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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형수 공인 이씨(恭人李氏)의 묘지명 (복사)

녹전 이이록 2020. 1. 18. 10:41

맏형수 공인 이씨(恭人李氏)의 묘지명 (복사)


다산 시 문집(茶山詩文集) 권지 16(卷之十六) 묘지명(墓誌銘)

- 맏형수 공인 이씨(恭人李氏)의 묘지명 정약용 지음(丁若鏞撰)


*용이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연천 현(漣川縣)으로 갔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다.


*선비(先妣) 숙인(淑人)이 술 담그고 장 달이는 여가에 *형수와 저포(樗蒲-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승부를 겨루는 놀이)놀이를 하여 3이야 6이야 하며 그 즐거움이 융융하였다.


수년 뒤에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니, 용이 그때 겨우 9세였다.


머리에 이와 서캐가 득실거리고 때가 얼굴에 더덕더덕하였는데 형수가 날마다 힘들여 씻기고 빗질하였다.


그러나 용은 또한 흔들며 벗어나고 형수에게로 가려 하지 않았다.


형수는 빗는 빗과 세수 대야를 들고 따라와서 어루만지며 씻으라고 사정하였다.


달아나면 잡기도 하고 울면 조롱도 하였다.


꾸짖고 놀려대는 소리가 뒤섞여 떠들썩하니 온 집안이 한바탕 웃고 모두들 용을 밉살스럽게 여겼다.


형수는 자성(姿性)이 헌걸차서 우뚝하기가 마치 장부와 같고 녹록(碌碌)하게 자잘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숙인(先淑人- 정약용의 어머니)이 돌아가고 선군(先君- 정약용 아버지) 또한 관직에서 물러나 집안 살림은 더욱 쓸쓸하여 제수(祭需)와 닭ㆍ기장 따위의 음식 지공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형수가 혼자서 집안 살림을 꾸려갔다.


그래서 팔찌와 비녀 등의 패물을 모두 팔아 쓰고 심지어는 솜을 두지 않은 바지로 겨울을 지냈으나 집안 식구들은 알지 못하였다.


지금 형편이 조금 피어 끼니는 이어나갈 만한데 형수가 미처 누리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


형수의 성은 이씨이니 본관은 경주인데 시조는 신라의 명신 *알평(謁平)이다.


뒤에 *휘 정형(廷馨)이 있었는데 이조 참판을 지내고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 뒤 5대에 *휘 달()이 있었는데 힘이 범을 잡을 수 있었고, 문사(文事)를 버리고 무과에 합격하여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이분이 휘 부만(溥萬)을 낳았는데, 부만이 청주 한씨(淸州韓氏) 종해(宗海)의 딸에게 장가들어 건륭(乾隆) 경오년(1750, 영조 26) 324일에 형수(공인 이씨)를 낳았다.


형수는 겨우 15세가 되어 백씨(伯氏)에게 시집왔다.


경자년(1780, 정조 4)에 선군(先君. 정약용의 아버지)을 따라 예천군(醴泉郡)에 가서 돌림병을 앓다가 죽으니 415일이다.


충주 하담(荷潭)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이는 우리 조부모와 부모의 묘역(墓域)이다.


()은 다음과 같다.


시어머니 섬기기 쉽지 않거니 / 事姑未易(사고미역)

계모인 시어머니는 더욱 어렵네. / 姑而繼母則難(고이계모칙난)

시아버지 섬기기 쉽지 않거니 / 事舅未易(사구미역)

아내 없는 시아버지는 더욱 어렵네. / 舅而無妻則難(구이무처칙난)

시숙 대우하기 쉽지 않거니 / 遇叔未易(우숙미역)

어머니 없는 시숙은 더욱 어렵네. / 叔而無母則難(숙이무모칙난)

여기에서 유감없이 잘 하였으니 / 能於是無憾(능어시무감)

이것이 형수의 너그러움일세. / 是惟丘嫂之寬(시유구수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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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선비(先妣) 숙인(淑人)- 정약용의 어머니

*형수 정약용의 형수 즉 정약현의 부인. 이벽(천주교 순교)의 누이

*서캐 이의 알

*알평(謁平) - 경주이씨 시조. 표암공. 양산촌장. 급량부 대인. 신라개국 좌명공신

*휘 정형(廷馨) - 경주이씨 중시조 26세 국당공후 지퇴당공 지퇴당공파 파조

*휘 달() - 지퇴당공의 5대 후손 중시조 31. 전라병마절도사 부만(溥萬)을 낳고

*휘 부만(溥萬)+청주 한씨(淸州韓氏) 종해(宗海)의 딸과 결혼하여 형수를 낳음

*백씨(伯氏) - 정약용의 형 정약현

*15세에 결혼 30세에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