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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의 시조는 누구?

녹전 이이록 2020. 5. 25. 09:48

경주이씨의 시조는 누구?

 

[경주이씨의 시조는 누구죠? 그리고 익제공파는 익제공이신가요?]

 

댓글)

 

A

 

경주이씨의 시조는요. 이자 알자 평자 되시고요.

익제공파의 시조는요. 이자 제자 현자 되십니다.

 

위 댓글 답변에 대한 소견)

 

A 종친님의 답변에서 이자 알자 평자’ . ‘이자 제자. 현자에서 성씨는 자라 말하지 않습니다.

성을 제외한 이름자에만 공경하는 의미에서 (). ()라거나 (). ()라고 말합니다.

 

답변) 이이록

 

[경주이씨의 시조는 누구죠?]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慶州李氏始祖李謁平)

 

경주이씨의 시조(始祖)는 알평(謁平)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다.

삼국유사에는 기원전 117년에, 경주이씨의 시조인 <알평공>이 하늘에서 신라의 4영산(靈山)의 하나인 경주 동북에 있는 금오산(金鰲山)의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다고 한다.

 

신라 6()은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취산 진지촌(嘴山珍支村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 등인데 삼국사기에는 유리왕(儒理王) 9년 봄에 6()의 이름을 고쳤는데, 양산부(楊山部)밑돌부(及梁部) 이씨(李氏) / 고허부(高墟部)새돌부(沙梁部) 최씨(崔氏) / 대수부(大樹部)점돌부(漸梁部) 손씨(孫氏) / 우진부(于珍部)본피부(本彼部) 정씨(鄭氏) / 가리부(加利部)한기부(漢祇部) 배씨(裵氏) / 명활부(明活部)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로 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는 이와 달리 새돌부(沙梁部)를 정씨(鄭氏)의 본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조의 영지(領地)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은 뒤에 밑돌부(及梁部)가 되는 뿌리의 마을로 6촌의 모체이고 밑돌부의 촌장인 알평(謁平)6촌의 부족사회를 영도하는 수장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기원전 69) 316촌의 촌장들이 각기 그의 자제(子弟)들을 이끌고 경주이씨의 시조인 알평공(謁平公)이 다스리는 알천(閼川)의 안상(岸上)에 모여 나라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69년의 일이며 이때에 이 회의를 주재한 분이 알평 시조였다.

13세 된 혁거세(赫居世)에게 ()’의 성을 주어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박혁거세(朴赫居世)이다.

시조에게는 다음과 같이 왕의 칭호가 내리고 유허비, 재실, 묘우가 건립되었다.

 

신라 유리왕 9(서기 32)에 시조에게 [이씨 성(李氏 姓)]이 사성(賜姓)되고 법흥왕 23(서기 526)에 충헌(忠憲) 시호(諡號)를 내리고 태종무열왕 3(서기 739)은열왕(恩烈王)’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 순조 6(1806)에 신라를 건국하고 박혁거세 왕을 추대한 사실(史實)을 새긴 유허비를 표암봉(瓢巖峰)에 세웠으며 서기 1925년에 표암재(瓢巖齋)를 건립하였고 1971년에 알평 시조의 묘우(廟宇)인 악강묘(嶽降廟)가 국고지원으로 중건되었다.

 

[익제공파는 익제공이신가요?]

⇒ 익재공파의 파조(파시조)는 익재공이신가요?

 

'익제공'. '익제공파'가 아니고 익재공’. ‘익재공파가 바른 글자입니다.

한자 益齋는 우리 말로 익재로 읽는 것이 바릅니다.

 

익재공은 중시조 17세 이제현으로 익재공파 파시조이고 경주이씨 시조는 표암공 알평. 중시조는 소판공 거명. 중흥조는 좌복야 15세 핵입니다.

 

중시조 17세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이제현(李齊賢. 충렬왕 13(서기1287) ~ 공민왕 16(서기1367)) 고려 말의 정치가이며 성리학자 이었고 () 위협 속에서 기울어가는 고려의 사직(社稷) 버텨낸 위인이시다.

 

자는 중사(仲思), 초명(初名) 지공(之公),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검교정승 () 아들이다.

충렬왕 27(서기1301) 나이 15세로 성균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문과의 병과(丙科) 합격하여 예문춘추관에 들어갔다.

성균 악정에 이르렀을 때에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 설립하고 부르므로 연경(燕京) 가서 () 명사들인 요수(姚燧염복(閻復조맹부(趙孟頫) 등과 교우하며 학문이 심오해졌으며때에 진감여(陳鑑如) 공의 초상화를 그렸고 () 석학 탕병룡(湯炳龍) () 썼는데, 그림과 글씨가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되어있다.

 

충숙왕 10(서기1323) 유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이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으로 만들어달라 원나라에 간청하니 원나라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고려를 얻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조정이 들떠서 후속조치에 여념이 없는데 공은 분연히 일어나 도당(都堂. 원나라의 의정부) 글을 보내서 고려 400년의 사직(社稷) 이로써 무너진다고 개탄하고 유청신 등의 청원이 부당함을 이로정연하게 설명하여 고려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위급을 구하였으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뒤에 충선왕이 서번(西蕃) 귀양을 가게 되자 함께 따라갔으며 가고 오는 과정에서 밀직사사 ·첨의평리· 정당문학· 삼사사 등의 벼슬이 내려졌다.
충숙왕 복위 8(1339) 정승 조적 등이 심왕(瀋王) () 공모하여 모반하다가 잡혀죽자 그의무리들이 연경(燕京) 남아서 충혜왕을 음해하므로 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무마하였으며 충목왕이 즉위하자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우정승을 맡고 정동성사를 겸하였다.

 

그 후 원종공신 조일신(趙日新) 시기할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았으므로 뒤의조일신의 난리 화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 후 우정승을 지내고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공민왕 6( 서기1357) 벼슬을 떠났고 왕명으로 고려의 실록을 수찬(修撰)하고 종묘와 위패의 서차(序次) 정했으며 사후에 공민왕의 사당에함께 모셔졌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낙옹비설·익재집(益齋集)등이 있다.
공은 당대의 문호(文豪)였으며 익재난고 소악부(小樂府)에는 당시의 민요 17수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수록되어 있는데 국문학계에서 고려시대의 가요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천여 한말(韓末)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익재(益齋)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