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의 내용이 다른 사인공(舍人公)의 행적 – 3
■ 두 편의 내용이 다른 사인공(舍人公)의 행적 – 3
달리 기록한 두편의 내용이 다른 사인공(휘 조)의 행적입니다.
정리하면 족보의 행적 기록과 중앙화수회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같은 할아버지의 행적이 사뭇 다릅니다.
뒤늦게 밝혀진 새로운 사실이 있으면 족보의 내용을 수정하여 바르게 같은 내용으로 올려야 후손들이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아래와 같이 그 전말을 정리하여 중앙화수회에 건의하였습니다.
◉ 중앙화수회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사인공(중시조 17세 휘 조)의 행적 기록.
【▣ 인물론
다. 종중을 빛낸 거인들
1) 절의. 염결의 가풍
[- (생략)이존오(李存吾), 이시영(李始榮)은 절의로 유명하다.
고려조의 절의지사(節義志士)로는 고려 공민왕 때의 충신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와 역시 고려 말의 충신 이조(李蓨)를 들 수가 있다.(생략)
역시 고려 말의 충신 이조(李蓨)는 검교정승 송암 세기의 제4자이고 국당공 이천(李蒨)의 막내 동생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사인(舍人)에 이르렀을 때에 고려가 망하므로, 모두 고려를 등지고 신왕조로 발길을 돌리는데 공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안고 전라도 함라에 있는 갓점산에 은둔하였다.
공은 그 산속에 서실(書室)을 짓고 거기에서 독서도 하고 지금은 없는 고려사직의 원혼들을 달래며 제향을 지냈다고 한다.
밖에 나온 일이 없으므로 초근(草根) 목피(木皮)로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을 것이지마는 도대체 무엇을 먹고 무엇으로 몸을 가리었으며 무엇을 덮고 어디에서 잤을까?
세속인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자연의 삶속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30유여 년을 보내다가 표연히 자취를 감추었으니 실로 만고의 충신이 아닐 수가 없다.
공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어서 뒤에 후손들이 그 산 아래에 단(壇)을 설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말(韓末)에 공의 단(壇) 앞에 세운 비의 표면에는 ≪해동수양(海東首陽)≫이라는 표제가 새겨져있다.
세인들은 공이 은둔한 이 산을 백이숙제(伯夷叔齊)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았다는 중국의 수양산(首陽山)에 비유한 것이다.] 】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족보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을 것으로 알고 사인공 할아버지의 행적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이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 대종보의 중시조 17세 사인공(휘 조) 할아버지의 족보 행적 기록
【[子 蓨(조). 舍人(사인). 始入郭山(시입 곽산)]하야 改諱萱(개 휘훤)하다.
○ 墓(묘)는 郭山(곽산) 問禮山(문례산).
按公(안공)이 以文禧公季子(이 문희공 계자)로 麗末(여말)에 謫于郭山(적우 곽산)하야 因家焉(인가언)하니 見郭山誌及金石錄(견 곽산지 급 금석록) 하다.]
- 사인공 휘 조(蓨)는 곽산에 처음 들어가서 휘를 훤(萱)으로 고쳤다.
묘는 곽산 문례산에 있다.
공을 살펴보니 문희공(휘 세기)의 막내아들로 고려 말에 곽산에 귀양을 가서 이로 인하여 대대로 세거하니 곽산지와 금석록에 볼 수 있다.】
라고 족보에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홈페이지 사인공 할아버님에 대한 기록과 대종보에 기록된 사인공 할아버님의 행적 기록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족보에는 곽산 문례산에 묘소가 있는데 홈페이지에는 ‘전라도 함라 갓점산’에서 표연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기록과 갓점산에 은둔하며 30여년을 산속에 서실(書室)을 짓고 거기에서 독서도 하고 고려사직의 원혼들을 달래며 제향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산밖에 나온 일이 없으므로 초근(草根) 목피(木皮)로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만고의 충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족보에는 없는 기록이라 이 내용이 혹 다른 문헌에 기록된 내용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의문이 들기에 중앙화수회 홈페이지에 위와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위와 같은 두 가지 행적의 글이 다른 내용이기에 ‘사인공파(파시조 李蓨이조) 대종회’에서 제가 ‘삭제 운운’한다면 종인 여러분의 공분을 살 것으로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조사하여 마땅한 조처가 취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내용을 더 자세히 확인하고 싶어서 글을 올려 문의한 것입니다.
또 내용상 중앙화수회에서 이를 알고 깊이 논의하여 처리되어야할 내용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 이와 같은 저의 소견에 중앙화수회에서 ‘사인공파 대종회’에 문의를 하여 주었습니다.
