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 묘지(墓誌)
묘지(墓誌)에 대하여 쓴 글이 있기에 복사하여 올립니다.
묘지(墓誌)는 원래 중국의 동한(東漢) 시기에 기원하여 위진 시대 이후 크게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풍습이 한국에 유입된 것이다.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서 출토된 한(漢) 연평원년(延平元年: A.D.106) 고무중(賈武仲)의 처 마강(馬姜)의 묘지는 기재 내용이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묘지에 매우 가까운 초기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강소성(江蘇省) 비현(丕縣)의 무우(繆宇) 묘에는 뒷방(後室) 입구 상단에 피장자의 성명, 사망, 장례일자, 관직, 송사(頌辭)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한국의 묘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명문이 새겨진 방형의 소석판(小石版)이나 도판(陶版) 등의 형태를 지칭한다.
그러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묘지라고 하면, 무덤의 벽면에 쓰여지거나 새겨진 명문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 가운데 모두루총(牟頭婁塚), 동수묘(冬壽墓)로 알려진 안악(安岳) 3호분, 그리고 덕흥리(德興里) 고분에 묘지로서 묵서가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묘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공주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것이다.
523년에 죽은 무령왕의 능에서 나온 이 지석의 성격은 지신(地神)으로부터 묘터를 산다는 토지매매계약서로서 중국에서는 매지권(買地券)이라 하는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지석의 출토상태를 보면, 무덤의 널방[玄室]에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는 왕비의 지석이, 오른쪽(동쪽)에는 왕의 지석이 있었고, 그 위에 양나라 오수철전(五銖鐵錢)이 놓여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묘에서 묘지가 많이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잘 물갈이한 장방형의 오석(烏石)이나 점판암제의 판석을 사용하여 음각으로 글을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 이래 사용되어오던 오석이나 점판암과 더불어 자기로 만든 도판이 함께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묘지는 묘비 모양, 단지 모양, 원통형, 표주형(標柱形) 등 다양하다.
당시에 지석을 묻는 방식은 묘지의 입지에 의해 두 종류로 나뉘어 진다.
묘지가 평지에 있으면 광중(壙中) 남쪽 가까운 곳에 먼저 오지그릇 하나를 묻고, 그 위에 지석을 놓은 다음, 또 작은 오지그릇을 사면으로 둘러 묻어, 먼저 묻은 그릇이 덮이게 만들었다.
또 묘지가 가파른 산기슭에 있으면 광구(壙口) 남쪽 몇 자 되는 곳에 땅을 4~5자 판 후, 위와 같은 방식으로 매장한다.
또한 벽돌을 지석으로 사용할 때는 돌상자에 넣어서 묻거나, 나무궤에 담고 석회로 사면을 발라서 묻기도 한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죽은 사람의 이름· 관계(官階)· 경력· 행적· 생몰연월일, 자손의 성명, 묘지(墓地)의 주소 등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도판(陶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
◈ 유의어
광지(壙誌). 묘명(墓銘). 묘지명(墓誌銘). 묘지석(墓誌石). 지문(誌文). 지석(誌石)
◈ 관련어
무령왕릉 지석(武寧王陵誌石).
문정공 조충 지석(文正公趙冲誌石).
백자태항 태지석(白磁胎缸胎誌石).
백자태호 내외호 및 태지석(白磁胎壺內 外壺 및 胎誌石)
서거정 선생 묘지석(徐居正先生墓誌石)
◈ 상위어
금석문(金石文)
◈ 하위어
고자 묘지(高慈墓誌). 고진 묘지(高震墓誌). 모두루 묘지(牟頭婁墓誌).
백자철화접시형 묘지(白磁鐵畵접시形墓誌).
선덕십년명청자 상감묘지(宣德十年銘靑磁象嵌墓誌)
설요 묘지명(薛瑤墓誌銘). 영통사주지지칭 묘지(靈通寺住持智稱墓誌).
왕기묘지명(王基墓誌銘). 왕서묘지명(王舒墓誌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천남산묘지(泉男産墓誌).
천남생 묘지(泉男生墓誌). 흑치상지 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
흑치준 묘지명(黑齒俊墓誌銘). 흥왕사 대각화상 묘지(興王寺大覺和尙墓誌).
흥왕사 원명국사 묘지(興王寺圓明國師墓誌)
◈ 유허비(遺墟碑 - 遺蹟碑유적비)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 유적(遺蹟. 遺跡)
남아 있는 자취. 건축물이나 싸움터 또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나 패총, 고분 따위를 이른다.
△ 유허(遺墟)
오랜 세월에 쓸쓸하게 남아 있는 옛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