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慶州李氏)에 대(對)하여 – 1
■ 경주이씨(慶州李氏)에 대(對)하여 – 1
– 네이버 지식 검색에서 펌한 자료입니다.
잘못된 내용이 곳곳에서 발견되어 원문에 *표시로 지적하고 ⇒ 뒤에 바르게 수정하였습니다.
1. 시조 : 이알평(李謁平)
2. 유래
시조(始祖)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은 박혁거세(朴赫居世) 탄생(誕生) 설화(說話)에 나오는 초기(初期) 신라(新羅)의 6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 급량부)의 촌장이다.
이알평(李謁平)은 신라(新羅)의 좌명공신(左命功臣)으로 <경주이씨 대종보>에 의하면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王)이 된 뒤 아찬(阿粲- 6두품. 6-9 관위 중 6관위)에 올라 군사업무를 장악 했으며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양산촌 이씨를 ⇒ 급량부 이씨로 성을 하사 ⇒ 사성(賜姓) 받았다고 한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23년 *익호(謚號) ⇒ 시호(諡號)를 문선공(文宣公) ⇒ 충헌공(忠憲公)으로 하였고 무열왕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소견)
'문선공(文宣公)'에 대하여
- 문선공(文宣公)은 성인인 공자님의 시호입니다.
원 성종 11년(대덕大德 11년, 1307년)에 대성지성 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부터 성인이나 황제. 왕의 휘호는 避諱(피휘)하여 같은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존중받아야 할 대상의 이름을 함부로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때에 따라서는 글자뿐만 아니라 음이 비슷한 글자를 모두 피하거나 획의 일부를 생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공자의 시호인 文宣(문선)을 우리 시조님께 ‘문선’이라 함은 어떤 착오에서 빚어진 일로 보입니다.
몇 군데에서 문선공(文宣公)이 아닌 충헌공(忠憲公)으로 나타낸 곳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문선공(文宣公)이 아닌 충헌공(忠憲公) 시호가 바를 것으로 생각합니다. -
그러나 그 후의 후손(後孫)에 대한 계대(繼代)가 전(傳)해지지 않아 이알평(李謁平)의 *35세손(世孫)이며 ⇒ 원대손(遠代孫)이며 신라(新羅)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出身)인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로 하고 *1세조 ⇒ 1세로 기세하고 있다.
3. 가문의 번영
경주이씨는 고려(高麗) 말(末)에 크게 세력(勢力)을 떨쳤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도 문과(文科) 급제자 178명,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다.
*8대파 ⇒ 14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세칭 ‘8별(鼈)집’의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집으로 불리는 익재공파와 *매죽헌(梅竹軒)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 문형 가운데 *백사집에서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명,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고려(高麗) 말(末)의 대학자(大學者)이자 외교가(外交家), 문장가(文章家), 충신(忠臣)이기도 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고려(高麗) 때의 경주(慶州) 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忠宣王) ⇒ 충렬왕(忠烈王)부터 공민왕(恭愍王)까지 *다섯 임금 ⇒ 일곱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文章家)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卓越)한 외교가(外交家)였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8형제(兄弟)가 모두 문장(文章)에 뛰어나 8문장(文章)으로 꼽히는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린(李公麟)의 아들들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지자 유성룡을 도와 병참 책임을 맡는 등 큰 활약을 한 이시발(李時發)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 전후 정승에 올라 당쟁 을 막는데 힘쓴 조선시대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청백리에 올랐다.
근대 인물로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과 재계의 거목이었던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이 있다.
- 이명박 대통령. 이회영(독립운동가. 신흥 무관학교). 이상설
4.계파
중시조는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이다.
경주(慶州)이씨는 중시조 이거명의 *17~21세 ⇒ (15세 ~ 21세에서 크게 14대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크고 작은 70여개 파로 ⇒ 중소 80여개 파로 분파된다.
-평리공파(評理公派) : 16세 이인정(李仁珽)을 파조로 한다
-이암공파(怡庵公派) : 17세 이관(李琯)을 파조로 한다.
-익재공파(益齋公派) : 17세 이제현(李齊賢)을 파조로 한다.
-호군공파(護軍公派) : 17세 이지정(李之正)을 파조로 한다.
-국당공파(菊堂公派) : 17세 이천(李蒨)을 파조로 한다.
-부정공파(副正公派) : 17세 이매(李邁)를 파조로 한다.
-상서공파(尙書公派) : 17세 이과(李薖)를 파조로 한다.
-사인공파(舍人公派) : 17세 이수(李蓚) ⇒ 이조(李蓨)를 파조로 한다.
-판전공파(判典公派) : 15세 이강(李康+羽)을 파조로 한다.
-월성군파(月城君派) : 21세 이지수(李之秀)를 파조로 한다.
-직장공파(直長公派) : 19세 이양오(李養吾)를 파조로 한다.
-석탄공파(石灘公派) : 19세 이존오(李存吾)를 파조로 한다.
-진사공파(進士公派) : 19세 이양중(李養中) ⇒ 이존중(李存中)을 파조로 한다.
-교감공파(校勘公派) : 19세 이존사(李存斯)를 파조로 한다.
5. 항렬표
67세 鏞 - *鎰(일) - 누락
5-1 경주이씨 항렬제차(慶州李氏 行列第次)
67세 : 鏞(큰 쇠북용) 누락 *鎰(중량 일)
*시조(70세), 중시조(35세) 영(榮)
71세 ⇒ 삭제, 36세 규(圭)
72세 ⇒ 삭제, 37세 종(鍾)
73세 ⇒ 삭제, 38세 우(雨)
74세 ⇒ 삭제, 39세 상(相)
75세 ⇒ 삭제, 40세 희(熙). 형(炯)
76세 ⇒ 삭제, 41세 재(在)
77세 ⇒ 삭제, 42세 호(鎬). 건(鍵)
78세 ⇒ 삭제, 43세 제(濟). 준(濬)
79세 ⇒ 삭제, 44세 동(東)
80세 ⇒ 삭제, 45세 심(心). 병(丙)
81세 ⇒ 삭제, 46세 교(敎). 세(世)
*위 시조세수 70세 ~ 81세는 모두 삭제하여야 합니다.
시조 子부터 중시조의 父까지 약 900년의 계대는 전연 알려진 바가 없는 실전세계로 계대를 알지 못하는데 시조세수를 읽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려 말경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찬(贊)한 익재공(휘 제현)의 묘지명(墓誌銘)에서 시조 이후에 이거명(李居明)이 최초의 경주 이씨로 밝혀져 중시조로 모시고 1세(=1대)로 기세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 경주이씨 대동항렬을 최초로 만든 시기
1865년경 고종황제 초기 흥선대원군께서 섭정을 하고 계실 때 전국에 왕명으로 各(각) 性氏(성씨) 들은 各己(각기) 行列字(항렬자)를 이에 따라 작명하고 長派(장파)의 항렬자를 따라 統一(통일)해서 性名(성명)만 보더라도 그貫鄕(관향)과 항렬을 단번에 알아보고 서로敦睦(돈목)하고 위아래 次序(차서)를 混同(혼동)해서 망발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