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공파 시조는?
■ 석탄공파 시조는?
경주이씨 석탄공파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사람이나(시조말고요.) 지금 이름이 난 사람을 알려주세요.
석탄공파에서 없으면 그냥 경주이씨라도 알려주시고요..
또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석탄공파의 시조는 이알평인가요? 아니면 이존오 인가요?
만약 이존오라면 이알평은 석탄공파의 시조가 아닌가요?
아니면 이알평이라면 이존오는 그냥 석탄공파를 만든 사람인가요?
답변) 이이록
이렇게 정리합시다.
경주이씨 시조는 표암공 알평. 석탄공파 파시조는 석탄공 이존오입니다.
석탄공파 파시조님이신 석탄공 휘 존오 조상님은 유명한 선조님입니다.
석탄공에 대한 행적은 아래 내용을 참고 하세요.
먼저 경주이씨 시조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표암공(휘 알평)은 경주이씨 시조님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신라 건국초 전후로 생존한 조상님입니다.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하여 신라를 건국할 때 사로 6촌의 촌장이었고 좌명공신이었습니다.
유리왕 9년 서기 32년에는 6촌이 6부로 개칭될 때 알천 양산촌에서 급량부(양부)로 바뀌고 호칭도 대인으로 바뀌었으며 6부에 성을 사성했으니 양산촌은 급량부로 개칭하고 이씨 성을 받았습니다.
석탄공은 시조님으로부터 1400여 년 후의 인물로 '세'수로는 중시조 19세이며 대파인 석탄공파 파시조이십니다.
[석탄공파의 시조는 이알평인가요 아니면 이존오 인가요?
이존오라면 이알평은 석탄공파의 시조가 아닌가요?
아니면 이알평이라면 이존오는 그냥 석탄공파를 만든사람인가요?]
석탄공파의 파시조는 이존오 조상님입니다.
이존오 조상님의 호가 석탄으로 호를 따서 대파명으로 하였습니다.
이알평 시조님은 석탄공파의 시조가 아니고 전체 경주이씨 모두의 시조님입니다.
석탄공 이존오 조상님이 석탄공파 파시조입니다
(석탄공 이존오 족보 기록)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 충혜왕 신사(辛巳. 1341)에 출생.
어렸을 때에 여주(驪州) 고산(孤山)에 우거(寓居)하여 대대로 살았다.
일찍이 부모를 여이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慷慨)한 지절(之節)이 있었다.
10살 때 강물이 창일(漲溢)함을 읊은 글에 이르되 '큰 들이 다 물에 잠겼었네. 고산(孤山)은 홀로 항복하지
않았다.' 하니 식자(識者)들이 달리 여기더라.
20세인 공민왕 9년 경자(更子. 1360)에 국자 진사(國子進士)로 문과에 올라 사한(史翰)에 선보(選補- 선발되어 보임됨)되고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등 제현(諸賢)으로 더불어 도의에 벗이 되다.
25세인 병오(丙午. 1366)에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정추(鄭樞)와 신돈(辛旽)을 소척(疏斥)하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니 장사(長沙)는 지금 무장현(茂長縣)이라 부여(扶餘)의 석탄(石灘)에 돌아와 분함과 근심으로 병을 이르니 말하여 가로되 '신돈이 망해야 내가 이에 망하리라.' 하더니 드디어 공민왕 신해(辛亥. 1371)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31세이라.
공(公)이 졸(卒)한 후 석 달에 신돈이 과연 해임을 당했다.
왕이 그 충절을 생각하사 판삼사 대사성(判三司大司成)을 증직(贈職)하니 이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와 삼강 행실(三綱行實)에 실렸다.
충절이 숙묘조(肅廟朝) 어찬(御撰)에 까지 나타났고 문집이 있어 세상에 행하다.
묘는 개성 고동문(開城古東門)밖 십리 되는 곳인 장단(長湍) 땅 대덕산(大德山) 남약사원(南藥師院) 북쪽에 자좌(子坐)이며 무장(茂長)의 충현(忠賢)과 부여의 의열(義烈)과 공주(公州)의 공암(孔巖)과 여주(驪州)의 고산(孤山) 등 여러 원(院)에 배향(配享)하고 정문(旌門)을 부여로부터 과천 암산동(果川巖山洞)에 이전하였다.
