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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家族)과 친족(親族)에 대한 개념 - 3

녹전 이이록 2021. 12. 10. 08:45

가족(家族)과 친족(親族)에 대한 개념 - 3

- 고려시대의 가족과 친족 알아보기 | 작성자 jawkoh

 

좋은 내용이기에 복사하여 올립니다.

 

친족관계

 

1. 양측적(총계) 혈연의식 

 

고려에서 솔서혼이 보편적으로 행해지면서도 궁극의 거주처가 개인의 선택에 의해 다양하게 결정되고, 자녀간 균분상속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부계나 모계 등 특정한 혈연계통을 선별하여 중시하지 않고 통틀어 인식했기 때문이다.

인류학에서는 이러한 원리에 의해 조직된 친족관계를 양측적 친속 bilateral kindred’ 이라고 한다

이러한 원리는 성씨를 바꾸도록 한 명령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려인들도 아버지의 성씨를 따랐으므로 겉으로 보면 부계 의식이 작용한 듯 보인다.

그러나 국가에서 특정 성씨를 쓰지 못하게 하면서 내린 명령은 외가(外家)’의 성씨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먼저 외가의 성을 따르고 부모의 성씨가 같으면 조모나 외조모를 따르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성씨 변경은 조선후기는 물론 지금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외가의 성씨를 쓰게 하여 같은 성씨의 인물들을 다른 성씨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로부터 고려에는 부계 원리나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나 극히 미약했음을 판단할 수 있다.

고려인들은 성씨가 같다고 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성씨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질지라도 그것은 부자간의 단절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일 뿐 남성으로 이어지는 전체 계보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 외가의 성씨로 바꾸도록 한 것에서 모든 혈연 계통을 동등하게 인식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에서 후손조상이라는 개념은 모든 혈연 계통에 동등하게 적용되었다.

 

음서제(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을 받음)는 이러한 혈연의식을 잘 보여준다.

음서제도에 작용한 양측적(총계) 혈연의식은 아들이 없는 경우에 잘 드러난다.

 

예종(1105~1122)은 아들[直子]이 없으면 수양자(收養子)’ ()’에게 주도록 하였다.

예종이 음서 대상으로 지정한 은 친손자와 외손자를 포괄한다.

 

이후 인종(1123~1146)이 음서의 순서를 아들친손자와 외손자[內外孫]’로 결정한 이래 계속 내외손이 음서대상으로 명기되었다

국왕과 공신의 자손은 영구히 음서의 수여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1253(고종 40)의 왕명에는 태조의 후손으로 11(挾十一女)’까지 음서를 주라는 표현이 들어있다.

11라는 표현은 태조의 딸로부터 내리 11명의 여성으로 이어진 혈연계통을 뜻한다. 1282(충렬왕 8)에는 20까지 확장되었다.

 

이로부터 기준 인으로 부터 이어 내려가는 모든 혈연계통을 후손조상으로 여기는 인식방법을 도출할 수 있다.

피가 통하면 모두 후손이고 조상인 것이다.

 

음서규정은 조선은 물론 현재와도 판이한 후손조상에 대한 인식방법을 잘 보여준다.

고려 시기의 통념상 조상증조고조가 아니라 부모부모부모였고, ‘후손증손 현손이 아니라 자녀자녀자녀였다.

 

2. 사촌 범위의 방사형 친족구조 

 

고려의 음서제도나 근친혼 금지규정은 양측적(총계) 혈연의식을 잘 보여준다.

혈연을 포괄적으로 존중했으므로 친족조직 역시 특정 혈연계통에 집중되지 않고 방사형으로 뻗어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친족의 구체적인 형태와 범위는 혈연 이외의 요소가 크게 작용하여 결정되었다.

 

동성 5촌과 남처럼 지내면서 이성 5촌과의 혈연관계를 강하게 인식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도 혈연에 근거하여 일정 범위 내의 혈족 전원이 당위적으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친족관계가 있었다.

그 관계는 4촌을 한계로 동심원을 그렸다.

이러한 친족관계는 고려의 오복제와 상피제에 반영되어 있다.

 

오복제는 고대 중국에서 성립한 것으로 전근대 중국의 친족조직 나아가 조선후기 이래 한국 친족조직의 전형이 되었다.

오복제는 망자에 대한 애도의 의무를 매개로 친족의 범위와 상호간의 친밀도를 규정한 것이다.

 

친족범위와 친밀도는 상복의 유무와 등급, 슬픔의 지속기간으로 표시하였다.

 

상복은 슬픔이 큰 순서대로 참최 3, 자최 1, 대공 9, 소공 5, 시마 3월의 다섯 등급이 설정되었다.

이 다섯 등급의 복제가 적용되는 범위를 유복친(有服親)’이라고 하여 친족으로 인정하고, 복제가 적용되지 않으면 친함이 다했다[親盡]’고 하여 친족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오복제에서 유복친의 전체 범위를 남성을 기준으로 그려보면 고조부를 공동조상으로 하는 부계친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고종사촌이나 생질 등 일부 비부계친이 고립된 섬처럼 산재한다.

 

이처럼 유복친의 구성이 부계로 편중될 뿐 아니라 슬픔의 등급도 부계 여부에 따라 달리 규정되었다.

조부의 상에는 자최 1년복을 입고 외조부의 상에는 소공 5월복을 입어 혈연거리가 같더라도 부계와 비부계에 현격한 차이를 두었다

 

오복제는 985(성종 4)에 처음 고려에 도입되었다.

그런데 도입할 당시부터 소공 5월인 외조의 등급을 두 단계 올려 친조부와 동일하게 자최 1년복을 입게 하였다.

이 규정으로부터 4촌 범위의 친족관계를 도출할 수 있다.

외조부의 복제를 조부와 동일한 등급으로 올린 것은 고려인들이 조부와 외조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등급을 달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조부와 외조부를 동일하게 여겼다면 그들의 내외손으로 구성된 친족, 즉 사촌간의 친밀도도 동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촌을 경계로 권리의무를 공유하는 친족범위는 상피제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상피제도 중국에서 성립한 것으로 아버지가 감찰기관에 재직하면 아들을 피감 기관에 재직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하여 상피제는 실제 친족관계와 친족의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중국의 경우 오복제가 적용되는 친족 전체가 상피 범위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고려 상피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4촌을 한계로 하면서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으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었다.

 

이렇듯 친고종이종 4촌이 상피제의 경계를 이룬 것은 이 범위가 일상에서 권리 의무관계를 공유하는 핵심 친족이었음을 알려준다.

당시의 통념에 따르면 4촌 이내의 혈족은 사정에 얽매어 공무를 저버릴 위험이 컸기에 국가에서 이들의 관직 분포를 제한한 것이다.

 

그리고 5촌부터는 사정이 개입되더라도 불규칙할뿐더러 혈연 이외의 요소가 함께 작용할 가능성이 크기에 상피제를 적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상피제에 근거하여도 모든 혈연을 포괄하는 동항렬 사촌 범위의 친족관계가 도출된다

 

조선의 세종은 외조부와 장인의 상복 등급을 높인 고려의 오복제를 폐기하고 중국에서 유래한 그대로의 오복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외조부와 장인의 상에 주는 휴가 기간은 조부와 동일하게 1개월이었다.

또한 상피의 범위도 고려와 동일하게 규정하였다.

외면으로는 중국의 예법을 존중하였지만 일상생활과 내면의 정서는 이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