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파인지.. 몇 대손인지 - 1.
■ 무슨 파인지.. 몇 대손인지 - 1
문의와 답변의 글은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홈페이지와 여러 카페와 블로그에 올라 있는 경주이씨에 관련된 ‘질문과 답변’ . ‘궁금한 것’ 난에서 답변이나 소견. 수정 사항. 건의 등으로 올린 내용들입니다.
【 제가 무슨 파인지 몰라서 알고 싶어서요.
*돌림자는 아버지는 가운데가 상자 돌림이라고 들었고요.
오빠는 끝에 형자 돌림이라더군요.
무슨 파인지.. 몇 대손인지.. 알 수 있을까요?】
댓글)
△. A
종친께서는 희자나 형자(熙 ,炯) 항렬로 경주이씨 40세(39대)손이 되십니다.
위 댓글에 대한 소견)
아직까지 세와 대. 세손과 대손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경주이씨에서 몇몇 이름이 난 분들이 종친님들의 세와 대에 대한 문의에 1945년 이후에 대두된 ‘이의’논지로 교육을 받아 [2세=1대. 대=세-1. 세=세손. 대=대손. 상대하세. 대불급신]이라는 기본원칙을 만들어 새로운 이론을 세워 2000년 초까지 60여 년간 널리 홍보하고 교육하여 한때 대세를 이룬 ‘이의’논지로 답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 문의자의 문의에 ‘문의자는 熙(희), 炯(형)항렬로 경주이씨 40세손이고 39대손’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위 답변은 바른 답변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님들께서 사용하였고 족보나 문헌에 남긴 기록에 의한 답변이 아닙니다.
1945년 해방이후에 몇몇 교수와 학자들이 조상님들께서 사용하던 세와 대는 같은 뜻의 이론인 ‘동의론’ 대신 세와 대는 다른 뜻인 ‘이의론’을 새롭게 정리하여 2000년 초까지 근 60여년을 발달된 미디어 매체를 통하여 널리 교육되고 홍보되어 대세를 이룬 이론입니다.
엉터리 이론이고 곳곳이 ‘상대하세’. ‘대불급신’이라는 4자 성어를 기본 원칙으로 만들어 논리에 끼어 맞추어 설명된 잘못된 주장입니다.
‘희’자나 ‘형’자 (熙 ,炯) 항렬은 ‘경주이씨 40세(39대)손’이 아닙니다.
熙(희), 炯(형)항렬은 ‘중시조 40세’이고 ‘40대’입니다.
그러면 ‘몇 세손’이나 ‘몇 대손’으로는 ‘중시조님의 39세손’ . ‘39대손’이라고 읽거나 말하여야 바릅니다.
위 답변의 ‘중시조님의 40세손’. ‘중시조님의 39대손’은 잘못 읽은 것입니다.
‘2세=1대’라는 ‘이의’논지를 그대로 읽어 ‘몇 세손’으로는 중시조 40세를 ‘세=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어 ‘40세=40세손’으로 읽고 40세는 ‘세-1=대’로 39대이니 대=대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어 ‘39대손’이라고 읽은 것입니다.
아래의 표와 같이 ‘동의’논지로 읽어야 바릅니다.
○ 1세 중시조 ~ 40세 ‘희.형’ 항렬의 계대
1세 - → 2세 - - - → 3세 → - → 17세 → - → 39세 - - → 40세
중시조....병부령공,...낭중공........국당공........‘상’항렬......‘희.형’항렬
거명.......금현...........금서...........천...............상○...........○희.○형
(기준).....1세손.........2세손.........16세손.........38세손........39세손
(기준).....1대손.........2대손.........16대손.........38대손........39대손
*‘세=대. 세손=대손. 세조=대조’로 등호(=)좌우의 용어는 같은 뜻으로 읽어 말합니다.
△ B
백사파라는 파가 있나요?
소견)
우리 경주이씨는 대파가 14개파이고 중. 소파가 80여개 파로 분파되어 있습니다.
이 중 소파에 ‘백사파’가 있습니다.
우리 후손들은 공경하여 ‘백사공파’라고 부릅니다.
후손들이 조상님의 호를 함부로 부를 수 없기 때문에 호 白沙(백사) 뒤에 경칭 ‘公(공)’자를 붙여 ‘백사공’이라고 하며 백사공(중조 25세 휘 항복)은 대파 상서공파(파조 17세 휘 과)에서 분파한 소파 ‘백사공파’의 파조입니다.
백사공은 조선 중기 문신(文臣)으로 정치가· 작가인 이항복(李恒福, 1556년~1618년)의 호입니다.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입니다.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權慄)의 사위입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1617년 인목대비의 폐위에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다가 1617년 음력 11월 24일 관직을 삭탈당하고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1618년 음력 1월 6일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돌아갔습니다.
상신록(相臣錄)에 실렸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