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문화
■ 제사 문화
제사문화에 대하여 좋은 글이 있어 참고로 복사하여 올린다.
국어사전에는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냄. 또는 그런 의식이라고 나온다.
제사의 기원은 토테미즘이나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신앙에 있다.
자연재해, 질병, 맹수들의 공격 같은 인간집단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재앙을 막기 위해 하늘이나 땅, 강이나 바다, 오래된 나무, 높은 산, 조상 등에 절차를 갖추어 빌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1]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신성에 대하여 지내는 종교 의식은 '제사(祭祀)'로 통칭할 수 있다. 더불어 고대 중국 상나라(은나라)의 왕 조갑이 주변 토착 신을 배제하고 조갑의 직계 조상만 섬기는 조상신 풍습을 만든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기록을 보면 상족의 조상은 직계인 근조선공과 직계가 아닌 원조선공으로 나뉘는데, 상나라에서 제사는 직계 선조인 근조선공에게만 지냈다.
조갑은 왕의 어령에 반발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 자신의 조상을 숭배하면 농사가 잘 되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재앙을 막아준다는 등 만사가 다 잘 돌아간다고 퍼뜨렸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조상 섬기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제사의 시초다.[2]
이후 상나라는 주나라에게 멸망하게 되는데 주나라는 위에서 조갑이 퍼뜨린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상나라의 제사방식을 이어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전 지도층을 제후로 임명해 상나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도록 했는데, 이것도 위의 미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가문의 제사를 끊기게 하면 그 사람에게 제사가 끊어진 조상귀신들이 재앙을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왕들을 가르치던 공자가 상나라 제사문화 띵호와 하면서 재정비했다.[3]
공자는 유교의 대표이니 후대 유학자들이 공자를 떠받들며 제사문화가 쭉 이어지는 건 당연지사... 그러면서 이 제사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데 지금 까지 뿌리 깊게 이어지고 있다.
일반명사로서 제사의 뜻은 이렇지만, 흔히 한국에서 '제사'라고 하면 유교의식에 기반을 둔 '조상 제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4]
이런 수단으로서 행해진 제사는 중,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숭배의 제도로 고착되었다.
또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면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정교가 분리된 이후에도 황제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자신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다만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의 왕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왕조의 조상신(종묘)과 땅의 신(사직)에는 제사를 지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가정에서는 효의 의미를 가져 가문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종교적 면은 사후세계의 인정을 통한 유교 특유의 간접적 영생법의 의미를 가졌다.
조선 전기까지는 아들딸 상관없이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받고 제사의 주체에서도 남녀차별이 없었으나[5]
조선 중기 이후 소중화 의식이 강해지면서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남[6]이 아버지의 재산 2/3을 받고 나머지를 다른 아들들(딸은 받지 못한다)이 나누는 전통이 1990년대까지 유지되기도 했다.
•삼국시대 이전 :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 하늘 숭배 사상이 유행하는 원시적인 종교 형태를 띠고 있다.
•삼국 시대 초기 :
고조선, 부여, 고구려, 삼한(마한, 진한, 변한)에선 동맹, 수신, 영고 등 우리 고유의 산과 강, 신과 하늘에게 지내는 의식 비슷한 제사가 진행됨.
이후 왕조의 형태가 잡히면서 주로 황실에서 시조에 대한 제사가 진행됨.
이때 고구려에서 시조의 조각상을 세우고 그를 숭배하는 제사는 고려에도 이어진다.[7]
•삼국시대 중후반 ~ 남북국 시대 :
불교와 도교의 수입이 이루어지면서 사찰이 세워지고 불교식 제사가 자주 진행됨.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행사가 황실 위주로 이루어짐.
신라에선 도교식 제사인 초제[8]가 행해져 조선 중기까지 이어진다.
이후 유교의 수입도 이어져 신라에선 종묘와 사직단이 설치되 황실에서 유교식 제사가 이루어진다.
•고려 :
삼국의 제사들이 이어져 내려오고 성종 대에 종묘와 환구단, 사직단 등을 설치해 황실에서 제사를 시행, 민중들은 팔관회, 연등회 등에 참가했다.
•고려 말 :
성리학의 수입과 더불어 주자가례에 따라 가문의 무덤(가묘)를 설치하려는 운동이 사대부사이에서 활발해졌으나 별로 보급되진 않음.
절에 제사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초기 :
불교의례의 전통이 남아 주자가례와 같은 유교의례는 사회전반에 보급되지 않음.
•16세기 중반 :
성리학이 심화되어 양반사회에서 주자가례가 정착되고 주자가례에 명시된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표시로 행하여지고 있다.
( 출처 ) 김해허씨 서악종친회 http://cafe.daum.net/seo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