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동본 불혼(同姓同本不婚)
■ 동성동본 불혼(同姓同本不婚)
‘한국민족 대백과사전’에 게재되어 있는 글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 중의 하나가 근친금혼(近親禁婚, incest taboo)이다.
근친금혼은 외혼율(外婚律, exogamy)과 관계되는 것으로, ‘외혼율’은 혼인대상자를 일정한 범위 밖에서 구하는 것이다.
동성동본불혼(同姓同本不婚)은 바로 외혼율이며, 성과 본을 같이 하는 사람들 사이의 혼인을 금하는 것이기 때문에 씨족외혼제(氏族外婚制)이다.
‘동성’이라는 형식과 ‘동조’라는 실질은 공신(功臣)에 대한 사성(賜姓: 임금으로부터 성을 받는 일)이나 개성(改姓), 개본(改本)으로 서로 일치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조상이 같은 동성동본인 남계혈족뿐만 아니라, 조상이 같은 동성이본· 이성동본· 이성이본 사이에서도 혼인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동성동본이라도 조상이 다르면 종족이 아니므로 혼인을 하였다.
이처럼 동성과 동본만을 따지지 않고 족보나 구전(口傳) 등에 의하여 동조임을 확인하여 서로 혼인하지 않는 예도 있다.
동성불혼은 족외혼의 단위가 되는 씨족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지금의 동성동본불혼과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동성근친혼의 전통이 계속 되어서 적어도 왕실에서는 동성혼, 근친혼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 근친혼에서 하나의 전례를 찾는다면 이복남매혼(異腹男妹婚)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모(母)가 혼인을 행할 수 있는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이는 혼인을 직접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의 출사를 막는 등 간접적인 방법이었다.
1309년(충선왕 즉위년)에 원(元)나라의 영향으로 문·무 양반의 동성동본금혼령이 내려졌다.
동성불혼이 확립된 때는 유학을 국시로 하는 조선시대이다.
조선시대 일반형사법으로 적용되었던 『대명률(大明律)』에서 동성혼과 근친혼을 금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 전기부터 동성혼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불혼은 우리나라의 경우 동성동본불혼이 되어 동종불혼(同宗不婚)이 된 것이지, 성만 같으면 혼인을 금하는 동성불혼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속대전(續大典)』에서 동성불혼을 규정하였으나 끝내 이는 준수되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적 특색으로 성뿐만 아니라 본관이 같아야 동종(同宗)인 한국에 있어서 동성(同姓)이면 동종인 중국식의 동성불혼은 성립되지 않은 것이다.
1958년에 제정된 민법(1960. 1. 1. 시행) 제809조 제1항에서는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다만, 제820조에서는 동성동본끼리 혼인하여 혼인 중 포태(胞胎)한 경우에는 위의 취소권자가 그 취소청구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동성동본금혼 때문에 사실상 부부이면서도 혼인신고를 하지 못해서 발생한 사회문제를 고려하여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1977년 12월「혼인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었다.
1978년 1월 1일부터 그 해 12월 31일까지 1년 동안 일정한 서류를 갖추어 혼인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1988년과 1996년에도 같은 내용의 특례법이 시행되었다.
혼인이 제한되는 근친의 범위도 남녀평등이라는 헌법정신에 맞추어 합리적으로 조정되었다.
2005년의 민법 개정(2008년 시행)으로 촌수에 관계없이 동성동본 사이의 혼인을 금하던 제도는 폐지되고, 8촌 이내의 혈족 사이에서만 혼인을 제한하게 되었다.
2005년의 민법 개정은 동성동본불혼만이 아니라, 호주를 중심으로 가(家)를 구성하는 호주제를 폐지하는 등 양성평등이라는 헌법이념과 시대변화에 부합한 입법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개정된 민법 제809조에 대해서는 여전히 혼인이 제한되는 근친의 범위가 너무 넓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