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국당공파 인물
■ 경주이씨 국당공파 인물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고려 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배출하면서 삼한(三韓)의 명족(名族)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고려 말에 생존했던 *17~21세조 ⇒ 15 ~ 19세. 14~18세조의 조상을 파조(派祖)로 하여 14개 파로 나누어진다.
17세조 ⇒ 중시조 16세인 이인정을 파조로 한 그 후손이 평리공파(評理公派), 이관(李琯)을 파시조로 한 그 후손이 이암공파(怡庵公派), 이제현(李齊賢)을 파시조로한 그 후손이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지정(李之正을 파시조로한 그 후손이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천을 파시조로 한 그 후손을 국당공파(菊堂公派), 이매(李邁)를 파시조로 한 그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이과를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 이조(李蓨蓚)를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사인공파(舍人公派)로 나누어진다.
중조 15세인 이강(李康+羽)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이고 중시조 16세인 이지수(李之秀)를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중시조 19세인 이양오(李養吾)를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직장공파(直長公派), 이존오(李存吾)를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존중(李存中)을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이존사(李存斯)를 파시조로 한 그의 후손이 교감공파(校勘公派)이다.
이 14대파(大派) 아래에서 70여 개의 소파(小派)로 다시 나누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융성하기는 상서공파(尙書公派)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이른바 <8별(鼈)집>, 그리고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국당(菊堂) 이천(李蒨)은 충렬왕 25년 성균시(成均試)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ㆍ밀직사사(密直司事)ㆍ삼중대광첨의정승(三重大匡僉議政丞)ㆍ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하고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이르렀다.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뒤 효종ㆍ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李浣)대장이 가장 걸출하다.
“군산(群山)을 삭평턴들 동정호(洞定湖) 넓을랏다.”하는 시조 한 수가 <뜻을 두고도 못 이룬> 한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는데, 조선조에서 무인(武人)으로 재상에 오른 사람은 7명 뿐이다.
국당공(菊堂公)의 파조인 국당공(菊堂公) 이천은 아들이 4형제(경중(敬中)ㆍ배중(培中)ㆍ달충(達衷)ㆍ성중(誠中))였는데 그 중 성중(誠中)이 조선원종개국공신이 되어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냈다. 그의 6대손이 바로 이완(李浣)이다.
이완(李浣)은 인조 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인조 21년 경기도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임하였다. 효종이 송시열(宋時烈) 등과 북벌(北伐)을 계획하자 효종 3년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발탁되고, 다음 해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되어 신무기(新武器)의 제조(製造), 성곽(城郭)의 개수(改修)ㆍ신축(新築) 등으로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훈련대장(訓練大將)에 재임되었으나 1659년 효종이 죽어 북벌(北伐)계획이 중지되었다. 1673년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완(李浣)의 아버지 이수일(李守一) 역시 이름난 무장으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세 차례나 역임하면서 여진(女眞) 토벌에 공이 많았다.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부원수로 도원수 장만(張晩)과 함께 서울 길마재(안현(鞍峴)) 전투에서 반군을 격파한 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국당(菊堂)의 맏아들 경중(敬中)(고려ㆍ판병부사(判兵部事))의 후손에서는 손자 정보가 세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올랐고 정보의 후손에서 이정암(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ㆍ이정형(李廷馨)(선조조ㆍ대사간(大司諫))형제가 명신으로 꼽혔다. 정암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의 동생 이정형(李廷馨)은 성리학의 대가로 형과 함께 임란(壬亂)에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이조참판(吏曹參判)ㆍ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지퇴당집(知退堂集)’ 등의 저서가 남아 전한다.
파명록
평리공파(評理公派)ㆍ이암공파(怡庵公派)ㆍ익재공파(益齋公派)ㆍ국당공파(菊堂公派)ㆍ부정공파(副正公派)ㆍ상서공파(尙書公派)ㆍ사인공파(舍人公派)ㆍ판전공파(判典公派)ㆍ월성군파(月城君派)ㆍ직장공파(直長公派)ㆍ석탄공파(石灘公派)ㆍ진사공파(進士公派)ㆍ교감공파(校勘公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