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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와 월성이씨 – 1

녹전 이이록 2019. 6. 19. 09:18

경주이씨와 월성이씨 1



문의와 답변의 글은 경주이씨 중앙화수회 홈페이지와 여러 카페와 블로그에 올라 있는 경주이씨에 관련된 질문과 답변’ . ‘궁금한 것난에서 답변이나 소견. 수정 사항. 건의 등으로 올린 내용들입니다.


월성이씨와 경주이씨가 동본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어떤 경위로 바뀐 건지?


*월성이씨에서 경주이씨로 본관을 변경한 분이 많은지?


저 또한 경주이씨 족보에는 등재되어 있으나 호적부에 보면 월성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더욱 궁금합니다.


댓글)



월성과 경주는 같습니다.


단 지금의 경주시가 옛날 지명은 *월성군으로 불렀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은 오늘날의 지명을 따라 경주로 사용합니다.


소견)


위 답변자가 경주가 옛날 지명이 *월성군으로 불렀기 때문에 월성과 경주는 같다고 하였습니다.


월성군은 1955~89년에 불렸던 군명입니다.


이 군명 월성군에서 따서 월성이씨라고 불린 것이 아니고 옛 신라시대에 경주를 계림. 월성등으로 불렀는데 이때의 이름을 따서 고풍스런 옛 이름으로 계림이씨’. ‘월성이씨라고 한 것입니다.


답변) 이이록


[월성이씨와 경주이씨가 동본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어떤 경위로 바뀐 건지?]


- 월성(月城)은 경주의 옛 이름입니다.


월성(月城)은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인근에 안압지. 계림이 있으며 석빙고가 있는 야산. 남쪽으로 남천이 흘러 해자 역할을 함. 지금은 사적 제16호로 지정되어 있음.) 신라 시대에 궁궐이 있었던 곳으로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또는 월성이라 불렀으며 임 금이 사는 성이라고도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주위가 1,023()이며 자연적인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신라 역대 왕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290(유례왕 7)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487(소지왕 9)에 궁궐을 다른 곳에 옮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습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월성터(月城址)는 원래 호공(瓠公)의 거주지였는데 BC 19(박혁거세 39) 석탈해(昔脫解)가 금성(金城)의 지리를 살펴본 뒤에 가장 좋은 길지(吉地)로 호공의 집터를 지목하여 거짓 꾀를 부려 호공의 집을 빼앗아 월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 공으로 석탈해는 남해왕(南解王)의 맏사위가 되었고 그 후에 신라 제4대 왕위에 올랐습니다.


신라시대부터 경주를 월성이라 하였으니 월성이 곧 경주입니다.


비석에 계림이씨(鷄林李氏). 월성이씨(月城李氏). 경주이씨(慶州李氏)라고 되어 있는 것은 모두 본관이 같습니다.


예전에는 비석에 경주를 뜻하는 지명을 사용하여 본관을 나타내었습니다.


조선 말엽. 일제 압박시대를 거치면서 월성이씨. 계림이씨 등으로 불리든 것을 현재의 지명인 경주에 성씨를 붙여 경주이씨로 바꾼 것입니다.


[월성이씨에서 경주이씨로 본관을 변경한 분이 많은지?]


- 1960년대 초 이력서를 쓸 때까지도 한자로 본관에 月城이라고 하였으니 아마 60년대 이후에 경주 이씨로 바꾼 것으로 생각됩니다.


본관이 월성으로 기재된 분들은 대부분 경주로 본관을 바꾸었습니다.


[경주이씨 족보에는 등재되어 있으나 호적부에 보면 월성으로 기재되어 있어서 더욱 궁금합니다.]


- 주민 센터(동사무소) 호적계에 가서 문의하여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본관 정정 신청을 하면 처리해 줄 것입니다.




◆ 비석 사진자료(저작권으로 복사가 안됨)  



宜人雞林李氏之墓(의인 계림 이씨)

- 익재공후 판윤공 6세손. 최동로의 부인 묘지석


 蘇判公月城 李公之祀壇(소판공 월성 이공지사단)

- 양호단소(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동천동 소재)내  중시조와 판전공 사단 묘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