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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 남파 대사

녹전 이이록 2021. 9. 13. 08:43

고승 남파 대사

 

속성은 월성이씨. 휘는 화묵, 자는 백은, 호는 남파로 조선조 영조 경신년에 경북 장기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는 허씨이다.

 

화엄경 십지론의 대조종으로 소시에 승과에 급제하여 대선이 제수되고, 그 후에 대사에 이르러 밀양 표충사 수호도총섭을 지내고 만년에 향리인 석남사에 돌아와 체류하다가 순조 정축년에 세상을 뜨니 향년 78세로 입적하였다.

 

포항시 남구 장기면 방산2리 묘봉산 자락에 있는 석남사지(石南寺址)에는 옛 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으니, 이곳이 천하의 명당이라 장기의 한 토호(土豪)가 이 마을의 촌부(村夫)에게 부탁하여 그곳에 자기 조상의 묘를 쓰기 위하여 불을 지르도록 하니 이 절이 불에 타 없어지게 되고 그 촌부는 돈을 받고 도망가던 중 호환(虎患)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고, 이 절이 얼마나 컸으면 스님들의 공양미 씻은 물이 장기 천변까지 흘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의 주지로 있던 남파 대사의 속성은 월성이씨(月城李氏), ()는 화묵(華默), ()는 자은(自隱), ()는 남파(南坡)로 조선조 영조 경신년(庚申年)에 장기(長䰇)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는 허()씨이다.

 

화엄경 십지론의 대조종으로 소시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대선이 제수되고, 그 후에 대사에 이르러 밀양 표충사수호도총섭(密陽表忠祠守護都摠攝)을 지내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사비(寺碑)에 의하면 1042(고려 정종 8) 화엄종의 승려인 탐밀(探密)과 굉확(宏廓)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그 규모는 240여 칸에 달했고, 1761(조선영조 37)에 화재로 불타자 남파(南坡), 향악(香岳) 두 대사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만년에 향리인 석남사(石南寺)에 돌아와 체류하다가 순조(純祖) 정축년(丁丑年)에 세상을 뜨니 향년 78세로 입적(入寂)하였다.

 

남파대사의 비석 내용을 짓고 쓰신 분은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을 날린 계오(戒俉)라는 스님이다.

 

인명 대사전에 나와 있는 계오(戒俉) 스님의 내용은 : 1773(영조 49) 1849(헌종 15) 조선의 승려, 호는 월하(月荷), 성은 권(), 자는 붕거(鵬擧), 안동(安東)출생, 11세에 승려가 되고 우기(祐祈)의 법을 계승, 침허법사(枕虛法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계율(戒律)을 엄히 지키고 명리(名利)를 탐내지 않았고,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 났으나 60세가 지나서는 글 짓는 일이 정업(淨業)에 방해가 된다 하여 이를 중지하고 염송(念誦)에만 전심하다가 가지산(伽智山) 연등정사(燃燈精舍)에서 사망하였다.

 

경북매일

 

조선시대 선(() 양종을 이끌었던 인물로서 승병의 최고 책임자인 수호도총섭(守護都總攝)을 지낸 남파 대사(南坡大師· 1740~1817). 포항시 남구 장기면 묘봉산 자락에 있는 옛 절터 석남사지(石南寺址)에 위치한 그의 비석이 보관된 비각의 문살이 심하게 훼손되고 있어 시 차원의 적극적인 보호·관리가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 비각은 자라난 대나무 수풀 속에 방치돼 있어 관리 보호가 시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남파대사 비는 포항 장기 출신의 조선 중기의 고승 남파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남파대사가 입적한 다음 해인 1818년에 건립된 이 비석은 높이 170, 80의 화강암 비석으로, 조선 시대 명필로 이름을 날린 승려 계오가 비문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폐허가 된 절터 잡초 속에 방치되다시피 해 마멸이 심하게 진행된 것을 200511월 포항시에서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남파대사는 조선 영조 경신년(1740) 장기에서 태어나 순조 정축년(1817)에 향리인 장기 석남사에서 입적(향년 78)한 조선조 때 고승이다.

 

이름은 화묵(華默), 자는 자은(自隱)이라고 했으며 남파는 호().

 

속성은 이() 씨로 12세 때 삭발, 용계(龍溪) 대사로부터 계()를 받았다.

 

화엄경 십지론의 대조종으로 승과에 합격한 후 나중 대선과 대사에 올랐으며, 밀양 표충사 수호도총섭(守護都總攝)을 지냈다.

 

특히 조선조 때 번창한 선(() 양종의 맥이 보광대사로부터 시작해 회당대사 서악대사 용계대사 남파대사로 이어졌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남파 대사는 조선조 때 선교 양종을 두루 섭렵한 화엄경의 조종으로 일컬어질 정도의 고승이었다.

 

그런 만큼 남파대사비는 대사의 유일한 옛 비석이라는 점과 함께 비문의 글씨 또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