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의 유래’ 오류 수정 - 13
■ ‘경주이씨의 유래’ 오류 수정 - 13
제목 ‘경주이씨 유래’라는 장문의 글입니다.
원 제목 ‘경주이씨의 유래와 역사’의 글에 다른 자료를 보완하여 쓴 글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료를 모아 글을 써 올렸으나 잘못된 내용이 많습니다.
바르게 쓴 글인 줄 알고 여러 카페나 블로그에 복사되어 올라 있습니다.
원문은 【..........】로 나타내고 견해가 다르고 소견이 다른 내용에는 원문에 * 표시를 한 후 아래에 ▲[*...........]로 나타낸 뒤 소견)으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앞에서 소개한 분파 중에서 가장 융성한 분파는 조선조 당시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집, 우리들의 파조(派祖)인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익재 본인과 그 일문에 이어 조선조에서 일컬어지던 이른바 ‘8별(鼈)의 집’, 그리고 조선조의 명장 이완(李浣) 대장과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李明博)을 배출한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소견)
위는 아래와 같이 정리합니다.
상서공파 – '오신(五臣)집' 중 – '백사(白沙)집' (李恒福이항복)
익재공파 – '팔별(八鼈)집' 중 – '화곡(華谷)집' (李慶億이경억)
국당공파 – 성중(誠中) 계대 – '매죽헌(梅竹軒)집' (李浣이완)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은 '익재공파'이고 대통령 이명박(李明博)은 '국당공파'이긴 하지만 위 내용과는 별도임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의 집에서는 조선조에서 영의정(領議政) 4명, 좌의정(左議政) 2명, 대제학(大提學) 2명이 나왔고,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익재공 이재현 자신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영의정) 4명, 조선조의 ‘8별의 집’에서 죄의정과 대제학 각 1명을 배출했으며, 국당공파(菊堂公派)의 정순공(靖順公 : 誠中) 후손에서는 좌의정 1명을 배출하였다.】
아래와 같이 수정합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 오신(五臣)집 중 백사(白沙) 이항복의 집안에서는 조선조에서 영의정(領議政) 4명, 좌의정(左議政) 2명, 대제학(大提學) 2명이 나왔고,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문하시중 2명(중조 9세 시중공 이총섬과 17세 익재공 이제현). 조선조에 ‘8별(八鼈) 집’ 중 화곡(華谷) 이경억 집안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명을 배출했으며, 국당공파(菊堂公派)의 정순공(靖順公 : 誠中) 계대 매죽헌(梅竹軒- 이완) 집안에서 좌의정 1명을 배출하였다.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익재공 이재현 자신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영의정) 4명, ]
소견)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총 4명이 문하시중을 배출’한 것으로 잘못 기술하고 있습니다.
고려조에서는 9세 시중공(휘 총섬)과 중조 17세 익재공(휘 제현)이 ‘문하시중’에 재임하였습니다.
*중조 9세 시중공(휘 총섬)이 문하시중으로 귀히 되어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증직으로 주어진 '증 문하시중'까지 넣어 문하시중을 4명이나 한 것으로 잘못 표기하였습니다.
9세 시중공(휘 총섬)은 윗대 조상으로 '익재공파'가 아니니 제외하고 ‘익재공파’만으로 본다면 익재공(휘 제현)이 ‘문하시중’에 재임한 유일한 조상님입니다.
* 아래의 원문에 별 의미 없고 계산상 힘이 드는 이해가 어려운 ‘필자의 몇 대조’로 나타낸 부분은 모두 ‘중시조세수’로 고쳐 표시합니다.
【이하에서는 신라 조(新羅朝)에서부터 조선 조까지 당대의 왕조에 공헌한 경주이씨 출신 관리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지면관계상 우리 문중의 직계 조상 중 몇몇 분들만 소개한다.
*다른 분파에서는 시조로부터 50세까지는 어느 분파든 거의가 공통사항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시조에서부터 50대손 ‘핵’에 이르기까지의 계대와 관직을 알아본다.
*경주이씨 ‘정묘보(丁卯譜)’ 상계(上系)편을 살펴보면 경주이씨의 중시조이자 *필자의 37대조(⇒ 중시조 1세)인 이거명(李居明)이 신라의 소판에 재직했었고,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과 각간(角干)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판이나 병부령은 신라시대에 성골과 진골만이 등용될 수 있는 관등(官等)과 관직이었다.
지금의 관직으로는 시․도지사와 국방부장관이라 볼 수 있다.
