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 경주이씨(慶州李氏) - 1
■ < 18 > 경주이씨(慶州李氏) - 1
아래와 같이 경주이씨에 대한 글이 인터넷에 올라 있습니다.
여러 내용이 잘못 올라 있습니다.
잘못된 내용은 원문에 ▲*표를 하고 ⇒ 뒤에 바르게 고쳐 올립니다.
경주이씨는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에서 유래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원전 117년에 알평공이 하늘에서 신라의 영산(靈山) 중의 하나인 경주 서북에 있는 금강산(金剛山)의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다고 전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유리왕(儒理王) 9년 봄에 6부(部)의 이름을 고쳤는데, 양산부(楊山部)는 급량부(及梁部)(李氏)로,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崔氏)로,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孫氏)로, 우진부(于珍部)는 본피부(本彼部)(鄭氏)로,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裵氏)로,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薛氏)로 했다고 전한다.
이알평의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은 6촌의 하나였고, 알평(謁平)은 6촌의 부족사회를 영도하는 수장이었다.
경주이씨 대종보에 따르면, 그는 6부족의 촌장과 협의한 후 박혁거세를 왕위에 세우고, 벼슬은 아찬(阿粲)에 올라 군사업무를 맡아보았다.
그 후 유리왕 9년(기원전 32년), 신라 건국의 공을 인정받아 이씨(李氏) 성(姓)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법흥왕 23년에는 ▲*익호 ⇒ 시호(諡號)를 ▲*문선공(文宣公) ⇒ 충헌공(忠憲公)으로 하였고, 무열왕 3년엔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 문선공(文宣公)
- 문선공은 공자님의 시호입니다.
성인의 시호를 일반인들은 이를 함부로 쓸 수 없는데 어떻게 우리 경주이씨 시조이신 표암공에게 문선공이란 시호를 붙이게 된 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몇 군데 다른 카페에 문선공 대신에 충헌공이란 시호로 올라있어 이것이 바르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충헌공으로 대신해 봅니다.
▲*하지만 시조 이알평 이후 35대까지 세손이 전해 내려오지 않고, 신라 말에 들어와 소판(蘇判) 벼슬을 한 진골 출신 이거명(李居明. ▲*36대에 이르러 ⇒ 삭제. 중시조 1세로 하여 본관성씨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시조이후 중시조까지 ⇒ 시조 2세부터 중시조(소판공 이거명)의 父(부) 까지는 계대가 실전되어 몇 대(몇 세)인지 전연 알 수 없는데 36대라고 읽고 있는 것은 잘못된 계대이다.
계대 35대로 하여 1900년대 초에 처음 나타난 ‘36대로 된 실전세계’는 조사한바 사실적이지 않은 잘못된 계대로 경주이씨 중앙화수회에서도 참고로 할 뿐 실질적인 계대로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경주이씨는 ▲*고시조(古始祖) ⇒ 시조(始祖)를 이알평으로, 중시조(中始祖)를 이거명으로 삼고 있다.
경주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42만4866명으로, 이씨 중에서는 조선왕조를 개국한 전주이씨(260만9890명)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또한 본관별 성씨 순위에서도 경주김씨 다음으로 많은 5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경주이씨에서 수많은 이씨들이 분관되어 나감으로써 우리나라 이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경주이씨의 연혁과 분파
▲*경주이씨는 시조 이알평에서 부터 현재의 희(熙)자 돌림까지 75대를 내려오고 있다.
⇒ 경주이씨는 시조 이알평에서 부터 현재의 중시조 40세 희(熙)자 돌림까지 약 2000년은 되지만 계대로 75대는 아니다.
약 2000년이 70대인지 75대인지 80대인지는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씨족의 역사는 2000년이 넘는 셈이다.
하지만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소판공 이거명 이전까지 35대는 실전되어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설명대로 이거명 이전에도 이씨 성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진흥왕 이전에 세워진 신라의 비문들을 보면, 이씨(李氏) 성이 쓰여 있기보다는 마을 이름인 급량부와 이름만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급량부 ○○’ 이런 식인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장수왕, 신라의 진흥왕 때부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는 이알평에 대한 기록이 사실이라고 판단하긴 쉽지 않다.
▲*따라서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소판공 이거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 진흥왕 이전에는 성씨를 쓰지 않았다는 새로운 내용이 밝혀짐에 따라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소판공 이거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는 소견에는 신라 6성이 모두 시조를 달리해야 할 처지에 있어 좀 더 신중해야 한다.
이렇게 이거명이 중시조가 된 것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때 소판 벼슬을 지낸 이거명 이후의 세계(世系)를 적었기 때문이다.
경주 이씨에서 외래 본관 성씨를 제외한 수많은 본관들이 갈라져 나갔다.
이거명 이전에 분관된 성씨로 ▲*성주이씨(星州李氏) 등이 있으며 ⇒ 삭제. ▲*이거명 이후에 ⇒ 삭제. (시조 후손에서) 이구(李球)를 (분적)시조로 하는 우계이씨(羽溪李氏), 이위(李渭)를 (분적)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 이개(李開)를 (분적)시조로 하는 합천이씨, ▲*이거명의 6세손인 ⇒ 이거명의 5세손인 이주좌(李周佐)를 (분적)시조로 하는 아산이씨(牙山李氏), 이주복의 둘째 아들 이우칭(李禹偁)을 (분적)시조로 하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이거명의 15세손⇒ 이겨명의 14세손인 편(翩)의 아들 이임간(李林幹. 直幹직간)을 시조로 하는 장수이씨(長水李氏), ▲*이거명의 18대 ⇒ 중시조 18대(=18세) 이영재(李永梓. 永榟)와 이군재(李君梓. 君榟)를 시조로 하는 진주이씨(晉州李氏), ▲*이거명의 19세손 ⇒ 이거명의 18세손 반계(攀桂)를 시조로 하는 원주이씨(原州李氏)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