배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판도판서(版圖判書) 선(璿)의 녀(女)요. 대제학(大提學) 상정(祥正)의 손(孫)이고 대제학(大提學) 지(漬) 증손(曾孫)이며 찬리(贊理) 양경공(良敬公) 전주(全州) 최문도(崔文度)의 외손(外孫)이다.
묘는 개성 남문(開城南門)밖 십리허의 호현(虎峴) 북쪽에 있다.]
◆ 이존오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석탄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0여세에 12도(徒)에서 공부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이숭인(李崇仁) 등과 학문을 토론했으며 정언에 이르렀을 때에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는데 누구도 감히 나서서 신돈의 방자와 음탕을 나무라지 못하였다.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을 처 죽여야 한다고 탄핵의 글을 올렸다가
도리어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매우 위급했었는데 이색(李穡) 등의 힘으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고 후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죽었다.
뒤에 왕이 공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 대사성을 추증했다
석탄선생의 아들인 경절공은 어린나이에 부친을 여의었으나 사려 깊고 굳건한 성품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문장이 출중하였다. 우왕 구년 문과에 급제, 간의대부로 출사하였다.
그러나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옛말처럼 경절공 역시 강직한 성품으로 세도가의 모함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풀린 후에 공주 석탄에 우거하며 조정의 부른에 응하지 않았다.
경절공이 관직에 복귀한 것은 조선 개국 후 옛 친구 정안대군 방원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었다.
당시 조정은 왕위계승을 울러싸고 왕자들 간의 알력이 심할 때였다.
이때 정안대군을 없애려는 반란을 눈치 채고 이를 미리 평정케 한 분이바로 경절공 이래다. 태종이 즉위하자, 경절공은 세자사부, 대제학,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전력하였다.
공이 사헌으로 있을 때 살인한 왕족을 사면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그 부당함을 직접 간언하여 의법처리 함으로써 개국초기의 문란한 기강을 바로 잡았다.
태종 16년 55세로 별세하니, 조정에서 애관을 보내 예장 치제케 하고 영의정의 증직과 개성부원군을 추봉하였다.
또한 종묘배향과 더불어 불천지위의 특전을 내려 종손이 대대로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경주이씨 석탄공파 이규석(李圭錫) - 경주인 이규석은 계성부원군(鷄城府院君) 석탄 이존오의 후예(後裔)로 관직(官職)은 사헌 감찰(司憲監察)에 있었다.
평소(平素)에 효(孝)로써 부모(父母)를 봉양(奉養)하더니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홍동면 원평천에서 한겨울의 눈 속에서 쌍리(雙鯉- 잉어)를 구하여 진공(進供)하였다.
임술(壬戌)년 봄에 어머니의 병이 재발(再發)하자 열지주혈(裂指注血-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임)을 하였다.
상중에는 40리 의 묘소(墓所)를 삭일(朔日)이면 곡배(曲拜)하니 향당(鄕黨)이 모두 그의 효행(孝行)을 칭송(稱頌)하였다.
홍성군수 이민녕은 그를 포상(褒賞)하였다.
효자 이종형 그 아들 이휘욱, 이휘환과 그 손자 이규진, 이규정, 이규승, 이규익 등이 같이 정표되었다.
그 아들 휘옥, 휘환, 그 손자 규진, 규정, 규승, 규익 등 자손들도 부모의 뜻을 이어 극히 효도하매 "아들 낳으려면 마땅히 3대 효도하는 집을 닮아라." 하였으며 나라에서 하교가 내린즉 경문과 비문에 완문까지 내려 가로되 "혹 정배하거나 부역하는 일을 공이 살아 있는 동안을 불침하라." 했다.
효자 이종형, 그 아들 휘옥, 휘환, 또 그 손자 규진, 규정, 규승, 규익 7효를 낳으니 이 어찌 예나 지금이나 후손들의 영광과 자랑이 아니리오.
현재 후손들이 7대손에 ‘우’자와 8대손에 ‘상’자등 태안읍내에 많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