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랑공파‘에서 분파된 파가 있나요??
■ ’좌랑공파‘에서 분파된 파가 있나요?
문의와 답변의 글은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홈페이지와 경주이씨 관련 여러 카페와 블로그에 올라 있는 경주이씨에 관련된 ‘질문과 답변’ . ‘궁금한 것’ 난에서 답변이나 소견 등으로 올린 내용들입니다.
아래와 같은 문의에 올린 답변입니다.
[좌랑공파‘에서 분파된 파(만들어진 파)가 있나요?]
답변) 이이록
좌랑공은 대파 ’익재공파‘로 중파 ’창평공파‘. 소파 ’좌랑공파‘의 파시조로 중시조 24세 휘 오(鰲)를 말합니다.
계대는 아래와 같습니다.
○ 중시조 17세 제현 ~ 24세 휘 오의 계대
17세 - → 18세 - → 19세 - → 20세 - - - → 21세 - - → 22세 - → 23세 - → 24세
익재공.....운와공.....군사공....도안무사공....②낙안공....감사공....창평공......좌랑공
제현........②달존.....덕림........신................계번...........윤인.......공린.........오
* ② - 차자. ③ - 3자
중시조 23세 창평공 휘 공린의 8형제인 ’8별(八鼈)집‘ 중 장자는 오(鰲)입니다.
8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소파로 분파하였으니 분파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좌랑공파 - 장자 좌랑공 오(鰲)를 파시조로 한 그 후손들
사미정공파 - 차자 사미정공 구(龜)를 파시조로 한 그 후손들.
재사당공파 - 3자 재사당 원(黿)을 파시조로 한 그 후손들
생원공파 - 4자 생원공 타(鼉)를 파시조로 한 그 후손들.
장육당공파 - 5자 장육당 별(鼈)을 파시조로 한 그 후손들.
참판공파 - 6자 참판공 벽(鼊)을 파시조로 한 그 후손들
진사공파 - 7자 진사공 경(鯨)을 파시조로 한 그 후손들
한당공파 - 8자 한당공 곤(鯤)을 파시조로 한 그 후손들입니다.
*鼇(자라 오). 龜(거북 구). 黿(자라 원). 鼉(악어 타). 鼈(자라 별). 鼊(거북 벽). 鯁(고래 경).鯤(곤이 곤)
*팔별집 소파 명에서 더 아랫대에서 분파된 파는 없습니다.
◈ 창평공의 8자(八子)의 ’팔별(八鼈)집‘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팔별집]의 유래
- 익재공의 6대손인 창평공 공린(公麟)의 현몽(現夢)에서 시작된다.
공린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분인 박팽년(朴彭年)의 취객(娶客- 사위)이 되었는데 혼례를 치룬 첫날밤의 꿈에 용왕(龍王)이 나타나서
“내 여덟 아들이 지금 사경(死境)에 이르렀으니 어서 구해 달라. 그대가 내 여덟 아들을 구해준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으리라.”라고 하므로 꿈을 깨어 일어나보니 한 밤중이었다.
잠든 신부를 흔들어 깨서 물어보니 신부의 말이
“어머니께서 며칠 전에 사위에게 먹이려고 자라 8마리를 사다가 항아리에 넣어두었다.”고 하므로 둘이서 8마리의 자라를 꺼내서 10여리 밖에 있는 호수에 방생(放生)하였는데 가는 도중에 한 마리가 죽었다고 한다.
얼마 후에 공린은 박씨 부인과의 사이에 8형제를 두었는데 3남 원(黿)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죽으니 자라 8마리를 방생하러 가는 도중에 죽은 한 마리가 그였음이 확인된 셈이다.
8형제를 둔 것은 용왕의 보은(報恩) 때문이라 여겨서 이름을 모두 자라, 거북, 고래, 곤(鯤) 등 물고기의 이름을 붙여서 오(熬- 좌랑공)· 구(龜- 사미정공)· 원(黿- 재사당공)· 타(鼉- 생원공)· 별(鼈- 장육당공)· 벽(鼊- 참판공)· 경(鯨- 진사공)· 곤(鯤- 한당공)이라 했는데 한결같이 글을 잘 지어 <8문장>이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지금도 이 집안은 자라를 먹지 않는다고 하니 8별을 자라의 환생(還生)으로 숭봉하는 가통(家統) 때문이리라.
공린은 박팽년의 서랑(壻郞)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혔었다가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절부(節婦)로 표창되면서 30여년 만에 길이 터져서 무과(武科)를 거쳐 현령(縣令)에 이르렀으나 3자 원이 사화(士禍)로 인하여 죽자 청주에 유배되었는데 반정(反正) 후에 신원(伸寃)되었다.
사미정(四美亭) 구(龜)는 문과에 급제, 좌랑에 이르렀을 때에 아우 원의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충주목사에 이르렀다.
재사당(再思堂) 원(黿)은 문과를 거쳐 호조좌랑에 이르렀는데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주자고 건의한 일로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옮기고 갑자사화 때에 처형되었는데, 반정 후에 신원이 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