되었다.
또, 당간지주와 초석 등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제전인 숭덕전(崇德殿)을 건립할 때 사용하였다.
파손된 탑의 팔부신중(八部神衆)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표암(瓢嵒, 경상북도기념물 제54호)은 현재 경북 경주시 동천동 507-7번지 일대이다.
해발 20m 정도의 봉우리로 탈해왕릉과 7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소도(蘇塗) 유적의 하나로 추정된다.
정상부에는 광림대(光臨臺)라는 비각이 있으며,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41m 지점에는 3∼4단으로 축조한 석축 제단도 남아 있다.
표암 아래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인 *표암제(瓢嵒齊)가 있다.
표암제의 정원에는 신라정(新羅井)이라고 새겨진 우물이 남아 있다.
표암제 근처에는 조선 순조 13년(1813)에 경주 이씨(慶州 李氏) 문중이 세운 <신라재명공신급량부대인이씨(新羅在命及梁部大人李氏 謁平遺墟碑)〉가 있다.
또한 근래 <경주 이씨 시조 휘알평 경모비>가 세워졌으며, 숭암박물관도 건립되었다.
표암은 경주 이씨 문중에 의해서 조선시대 이후에 성역화 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