한 분 할아버지를 두고 족보의 행적과 홈페이지 ‘절의’의 기술 내용이 온전히 다른데 이를 바르게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저의 문의에 ‘사인공파 대종회’에서 중앙화수회로 답변을 보내주었고 그 답변서를 중앙화수회에서는 저에게로 보내 주었습니다.
저의 문의에 대한 ‘사인공파 대종회’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저는 귀하의 질문에 답할 참고 문헌이 없어 답할 수가 없습니다.]
‘사인공파 대종회’에서 알지 못하면 그러면 이 글은 언제 누가 올린 글인가?
그 외 사인공(휘 조)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하여 대종회에서 주신 답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곽산에 이배되고 귀양이 풀려 함열 함라산 입점동(전북 익산시 임피면)에 이거하고 말년에 임피(전북 군산시 임피면)로 이주 후 남산에 서실을 짓고 문사를 즐기면서 한 가지 절개를 지켜 두문(杜門)하고 두문동서원에 배향되었다.(두문동 서원지)]
위 답변에서 ‘두문동 서원에 배향되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기에 이를 찾아보았습니다.
○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 경기도 개성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소재지 : 개성직할시 개풍군 광덕면 만수산 두문동
고려 말 충신들은 새 왕조에 불복하고 두문동에 들어와서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이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 정조 7년에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배향하게 했다
1934년 개성에 세운 두문동서원은 임선미(林先味)의 후손 임하영(林河永)이 주동이 되어 창건하였는데 고려 말 불사이군 대의를 위하여 순절한 72현 및 정몽주 이색 등 절의를 지킨 고려 말 충신 119위를 모신 서원이다.
119위에 대한 표 중에서
1)두문동(杜門洞) 72현(실지 봉안위 55현)
2) 두문동(杜門洞) 외(外) 제현(諸賢) 합64현(合64賢) 중
(1) 순절실 순절반(11현)
(2) 항절실 항절반(33현)
(3) 정절실 정절반(20현)에서 사인공(휘 조)의 휘를 찾게 되었습니다.
(구본욱의 논문에서)
선윤지(宣允祉) | 퇴휴당(退休堂) | 보성(寶城) | 안렴사(按廉使) |
민유의(閔由誼) | 어일(漁逸) | 여흥(麗興) | 한림학사(翰林學士) |
이조(李蓨) |
| 경주(慶州) | 문하사인(門下舍人) |
민보문(閔普文) |
| 여흥(驪興) | 군사(郡事) |
족보의 기록과 중앙화수회 홈페이지에 기록된 사인공 할아버지의 행적 내용이 너무나 달라 이에 대하여 문의를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두문동 72현 외 64현 제현 중 정절실의 정절반 20현 중의 19번째로 올라있는 훌륭한 할아버지임을 알았습니다.
사인공(휘 조) 할아버지는 두문동에는 들어가지 않았으나 고려 말에 함께 순절 내지 절의를 지킨 고려의 두문동(杜門洞) 72현(실제는 55위 봉안) 외(外) 제현(諸賢) 64현(六十四賢) 중의 정절실(貞節室)의 정절반(貞節班) 20현 중의 한 분으로 올라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홈페이지의 사인공 할아버지에 대한 행적 서술은 조금 과장된 면이 없지 않으나 이를 사실에 가깝게 기술하여(두문동 72현 외 64현 중 정절반 20현에 기록됨) 올리는 것이 후세 후손들을 위한 바른 교육 자료가 될 것입니다.
예로 들면 아래와 같은 글은 문맥이 바로 서지 않는 문장입니다.
【공은 그 산속에 서실(書室)을 짓고 거기에서 독서도 하고 지금은 없는 고려사직의 원혼들을 달래며 제향을 지냈다고 한다.
밖에 나온 일이 없으므로 초근(草根) 목피(木皮)로 목숨을 이을 수밖에 없을 것이지마는 도대체 무엇을 먹고 무엇으로 몸을 가리었으며) 무엇을 덮고 어디에서 잤을까?】
소견)
서실을 짓고 독서를 하고 고려 사직의 원혼들의 제향도 지냈다고 하는 것은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말을 바꾸어 초근목피로 목숨을 잇고 무엇을 먹고 무엇으로 몸을 가리고 무엇을 덮고 어디에서 잤을까? 라고 하였습니다.
앞뒤 문맥이 바르지 못한 글입니다.
후일 韓末(한말)에 이 갓점산에 設壇(설단)을 하면서 ‘海東首陽(해동수양)’이라고 碑文(비문)에 刻字(각자)한 모양입니다.
먼저 사인공 할아버지의 중앙화수회 홈페이지 ▣ 인물론 - 다. 종중을 빛낸 거인들 - 1) ‘절의. 염결의 가풍’에 올라 있는 소개 글과 대종보 및 족보의 행적을 바르게 하고 내용을 같게 하여 게재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