*고려조에 와서는 신라 경순왕의 사위이자 필자의 *35대조(⇒ 중시조 3세)인 이금서(李金書)가 고려의 중원태수와 낭중(郎中)으로 관직에 진출했고, 34대조(⇒ 중시조 4세)와 33대조(⇒ 중시조 5세)는 각각 병정(兵正)과 정조시랑(正朝侍郞)을 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조의 병정(兵正)은 향리직명이고, 정조시랑(正朝侍郞)은 고려 향직(鄕職)에서 정7품(正七品)의 관계(官階)이다.
*패망한 신라의 유신들을 상위 품계에 등용하지 않으려는 고려 조정의 방침 때문에 이 당시에는 경주이씨 전체에서도 별다른 현직이 없었다.
두 분이 어느 군현(郡縣)에서 향직(鄕職)에 종사했는지도 알 수 없다.
*카페지기의 32대조(⇒ 중시조 6세) 이주복(李周復)도 고려조의 정6품 좌사간(左司諫)에 그쳤으나, 이후부터는 중앙관직에 재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6대조(⇒ 중시조 12세) 이선용(李宣用)과 25대조(⇒ 중시조 13세) 이승고(李升高)의 경우도 고려의 향직(鄕職)인 군윤(軍尹)과 보윤(甫尹)으로 그쳤다.
*필자의 직계 선조로 고려왕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는 22대조(⇒ 중시조 16세)이신 이진(李瑱)과 그의 동생 이세기(李世基) 때부터다.
이진(李瑱)은 충렬왕(忠烈王) 6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서 2등으로, 동생 이세기는 3등으로 합격했었다.
이 후 이진(李瑱)은 밀직승지(密直承旨), 전법판서(典法判書), 정당문학(政堂文學 : 고려·조선시대 관직으로 고려 문종(文宗) 때 정원은 1명, 품계는 종2품)을 거쳐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한 이후에는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충숙왕(忠肅王) 2년 지공거(知貢擧)를 거쳐 검교정승(檢校政丞)에 등용되었다가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지적과 소견)
▲[*다른 분파에서는 시조로부터 50세까지는 어느 분파든 거의가 공통사항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소견)
‘시조로부터 50세까지’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중시조 이전의 시조 계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시조세수’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조로부터 50세까지는 아마 사실적이지 못한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계대 35세를 ‘중시조세수 15세’를 더하여 ‘시조 50세’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는 ‘중시조 15세’를 가리키는 말로 중흥조인 열헌공(휘 핵)을 가리킵니다.
이를 아래와 같이 고쳐 나타내어야 합니다.
⇒ 다른 분파에서는 중시조 1세부터 중시조 15세까지는 어느 분파든 거의가 공통사항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시조에서부터 50대손 ‘핵’에 이르기까지의 계대와 관직을 알아본다.]
소견)
시조 다음에서 중시조 앞대까지의 약 900년간의 계대는 전연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시조의 50대손 핵’이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50대손’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1904년 이후로 언급된 ‘35대로 실전세계’의 35세(=35대)에 ‘중시조 15’세 열헌공(휘 핵)의 ‘중시조 15세’를 더하여 50세로 읽고 이를 ‘세=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어 ‘50세=50세손(=50대손)’으로 헤아려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시조 다음에서 중시조 앞대까지의 계대는 전연 알 수 없기 때문에 계대와 관직을 말할 수 없습니다.
정확한 중시조 1세 소판공(휘 거명)부터 15세 열헌공(휘핵)까지의 계대와 관직은 나타낼 수 있습니다.
▲[경주이씨 ‘정묘보(丁卯譜)’ 상계(上系)편을 살펴보면 *경주이씨의 중시조이자 필자의 37대조(⇒ 중시조 1세)인 이거명(李居明)이 신라의 소판에 재직했었고,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과 각간(角干)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견)
‘*경주이씨의 중시조이자 필자의 37대조인 이거명(李居明)’은 중시조 1세인 신라 말기 소판(신라 17관등 중 3관위) 관직에 역임하였습니다.
이는 목은 이색이 찬한 익재공의 묘지명에서 중시조 소판공 이거명이 시조 이래 최초의 ‘경주 이씨’로 밝혀졌습니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과 각간(角干)을 지냈다.’
- 대종보 기록에 중시조 2세 병부령공(휘 금현)은 신라 말에 활동한 분으로 병부를 총괄하는 수장인 병부령(兵部令) 벼슬을 하였지 더 높은 각간(角干) 벼슬의 기록은 없습니다.
* 현재까지 경주이씨에 관한 모든 자료는 1987년도 간행 '정묘보'. 즉 '경주이씨 대종보'에 게재된 내용을 뿌리의 근간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