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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 이재현

녹전 이이록 2022. 9. 30. 08:46

익재 이재현

 

이재현이 아니고 이제현이 바릅니다.

*익재 이재현( =>  益齋 李齊賢 익재 이제현 )

 

 경주이씨의 유래.

 

시조는 초기 신라의 6촌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及梁部)의 촌장으로 전해지는 표암공(瓢岩公) 알평(謁平)이다.

표암공이라는 호칭은 알평이 애초에 경주 *박바위( 瓢巖표암- . 바위 )에 강림했다는 전설에서 취해진 것이다.

 

기원전 117년 한무제 원수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의 표암봉인 *박바위(瓢巖표암뒤에 밝바위)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촌장으로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시켜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시는데 6부 촌장의 *의장(수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시키신 선구자였음을 호언 할 수 있다.

 

서기 32년 신라 3대왕인 유리왕 9년에는 진한 6촌을 6부 로 개칭할 때 지금의 경주시 일원에 해당되는 양산촌의 급량부(양산촌을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라고 사성하였으니 뒤에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이씨(慶州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32(신라 유리왕 9) 유리왕이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하여 양산촌을 급량부로 개칭하고 그에게 이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위 문장을 하나로 묶어 아래와 같이 서술하여야 합니다.

⇒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32년 신라 3대왕인 유리왕 9년에 진한6(사로6. 혹은 6)6부로 개칭할 때 양산촌을 급량부로 개칭하고 그에게 이씨의 성을 사성(賜姓)하였으니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 이씨(慶州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 후 후손들은 알평의 *36세손 (원대손遠代孫)으로 신라 진골출신인 거명을 중시조로 하고, 시조의 발상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거명은 신라 때의 인물로 진골(眞骨) 출신이다.

 

그는 시조 알평의 *36세손( 원대손遠代孫)이며 시조로부터 *현재(熙字돌림) ( 현재 희자돌림)까지는 *(대략 75삭제) 2,000년이 된다.

경주이씨의 세계는 중시조 거명의 *16대손(고려 말기) { 14~20대손(중시조 15~21)}에서 크게 *8( 14대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 중소 70) 파로 분파된다.

경주이씨의 세계는 거명의 *17세손(고려 말기) { 14~20대손(중시조 15~21)}에서 *8( 14대파)로 대별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70( 중소 70) 파로 분파된다.

 

설명)

항과 항은 같은 뜻의 글입니다.

이의논지에서 세와 대는 다른 뜻으로 읽으니까 몇 대손몇 세손을 각기 다르게 읽어 서술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손과 세손은 같은 뜻으로 읽기 때문에 위와 같이 수정한 글 항과 항 중 하나만 읽으면 됩니다.

 

 이씨의 발전.

 

(중시조 본손 계통) 8대파는 평리공파(評理公派이암공파(怡庵公派익재공파(益齋公派) · 호군공파(護軍公派국당공파(菊堂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사인공파(舍人公派) 등이다.

 

이밖에 지손(支孫) 계통으로 ( 6대파는) *판전공파(判典公派시랑공파(侍郞公派) 삭제· 석탄공파(石灘公派) { 판전공파(判典公派월성군파(月城君派직장공파(직장공파석탄공파(石灘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교감공파(校勘公派)} 등이 있다.

 

한편 경주이씨 *분파도(分派圖)( 분적도分籍圖)에는 전술한 *10( 8)의 분적종 중 *성주이씨와 우계이씨( 합천이씨와 차성이씨와 우계이씨)는 거명의 윗대에서 분파되었으며 *나머지( 재령이씨. 아산이씨. 진주이씨. 원주이씨. 장수이씨)는 그 아랫대에서 분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경주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 상신 8,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 명신을 배출하였다.

8대파(14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李恒福)이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다음이 익재공파의 세칭 ‘8()[화곡(華谷: 李慶億이경억)]과 완()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 국당공파의 매죽헌(梅竹軒: 李浣)]이 그에 버금간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 문형 가운데 상서공파의 오신(五臣) 백사집에서 영의정 4, 좌의정 2, 대제학 2명이 나왔고, 익재공파의 *‘8(八鼈)( 화곡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 국당공파의 정순공(靖順公:誠中) 후손 (매죽헌집)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益齊) 이제현(李齊賢. 1287 ~1367)이 고려 때의 경주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일곱)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였다.

 

조선시대에는 8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8문장으로 꼽히는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인(李公麟) ( 이공린李公麟)의 아들들과 임진왜란이 터지자 유성룡을 도와 병참 책임을 맡는 등 큰 활약을 한 이시발(李時發)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 전후 정승에 올라 당쟁 을 막는데 힘쓴 조선시대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청백리에 올랐다.

 

익재 이제현 (益齋李齊賢 12871367)은 누구인가?

 

1287(충렬왕13)부터 1367(공민왕16)살다 돌아가신 고려 때의 문신, 학자이며 시인이신 이 분은 자는 중사,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이시다.

 

검교정승 진()의 아들로, 1301(충렬왕 27) 성균시에 장원,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 연경궁 녹사 등을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등용되어, 제안부 직강을 지낸 후 이듬해 사헌 규정을 지내고, 1310(충선왕 2) 선부산랑, 다음해 전교시승도 지내고, 삼사 판관 등을 역임, 1312년 서해도 안렴사로 나아갔다가 성균 악정, 풍저창사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 부령, 풍저감 두곡을 역임, 1314(충숙왕 1) 백이정의 문화에서 정주학을 공부, 이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자 * 요수, 염복, 원명선, 조맹부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이듬해 선부 의랑, 성균 제주가 되고, 1316년 진현관 제학에 승진, 다음 해 선부 전서로 원나라에 가서 상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1319년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지방을 유람, 이듬해 지밀직사에 올라 단성익찬공신이 되고, 이 해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빠이앤투그스의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밝혀 1323년 풀려나오게 했다.

다음해 광정대부밀직사사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이 되고 정당문학으로 김해군에 봉해지고, 1336년 삼중다광( 삼중대광). 영예문관사에 올랐다.

 

1339년 심왕 고가 모역을 하다 실패하자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 원사, 두린 등이 왕을 잡아가자, 이 때 연경에 가서 사실을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 시골에 은거했다.

1343(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포박해 가므로 글을 올려 사명을 요청했고, 이듬해 판삼사사에 복직, 서연관이 되었다.

 

1348(충목왕 4) 충목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으로 원나라에 가서 풍정왕의 승습을 요청했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우정승 권당정동성사로 발탁, 도첨의 정승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창화공신( 동덕협의 찬화공신)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다음해 우정승에 재임, 1365년 문하시중의 관작에 올랐다.

 

이어 사직하고, 저술과 학문연구에 전심했다.

1362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에 호종, 이해 계림부원군에 봉해졌고, 만년에 은퇴한 뒤, 왕명으로 실록을 편찬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했고, 원나라 조명부의 서체를 고려에 도입하여 널리 유행시켰다.

원나라의 진감여라는 인물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탕병용이 찬을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미

술관에 보관되고 있다.

 

익재난고소악부에 17수의 고려의 민간 가요를 한시 칠언절구로 번역하여, 이것이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후에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고, 경주의 귀강서원, 금천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