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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성군(鷄城君)이란 무엇인가요?

녹전 이이록 2021. 5. 22. 09:25

계성군(鷄城君)이란 무엇인가요?

 

daum T!P에 아래와 같은 문답입니다.

 

경절공 이래 선생은 계림군에 봉작되었다하는데 계림군은 무엇이며, 경절공은 시호이고 계성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엇인가요?

 

답변)

 

예천

*경절공 이래님? 경절공(휘 래) 조상님은 종손으로 불천위(종가집)에 해당됩니다.

2품 이상의 종친과 공신에게 봉군되는데요.

경주이씨 중에는 봉군칭호를 받으신 분이 56분정도입니다.

오성부원군 이항복은 잘 알려진 군호를 받으신 분입니다.

경주이씨 중에는 8분이 정승을 지내셨고 3분이 대제학을 지내셨습니다.

도움이 되시고 답변에 참고한 다음 바로가기를 보시고 더 궁금하신 부분을 해소하시기 바랍니다.

 

참조)

경주이씨 벌열 3 http://blog.daum.net/lrrock5050/109

 

이이록

 

조선왕조실록[태종 32, 16(1416 병신/명 영락(永樂) 14) 1012(경오) 3번 기사

 

계성군 이래 졸기(雞城君李來卒記)

-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가 졸()하였다.

이래(李來)의 옛 이름은 래(, 위로할 래), ()는 낙보(樂甫)인데, 경주(慶州) 사람이다.

 

- 먼저 경절공(景節公) 이래(李來) 조상님의 행적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362(공민왕 12) ~ 1416(태종 16).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초명은 (),  자는 낙보(樂甫).  소명(小名)은 안국(安國)이다.

아버지는 우정언(右正言)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이며, 우현보(禹玄寶)의 문인이다.

 

1371(공민왕 20) 아버지 존오가 신돈(辛旽)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어 울화병으로 죽고, 이어 신돈이 처형되자, 아버지 존오가 신원(伸寃)되어 증 도승지(贈都承旨)에 추증되므로 10세의 어린 나이로 전객녹사(典客綠事) 특임되고 1383(우왕 9)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때 *우 사의대부(右司議大夫)  올랐다

 

1392(공양왕 4) 정몽주의 일당으로 몰려 계림(鷄林- 경주)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서 공주에 은거하였다.

 

1399(정종 1) 좌간의대부가 되고 이듬해 1400 방간(芳幹) (박포의 난)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추충 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2등에 책록 되었고 곧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고, 계림군(鷄林君) 책봉되었다.

 

1402(태종 2) 첨서승추부사(僉書承樞府事)가 되었다가 그해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404 정조사(正朝使) 명나라에 다녀온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되었고 1407년에 경연관을 거쳐 세자의 스승인 좌빈객(左賓客)을 지냈으며이듬해에 지의정부사  판경승부사에 이르렀다

태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계림군(鷄林君)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듬해 1400 방간(芳幹)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추층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곧 좌군동지총제가 되었고, 계림군(鷄林君) 책봉되었다.] 라고 하였으니 본향이 계림(鷄林- 경주)이니 계림군(鷄林君)에 봉군(封君)된 것입니다.

 

계성군(鷄城君)에 대한 기록으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부(師傅)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였는데 양녕에게 엄격했다.

그래서 양녕이 선생 이래를 마치 원수같이 여겨 이래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산란하다. 꿈속에서라도 이래가 보이면 그 날은 반드시 감기가 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2) 김동인 저서 몽상록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계성군(鷄城君)은 동궁시강원(東宮侍講院)의 빈객(賓客- 벼슬이름. 2)으로써 동궁께 왕자의 도를 시강하기 위하여 늘 춘방(春坊)에 오는 곳이다.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이씨 조(李氏祖)까지 내려와서 박포(朴苞)의 난리에 공을 세워서 봉군(封君)되었으니 이가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이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리는 최고의 품계로 군()은 조선 시대 종실(宗室), 외척(外戚), 공신(功臣)에게 준 작호(爵號)입니다.

 

1)에서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의 사부가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로 기술하고 2)의 내용에서 시강원 빈객의 글에서 박포의 난에 공을 세워서 계성군(鷄城君)에 봉군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포의 난리’, ‘방간의 난이니 이 난에 공을 세웠다는 것은 계성군(鷄城君)이 아닌 계림군(鷄林君)에 봉군된 것이 바릅니다..

아마 양녕의 사부 계성군(鷄城君)과 시강원 빈객의 글에서 박포의 난에 공을 세워 계성군(鷄城君)이 되었다는 기술은 계림군(鷄林君)의 오타로 보여 집니다.

 

경절공 이래(李來)의 봉군명(封君名)계림군(鷄林君)이 바를 것 같습니다.

족보 행적 기록에는 [官至正憲大夫兵曹判書藝文館大提學集賢殿大提學兼世子左賓客鷄城府院君(계성부원군)하다. (관지 정헌대부 병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집현전대제학 겸 세자좌빈객 계성부원군하다.) ]

 

()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리는 최고의 품계로 군()은 조선 시대 종실(宗室), 외척(外戚), 공신(功臣)에게 준 작호(爵號)입니다.

작호(爵號)인 군()은 조선 시대에도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왕위의 안전 및 왕권의 확립을 위해 종친· 외척과 근친 및 공신을 우대하여 그들에게 명예와 실리(實利)를 부여하여 공(), (), ()의 작호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1401(태종 1)에 공· · 백의 작호를 폐지하고, 종친의 공()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 백 등의 공신들을 부원군(府院君() 등으로 개봉함으로써 군이 작호로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1417(태종 17)에는 왕비의 부친 및 공신들에게만 봉군(封君)하기로 규정하고 경국대전에 확정했습니다.

 

조선시대 종실(宗室외척(外戚공신(功臣)에게 준 작호(爵號)이다.
조선시대에도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왕위의 안전 및 왕권의 확립을 위해 종친· 외척과 근친 및 공신을 우대하여 그들에게 명예와 실리(實利)를 부여하여 공((()의 작호를 주었다.

 

그러나 1401(태종 1)에 공· · 백의 작호를 폐지하고, 종친의 공()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 백 등의 공신들을 부원군(府院君() 등으로 개봉함으로써 군이 작호로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1417(태종 17)에는 왕비의 부친 및 공신들에게만 봉군(封君)하기로 규정하고 경국대전에 확정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적출(嫡出)의 왕자는 대군(大君: 無階), 그의 배우자는 부부인(府夫人: 正一品), 서출(庶出)의 왕자는 군(: 無階), 그의 배우자는 군부인(郡夫人: ·從一品), 왕세자의 적출은 군(: 正二品), 그의 배우자는 현부인(縣夫人: 正二品), 왕세자의 서출은 군(: 從二品), 그의 배우자는 현부인(縣夫人: 從二品)으로 하였다.

 

종친 1품은 군(), 그의 배우자는 군부인(郡夫人: 從一品), 2품 또한 군(), 그의 배우자는 현부인(縣夫人: ·從二品)으로 하였으며, 왕비의 부친은 부원군(府院君: 正一品), 그의 배우자는 부부인(府夫人: 正一品)으로 하였다.

 

다음 친공신(親功臣)으로는 부원군(府院君: 正一品), 그의 배우자는 정경부인(貞敬夫人: 正一品), (: 從一品), 그의 배우자는 정경부인(貞敬夫人: 從一品), (: ·從二品), 그의 배우자는 정부인(貞夫人: ·從二品) 등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