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慶州李氏-月城)에 대하여 – 1
■ 경주이씨(慶州李氏-月城)에 대하여 – 1
자료를 모아 블로그에 게재하다보니 같은 내용의 자료를 중복으로 올리기도 합니다.
1. 시조
이알평(李謁平)
2. 유래
시조(始祖)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은 박혁거세(朴赫居世) 탄생(誕生) 설화(說話)에 나오는 초기(初期) 신라(新羅)의 6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 급량부)의 촌장이다.
이알평(李謁平)은 신라(新羅)의 좌명공신(左命功臣)으로 <경주이씨 대종보>에 의하면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왕(王)이 된 뒤 아찬(阿粲)에 올라 군사업무를 장악 했으며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양산촌 이씨로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23년 *익호(謚號) ⇒ 시호(諡號)를 *문선공(文宣公) ⇒ 忠憲公으로 하였고, 무열왕(武烈王) 3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후손(後孫)에 대한 계대(繼代)가 전(傳)해지지 않아 이알평(李謁平)의 *36세손(世孫) ⇒ 원대손(遠代孫)이며 신라(新羅)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出身)인 이거명(李居明)을 *1세조(世祖) ⇒ ‘1세’ . ‘1세 조’ . ‘1세 조상’ 으로 하고 있다.
\ *‘1세조(世祖)’는 나를 기준으로 하면 나의 아버지가 나의 1세조이고 2세인 시조 아들을 기준으로 하면 시조님인 아버지가 1세조입니다.
시조 1세 - - - → 시조 子
父-- --------------子
1세조(=1대조)----(기준)
3. 가문의 번영
경주이씨는 고려(高麗) 말(末)에 크게 세력(勢力)을 떨쳤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도 문과(文科) 급제자 178명,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다.
8대파 ⇒ 14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집안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세칭 8별(鼈)집으로 불리는 (華谷화곡 李慶億이경억 집안)‘의 익재공파와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가 그에 버금간다.
경주이씨가 조선(朝鮮)에 배출한 상신· 문형 가운데 백사집에서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의 화곡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명,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 후손 '매축헌 집'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년(충렬왕13년)부터 1367년(공민왕16년) 살다 돌아가신 고려 때의 문신, 학자이며 시인이이시다.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이시다.
검교정승 진(瑱)의 아들로, 1301년(충렬왕 27년) 성균시에 장원,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1303년 권무(임시직) 봉선고 판관, 연경궁 녹사 등을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등용되어, 제안부 직강을 지낸 후 이듬해 사헌 규정을 지내고, 1310년(충선왕 2년) 선부산랑, 다음해 전교시승도 지내고, 삼사 판관 등을 역임, 1312년 서해도 안렴사로 나갔다가 성균 악정, 풍저창사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 부령, 풍저감 두곡을 역임, 1314년(충숙왕 1년) 백이정의 문화에서 정주학을 공부, 이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염, 조맹부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이듬해 선부 의랑, 성균 제주가 되고, 1316년 진현관 제학에 승진, 다음 해 선부 전서로 원나라에 가서 상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1319년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지방을 유람, 이듬해 지밀직사에 올라 단성익찬공신이 되고, 이 해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빠이앤투그스의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밝혀 1323년 풀려나오게 했다.
다음해 광정대부밀직사사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이 되고 정당문학으로 김해군에 봉해지고, 1336년 삼중다광. 영예문관사에 올랐다.
1339년 심왕 고가 모역을 하다 실패하자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 원사, 두린 등이 왕을 잡아가자, 이 때 연경에 가서 사실을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 시골에 은거했다.
1343년 (충혜왕 복위 4년) 원나라 사신이 왕을 포박해 가므로 글을 올려 사명을 요청했고, 이듬해 판삼사사에 복직, 서연관이 되었다.
1348년(충목왕 4년) 충목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으로 원나라에 가서 풍정왕의 승습을 요청했고,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우정승 권당정동성사로 발탁, 도첨의 정승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 찬화공신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다음해 우정승에 재임, 1365년 문하시중의 관작에 올랐다.
이어 사직하고, 저술과 학문연구에 전심했다.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에 호종, 이해 계림부원군에 봉해졌고, 만년에 은퇴한 뒤, 왕명으로 실록을 편찬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했고, 원나라 조명부의 서체를 고려에 도입하여 널리 유행시켰다.
원나라의 진감여라는 인물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탕병용이 찬을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미술관에 보관되고 있다.
「익재난고」 소악부에 17수의 고려의 민간 가요를 한시 칠언절구로 번역하여, 이것이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후에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고, 경주의 귀강서원, 금천의 도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 이제현 (李齊賢 1287∼1367) (충렬왕 13∼공민왕 16)
고려 말기 문신· 학자· 시인.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실재(實齋)· 역옹(櫟翁). 초명은 지공(之公). 본관은 경주(慶州).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1303년 권무 봉선고 판관· 연경궁 녹사를 거쳐 예문춘추관· 사헌 규정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벼슬길에 올랐다.
1314년(충숙왕 1) 상왕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중국 원(元)나라 연경(燕京)의 만권당에 머물면서 원나라 학자 요수(姚燧)· 원명선(元明善)· 조맹부 등과 교유하여 학문과 식견을 넓혔다.
그 뒤 3번의 중국대륙여행을 통해 문학적인 체험을 넓혀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아울러 국내에서는 성균 좨주(成均祭酒). 판전교 시사(判典校寺事)· 선부 전서(選部典書)를 거쳐 1320년 지밀직사사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의 호를 받았고, 1325년 첨의평리· 정당문학에 전임 됨으로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 충혜왕이 중조(重祚)하는 등 정국혼란이 일어나고 1339년(충숙왕 복위 8) 충혜왕이 궁지에 몰리자 원나라에 가서 왕을 변호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으나 소인들에게 몰려 은퇴했다.
이때 《역옹패설》을 저술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뒤 우정승· 권단 정동성사를 거쳐 도첨의 정승을 지냈다.
1356년 문하시중에 오르고 1362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말년에는 민지(閔漬)의《본조 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하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데 참여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도 뛰어났고, 성리학을 수용,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경주(慶州) 구강서원, 금천(金川) 도산서원에 제향 되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익재난고(益齋亂藁)》가 있는데, 《역옹패설》과 함께 《익재집》이라 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