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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의 유래’ 오류 수정 - 13

녹전 이이록 2019. 3. 5. 09:50

경주이씨의 유래오류 수정 - 13



제목 경주이씨 유래라는 장문의 글입니다.


원 제목 경주이씨의 유래와 역사의 글에 다른 자료를 보완하여 쓴 글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료를 모아 글을 써 올렸으나 잘못된 내용이 많습니다.


바르게 쓴 글인 줄 알고 여러 카페나 블로그에 복사되어 올라 있습니다.


원문은 ..........로 나타내고 견해가 다르고 소견이 다른 내용에는 원문에 * 표시를 한 후 아래에 [*...........]로 나타낸 뒤 소견)으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앞에서 소개한 분파 중에서 가장 융성한 분파는 조선조 당시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집, 우리들의 파조(派祖)인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익재 본인과 그 일문에 이어 조선조에서 일컬어지던 이른바 ‘8()의 집’, 그리고 조선조의 명장 이완(李浣) 대장과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李明博)을 배출한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소견)


위는 아래와 같이 정리합니다.


상서공파 – '오신(五臣)집'– '백사(白沙)집' (李恒福이항복)

익재공파 – '팔별(八鼈)집' 중 – '화곡(華谷)집' (李慶億이경억)

국당공파 성중(誠中) 계대 – '매죽헌(梅竹軒)집' (李浣이완)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은 '익재공파'이고 대통령 이명박(李明博)은 '국당공파'이긴 하지만  위 내용과는 별도임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의 집에서는 조선조에서 영의정(領議政) 4, 좌의정(左議政) 2, 대제학(大提學) 2명이 나왔고,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익재공 이재현 자신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영의정) 4, 조선조의 ‘8별의 집에서 죄의정과 대제학 각 1명을 배출했으며, 국당공파(菊堂公派)의 정순공(靖順公 : 誠中) 후손에서는 좌의정 1명을 배출하였다.


아래와 같이 수정합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 오신(五臣) 중 백사(白沙) 이항복의 집안에서는 조선조에서 영의정(領議政) 4, 좌의정(左議政) 2, 대제학(大提學) 2명이 나왔고,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문하시중 2(중조 9세 시중공 이총섬과 17세 익재공 이제현). 조선조에 ‘8(八鼈) 화곡(華谷) 이경억 집안에서 정과 대제학 각 1명을 배출했으며, 국당공파(菊堂公派)의 정순공(靖順公 : 誠中) 계대 매죽헌(梅竹軒- 이완) 집안에서 좌의정 1명을 배출하였다.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익재공 이재현 자신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영의정) 4, ]


소견)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총 4명이 문하시중을 배출한 것으로 잘못 기술하고 있습니다.


고려조에서는 9세 시중공(휘 총섬)과 중조 17세 익재공(휘 제현)문하시중에 재임하였습니다.


*중조 9시중공(휘 총섬)이 문하시중으로 귀히 되어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증직으로 주어진 '증 문하시중'까지 넣어 문하시중을 4명이나 한 것으로 잘못 표기하였습니다.   


9세 시중공(휘 총섬)은 윗대 조상으로 '익재공파'가 아니니 제외하고 익재공파만으로 본다면 익재공(휘 제현)문하시중에 재임한 유일한 조상님입니다.


* 아래의 원문에 별 의미 없고 계산상 힘이 드는 이해가 어려운 필자의 몇 대조로 나타낸 부분은 모두 중시조세수로 고쳐 표시합니다.


이하에서는 신라 조(新羅朝)에서부터 조선 조까지 당대의 왕조에 공헌한 경주이씨 출신 관리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지면관계상 우리 문중의 직계 조상 중 몇몇 분들만 소개한다.


*다른 분파에서는 시조로부터 50세까지는 어느 분파든 거의가 공통사항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시조에서부터 50대손 에 이르기까지의 계대와 관직을 알아본다.


*경주이씨 정묘보(丁卯譜)’ 상계(上系)편을 살펴보면 경주이씨의 중시조이자 *필자의 37대조(중시조 1) 이거명(李居明)이 신라의 소판에 재직했었고,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과 각간(角干)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판이나 병부령은 신라시대에 성골과 진골만이 등용될 수 있는 관등(官等)과 관직이었다.


지금의 관직으로는 시도지사와 국방부장관이라 볼 수 있다.


