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이(李)씨의 본관/관향과 시조 – 4
■ 우리나라 이(李)씨의 본관/관향과 시조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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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송(靑松)이씨
시조는 이덕부(李德富).
부정(副正)을 지냈으며 성주(星州)에 세거하였다고 한다.
그의 5세손 ⇒ 5세. 5세^ 손. 4세손. 이우(李祐)가 청송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1269(l985).
◈ 청안(淸安)이씨
시조를 달리하는 2파가 있다.
충원공파(忠元公派)의 시조는 이양길(李陽吉)로 1 356년(공민왕 5) 가을적홀고탁란(加乙赤忽古托亂) 때 순절, 1등훈에 녹훈되고 청안군에 봉해졌다.
또 다른 계통인 충간공파(忠簡公派)는 이한번(李漢藩)을 시조로 한다.
그는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한림학사와 영광군사(靈光郡事)를 거쳐 국사원 검열관을 지낸 뒤 58년 홍건적을 막은 공으로 청안군에 봉해졌다.
인구수 1만 2801(1985).
◈ 청주(淸州)이씨
시조는 이능희(李能希).
고려 개국공신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 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에 올랐다.
10세손 ⇒ 10세. 10세^ 손. 9세손 이계감이 낭성군에 봉해졌고 12세손 ⇒ 12세. 12세^ 손. 11세손 이애가 좌명공신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상당은 지금의 청주)에 봉해져 후손들이 청주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청주이씨 족보》에 보면 이능희 이후에 본관을 청주로 정하였다고 전해진다.
인구수 2만 8968(1985).
◈ 청해(靑海)이씨
시조는 이지란(李之蘭).
본래 원나라 사람으로 1371년(공민왕 20) 고려에 귀화하면서 개명하였다.
그 뒤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청해백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은 본래의 고향인 중국 칭하이성〔靑海省〕을 연유로 하여 본관을 청해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인구수 1만 12(1985).
◈ 초산(楚山)이씨
중시조는 이허 이헌(李憲).
고려 공민왕 때 춘방시학사(春坊侍學士)를 지냈다.
이헌을 시조라고도 한다.
고려가 망하자 초산(井州의 옛이름)으로 낙향, 스스로 산림거사라 하고 여생을 보냈다.
전국인구조사에서 그 통계가 나와 있지 않으나 초산이씨 문중에서 1975년 보첩을 발간하였다.
◈ 충주(忠州)이씨
시조는 이관(李墳).
고려시대 평장사를 지냈다.
나라에 공을 세워 충주백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충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인구수 3215(1985).
◈ 태안(泰安)이씨
시조는 이기(李奇).
중국 당나라 때의 이승남(李昇南)의 후손으로 고려 광종 때 난을 피해 동래하여, 태안에 들어와 세거하게 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
그 뒤 7세손 ⇒ 7세. 7세^ 손. 6세손 이천이 태안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태안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3464(1985).
◈ 태원(太原)이씨
시조는 이귀지(李貴芝).
고려 충렬왕 때 중국의 타이위안〔太原〕에서 난을 피해 동래(東來)하였다.
손자 이방무(李芳茂)는 조선조 개국원종공신으로 벼슬이 사정(司正)에 이르렀다.
조선 때 후손들이 북청(北靑)에 정착하면서 타이위안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536(l985).
◈ 통진(通津)이씨
시조는 이인(李仁).
조선시대 수의부위참판(修義副尉參判) 등을 지냈고, 통진에서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이거한 뒤 통진을 관향으로 삼았다.
인구수 147(1985).
◈ 평산(平山)이씨
시조는 이부명(李敷明).
그 뒤의 세계를 실전, 그의 후손인 고려시대에 밀직부사를 지낸 이자용(李子庸)을 기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으며, 선조들의 세거지인 평산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인구수 2929(1985).
◈ 평양(平壤)이씨
시조는 이극문(李克文).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인구수 242(1985).
◈ 평창(平昌)이씨
시조는 이광(李匡).
1126년(고려 인종 4)에 태어나 의종 때 추밀원부사 동북면도순문사평장사(樞密院府事東北面都巡問使平章事)를 거쳐 광록대부 태사(光祿大夫太師)에 이르렀고 백조군(白鳥君; 백조는 평창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 뒤 8세손 ⇒ 8세. 8세^ 손. 7세손 이천기(李天驥)가 공민왕 때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러 많은 공훈을 세워 평창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평창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5만 5487(1985).
◈ 하빈(河濱)이씨
시조는 이거.
고려시대에 예부상서에 올랐다.
1174년(명종 4)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기병하여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 등을 평정할 때 낭장으로 동북로도지휘사 최균(崔均)을 따르다가 서경유수군(西京留守軍)을 받아들여 정이지당(鄭李之黨)을 토평하여 그 공으로 하빈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빈(경상북도 달성군에 있던 지명)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1만 2627(1985).
◈ 하음(河陰)이씨
강화(江華)이씨의 한 지파로써 여주(驪州)이씨로 통일.
시조는 이영(李英).
내시정용낭장을 지냈다는 것 외에 세계나 사적(事蹟)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1930년 국세조사에 충북 영동군(永同郡) 양강(楊江)에 25가구가 살고 있다고 나타나 있다.
인구수 811(1985).
◈ 학성(鶴城)이씨
시조는 이예(李藝).
울주군기관(蔚州郡記官; 울주는 학성의 다른 이름)으로 출사하여 24세 때 군수 이은(李殷)과 함께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는데 이은을 극진히 공대하니 일본인이 예절에 감복하여 같이 돌려 보냈다.
왕이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예빈소윤 좌군사직(禮賓少尹左軍司直)을 제수하였다.
