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재선생 연보(益齋先生年譜) – 3
■ 익재선생 연보(益齋先生年譜) – 3
익재 선생 연보 – 2 에 이어 올립니다.
1358년. 18년 무술 선생 72세
왕(王)이 경성(京城)을 수축할 적에 기로(耆老)ㆍ대신(大臣)에게 방문(訪問)하였는데, 이때 선생이 글을 올렸다.
그 대략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이상은 알 수 없지만 삼대 이하로는 도읍을 세우고서 성곽(城郭)을 쌓지 않았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동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쳐서 참람한 무리를 평정하여 삼국(三國)을 통일시킨 뒤 7년 만에 훙(薨)하셨습니다.
그때 피폐한 백성을 동원하여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었으니, 송경(松京)에 성(城)을 쌓지 않는 것은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형세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안렴사(按廉使) 박대양(朴大陽)을 전송한 시(詩)가 있고, 또 정조(正朝)에 대한 시가 있다.
1359년. 19년 기해 선생 73세
손자 보림(寶林)을 위하여 집정(執政)에게 보낸 시가 있다.
1361년. 21년 신축 선생 75세
2월에 왕이 선생에게 명하여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을 강하게 하였다.
1362년. 22년 임인 선생 76세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시켜 어가(御駕)가 남쪽 지방으로 파천(播遷)하자 선생이 달려가 상주(尙州)에서 배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기를,
"오늘의 이 파천이, 당 현종(唐玄宗)이 안록산(安祿山)의 난(亂) 때문에 서촉(西蜀)으로 파천하였던 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였다.
또 홍언박(洪彦博)에게 말하기를,
"옛사람이 일컫기를 '웅장하구나 산하(山河)여! 이는 위(魏) 나라의 보배다.' 하였으니, 애초에 요해처(要害處)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협애(狹隘)한 목을 지켰다면 승리를 기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일찍 도모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소.
만약 적과 들에서 싸웠다면 반드시 아군(我軍)이 패배하였을 것이나, 단 눈이 내리는 것을 이용하여 적이 생각지도 않은 틈을 노려 공격하였으므로 이겼으니, 이는 종묘(宗廟)와 산하(山河)의 도움이오." 하였다.
인하여 어가를 호종하고 청주(淸州)에 이르렀으며, 선생이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임금의 명에 의하여 판상(板上)의 시운(詩韻)에 따라 시를 지어 올렸다.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363년. 23년 계묘 선생 77세
왕(王)이 청주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환도(還都)하지 않았으므로, 선생이 모든 재상(宰相)들을 인솔하고 가서 진언(進言)하기를
'송도(松都)는 종묘(宗廟)가 있는 곳이요 국가의 근본이니, 속히 환가하셔서 백성의 바라는 마음을 위로하소서.
서운관(書雲觀)에서 음양(陰陽)의 구기(拘忌)로 아뢰었으니, 마땅히 먼저 성남(城南)의 흥왕사(興王寺)에 주가(駐駕)하였다가, 강안전(康安殿)이 수리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니, 왕이 따랐다.
1365년. 25년 을사 선생 79세
왕(王)이 신돈(辛旽)을 총애하므로, 선생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한 번 돈(旽)을 만났었는데, 그의 골상(骨相)이 옛날 흉인(凶人)과 비슷하여 반드시 후환(後患)을 끼칠 것이니, 상께서는 가까이 하지 마소서."하였는데, 이로 하여 신돈이 깊은 원심을 품고 온갖 방법으로 헐뜯었으나, 선생이 늙었기 때문에 가해(加害)하지 못하였다.
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유자(儒者)들은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니 일컬으면서 안팎으로 포열(布列)하여, 서로 돌려가면서 간청(干請)함으로써 하고 싶은 짓을 멋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제현(李齊賢) 같은 사람은 그의 문생(門生)의 문하에 또 문생이 있어 드디어 나라에 가득 찬 도둑이 되었으니, 유자의 해(害)가 이와 같습니다."
하였는데, 신돈이 패하여 실각하자, 왕이,
"익재(益齋)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동료들이 감히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반드시 익재라고 불렀으며, 재상이 되고 나서는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익재라 불렀으니, 선생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대 받음이 이러하였다.
6월에 조마(照磨) 호약해(胡若海)가 명주사도(明州司徒) 방국진(方國珍)의 사신으로 와서 방물(方物)을 바치고 돌아갈 적에 선생에게 시(詩)를 청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노쇠하였으므로 글 짓는 것을 꺼렸으나 너무 정성스럽게 청하므로, 이에 오언시(五言詩) 1편(篇)을 지어 주었다.
이로부터는 다시 저술(著述)하지 않았다.
1367년. 27년 정미 선생 81세
가을 7월에 병으로 사제(私第)에서 졸(卒)하였는데, 태상(太常)에서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겨울 10월에 유사(有司)가 위의(衛儀)를 갖추어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 선영(先塋) 아래 장사하였다.
홍무(洪武) 9년 병진에 공민왕(恭愍王)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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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공거(知貢擧) : 과거(科擧)의 고시관(考試官)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의 위이다.
그 과거에서 합격된 자는 이 지공거를 좌주(座主) 또는 은문(恩門)이라 부르면서, 평생 문생(門生)의 예(禮)를 다하였다.
* 상서(庠序)와 학교(學校) : 상(庠)·서(序)·교(校)는 모두 향교(鄕校)를 말하고, 학(學)은 국학(國學)으로 곧 태학(太學)을 말한다.
《孟子》 ?文公 上에 "하(夏) 나라에서는 교(校)라 하였고, 은(殷) 나라에서는 서(序)라 하였고, 주(周) 나라에서는 상(庠)이라 하였는데, 학(學 : 태학〈太學〉임)은 삼대(三代)가 다 같았다." 하였다.
* 육예(六藝)와 오교(五敎) : 육예는 선비로서 배워야할 여섯 가지 일로 곧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이며, 오교는 즉 오륜(五倫)으로 부자(父子)의 친애, 군신(君臣)의 의리, 부부(夫婦)의 분별, 장유(長幼)의 차서, 붕우(朋友)와의 신의를 말한다.
* 구양수(歐陽脩)의……기롱하였는데 : 당 고종(唐高宗)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고종이 죽은 뒤에 중종(中宗)·예종(睿宗)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 하였었다.
이는 《춘추(春秋)》의 필법으로 보면 정통(正統)이 아니므로 본기(本紀)에 넣어서는 안 되는데, 구양수가 《당서》를 찬술하면서 측천무후기를 넣은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 태상(太常) : 태상부(太常府)인데, 제사(祭祀)와 증시(贈諡)를 맡은 관아(官衙)이다.
충렬왕(忠烈王) 24년에 봉상시(奉常寺)로 개정(改定)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