*고려조에 와서는 신라 경순왕의 사위이자 필자의 *35대조(중시조 3)인 이금서(李金書)가 고려의 중원태수와 낭중(郎中)으로 관직에 진출했고, 34대조(중시조 4)33대조(중시조 5)는 각각 병정(兵正)과 정조시랑(正朝侍郞)을 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조의 병정(兵正)은 향리직명이고, 정조시랑(正朝侍郞)은 고려 향직(鄕職)에서 정7(正七品)의 관계(官階)이다.


*패망한 신라의 유신들을 상위 품계에 등용하지 않으려는 고려 조정의 방침 때문에 이 당시에는 경주이씨 전체에서도 별다른 현직이 없었다.


두 분이 어느 군현(郡縣)에서 향직(鄕職)에 종사했는지도 알 수 없다.


*카페지기의 32대조(중시조 6) 이주복(李周復)도 고려조의 정6품 좌사간(左司諫)에 그쳤으나, 이후부터는 중앙관직에 재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6대조(중시조 12) 이선용(李宣用)25대조(중시조 13) 이승고(李升高)의 경우도 고려의 향직(鄕職)인 군윤(軍尹)과 보윤(甫尹)으로 그쳤다.


*필자의 직계 선조로 고려왕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는 22대조(중시조 16)이신 이진(李瑱)과 그의 동생 이세기(李世基) 때부터다.


이진(李瑱)은 충렬왕(忠烈王) 6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서 2등으로, 동생 이세기는 3등으로 합격했었다.


이 후 이진(李瑱)은 밀직승지(密直承旨), 전법판서(典法判書), 정당문학(政堂文學 : 고려·조선시대 관직으로 고려 문종(文宗) 때 정원은 1, 품계는 종2)을 거쳐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한 이후에는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충숙왕(忠肅王) 2년 지공거(知貢擧)를 거쳐 검교정승(檢校政丞)에 등용되었다가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지적과 소견)


[*다른 분파에서는 시조로부터 50세까지는 어느 분파든 거의가 공통사항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소견)


시조로부터 50세까지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중시조 이전의 시조 계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시조세수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조로부터 50세까지는 아마 사실적이지 못한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계대 35세를 중시조세수 15를 더하여 시조 50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는 중시조 15를 가리키는 말로 중흥조인 열헌공(휘 핵)을 가리킵니다.


이를 아래와 같이 고쳐 나타내어야 합니다.


다른 분파에서는 중시조 1세부터 중시조 15세까지는 어느 분파든 거의가 공통사항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시조에서부터 50대손 에 이르기까지의 계대와 관직을 알아본다.]


소견)


시조 다음에서 중시조 앞대까지의 약 900년간의 계대는 전연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시조의 50대손 핵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50대손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1904년 이후로 언급된 ‘35대로 실전세계35(=35)중시조 15’세 열헌공(휘 핵)중시조 15를 더하여 50세로 읽고 이를 =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어 ‘50=50세손(=50대손)’으로 헤아려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시조 다음에서 중시조 앞대까지의 계대는 전연 알 수 없기 때문에 계대와 관직을 말할 수 없습니다.


정확한 중시조 1세 소판공(휘 거명)부터 15세 열헌공(휘핵)까지의 계대와 관직은 나타낼 수 있습니다.


[경주이씨 정묘보(丁卯譜)’ 상계(上系)편을 살펴보면 *경주이씨의 중시조이자 필자의 37대조(중시조 1)인 이거명(李居明)이 신라의 소판에 재직했었고,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과 각간(角干)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견)


‘*경주이씨의 중시조이자 필자의 37대조인 이거명(李居明)’은 중시조 1세인 신라 말기 소판(신라 17관등 중 3관위) 관직에 역임하였습니다.


이는 목은 이색이 찬한 익재공의 묘지명에서 중시조 소판공 이거명이 시조 이래 최초의 경주 이씨로 밝혀졌습니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과 각간(角干)을 지냈다.’


- 대종보 기록에 중시조 2세 병부령공(휘 금현)은 신라 말에 활동한 분으로 병부를 총괄하는 수장인 병부령(兵部令) 벼슬을 하였지 더 높은 각간(角干) 벼슬의 기록은 없습니다.


* 현재까지 경주이씨에 관한 모든 자료는 1987년도 간행 '정묘보'. 즉 '경주이씨 대종보'에 게재된 내용을 뿌리의 근간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