일본과의 외교관계의 확립에 큰 업적을 남겼고, 병기의 발명에도 힘써 완구포 등의 제작은 유명하다.
그 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학성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인구수 1만 8869(1985).
◈ 한산(韓山)이씨
시조를 달리하는 2계로 나뉜다.
고려 충숙왕 때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 한림 국사원검열(翰林國史院檢閱)을 지냈고 충목왕 때 귀국, 정당문학(正堂文學)과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라 한산군에 봉해진 이곡(李穀)의 5대조인 이윤경(李允卿)을 시조로 하는 호장공계(戶長公系)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고려 충렬왕 때 광정대부 도첨의 참리상호군 검교대장군(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護軍檢校大將軍)에 오르고 역시 한주군에 봉해진 이무(李茂)의 3대로 이윤우(李允佑)를 시조로 하는 권지공계(權知公系)이다.
인구수 11만 9174(1985).
◈ 함안(咸安)이씨
시조는 이상(李尙).
고려 고종 때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파산군(巴山君; 파산은 지금의 함안)에 봉해졌다.
《을축보(乙丑譜)》에 그의 선계 등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고, 범례 편에 파산군이 처음으로 봉작되었으므로 그를 시조로 한다는 내용만 적혀 있다.
따라서 후손들이 함안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인구수 3만 1938(1985).
◈ 함양(咸陽)이씨
시조는 이홍(李洪).
조선 때 호군(護軍)을 지냈다.
세계를 알 수 있는 문헌은 없다.
인구수 710(1985).
◈ 함평(咸平)이씨
시조는 이언(李彦).
고려 태조 때 신무위 대장군(神武衛大將軍)을 지냈고 함풍군(咸豊君; 함풍은 함평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 뒤 5세손 ⇒ 5세. 5세^ 손. 4세손 이림(李琳)은 고려시대 검교 흥위위대장군(檢校興威衛大將軍)을 지낸 이순지(李順之)의 큰 아들로 신종 때 태어나 문과에 급제, 상의원직장동정(尙衣院直長同正)을 지냈는데, 그 뒤 후손들이 크게 번성, 함평이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순지의 둘째 아들 이광봉(李光逢)은 충숙왕 때 함풍부원군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일파를 이루고 있다.
인구수 10만 3696(1985).
◈ 합천이씨
시조는 이개(李開).
신라에서 벼슬하여 강양군(江陽君; 강양은 합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고 고려가 건국되자 절의를 지켜 태조의 부름을 거역, 가수현장(嘉樹縣長)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합천호장으로 옮겼다.
《문충공 사적기(文忠公事蹟記)》에 보면 그는 최치원(崔致遠)의 문인으로 유학의 진흥에 힘써 그 공으로 강양군에 봉해졌으며 박경엽(朴敬燁)의 난을 토평, 다시 문학을 진흥시켜 중국에 버금가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는 이알평의 후손으로, 따라서 합천이씨는 경주이씨에서 분적된 성이다.
이개가 합천호장을 지냈고 그곳에서 죽은 것을 연유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여 합천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하고 있다.
인구수 9만 8595(1985).
◈ 해남(海南)이씨
시조는 이지형(李之亨).
고려시대에 태자소경(太子少卿)을 지냈다고 한다.
선계는 실전되어 알 수 없고 다만 후손들이 해남에 세거하며 본관을 해남으로, 그를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859(1985).
◈ 해주(海州)이씨
시조는 이선 (李璿).
조선시대에 참봉을 지낸 뒤 해주에 정착, 세거의 터를 마련함으로써 후손들이 관향을 해주로 삼게 되었다.
그의 선계는 덕수이씨로 조선시대에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의 큰 아들이다.
인구수 2164(1985).
◈ 홍주(洪州-安平)이씨
시조는 이유성(李維城).
고려시대 인물로 서경부유수를 거쳐 정당문학· 찬성사에 올랐다.
그 뒤의 계보는 병화 등 여러 사정으로 인멸되었다.
선계의 실전으로, 본관을 정하기는 9세손 ⇒ 9세. 9세^ 손. 8세손인 이기종(李起宗)이 홍양부원군으로 봉해진 것이 연유가 된다.
후손 중에 일부는 호적상의 본관이 안평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는 중간에서 호적상 오기임이 입증되어 그중 대부분은 홍주로 정정하였고, 잔여 종인(宗人)들도 현재 정정 중에 있다.
인구수 1만 3358(1985).
◈ 화산(花山)이씨
시조는 이용상(李龍祥).
안남왕(安南王) 이용한(李龍翰)의 아우로 나라가 망할 것을 예견하여 고려 고종 때 옹진(甕津)의 화산에 망명, 정착하였다.
인구수 1131(1985).
◈ 회덕(懷德)이씨
시조는 이몽(李蒙).
능양군(綾陽君, 인조)의 후예로 나라에 공이 있어 회덕군(懷德君)에 봉해졌다고 전해지나 문헌이 없어 선계를 알 수 없다.
인구수 338(1985).
◈ 흥양(興陽)이씨
시조는 이언림(李彦林).
고려 인종 때 병부상서, 이듬해 공부상서와 우복야를 지냈다.
그 뒤 7세손 ⇒ 7세. 7세^ 손. 6세손 이길(李吉)이 문과에 올라 봉상대부 통례문부사(奉常大夫通禮門副使)를 지내고 흥양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흥양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수 1만 3829(1985).
* ‘몇 대손’은 조상 기준으로 조상과 후손 관계를 바르게 헤아려 읽었으나 ‘몇 세손’은 ‘세=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었기에 수정하여 붉은 색 글자로 나타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