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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의 유래’ 오류 수정 - 9

녹전 이이록 2019. 2. 28. 09:21

경주이씨의 유래오류 수정 - 9



제목 경주이씨 유래라는 장문의 글입니다.


  원 제목 경주이씨의 유래와 역사의 글에 다른 자료를 보완하여 쓴 글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료를 모아  글을 써 올렸으나 잘못된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은 .............로 나타내고 이견과 소견이 다른 부분에는 * 표시를 한 후 아래에 [...........]로 나타낸 뒤 소견)으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1930년 현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충청북도 청원군(淸原郡)일원, 충청남도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봉동면(鳳東面), 임실군(任實郡) 덕치면(德峙面),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화산면(花山面), 무안군(務安郡)ㆍ영암군(靈岩郡)ㆍ진도군(珍島郡) 일원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경상북도의 경우는 달성군(達城郡) 성서면(城西面), 의성군(義城郡) 다인면(多仁面), 월성군(月城郡 ; 지금의 경주시) 천북면(川北面)ㆍ강동면(江東面), 청도군(淸道郡) 청도읍(淸道邑), 상주군(尙州郡) 낙동면(洛東面), 영일군(迎日郡)ㆍ경산군(慶山郡) 일원이 주요 세거지였다.


그리고 경상남도에서는 밀양군(密陽郡) 단양면(丹陽面), 남해군(南海郡) 삼동면(三東面), 울주군(蔚州郡) 일원,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동남면(東南面), 정주군(定州郡) 임포면(臨浦面),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남면(南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오늘날 경주이씨 자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은 전라남도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망호리(望湖里)이다.


이곳에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처음 자리 잡은 것은 4백여 년 전, 필자의 21대조이자 파시조(派始祖)이신 *익재공 이제현(李齊賢)9대 손인 이기(李琪)가 을묘사화(乙卯士禍)를 피해 이 마을로 오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이 마을 1백여 가구가 경주이씨 자손들이다.


[ *익재공 이제현(李齊賢)9대 손인 이기(李琪)]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9^(=9^. 9대 후손(=9세 후손). 익재공의 8대손(=8세손)인 중시조 26세 이번기(李璠琦)


중시조가 1. 익재공이 17. 이반기가 26세로 이반기는 중시조 26세이고 익재공 9세 후손입니다.


익재공 9세 후손은 9대 후손으로도 말하고 한자어는 9代孫(=9世孫)이나 이는 우리말 해석으로 9^(=9^)으로 ^ 표시로 띄어 써야 우리말로 바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중시조 26세 이반기(李璠琦)는 익재공(益齋公)9^(=9^. 9대 후손(=9세 후손). 익재공의 8대손(=8세손)으로 읽고 말을 해야 바릅니다.


여기에서 경주이씨의 고려조 이후의 씨족사(氏族史)를 다시 한 번 정리한다.


영남지방의 *경주에서 천년동안 경주에서 세거(世居)하던 경주이씨의 후손들은 신라가 패망하면서부터 고려조의 왕도인 개경으로 강제 이주당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 고려조가 패망하고 조선이 창건되자 조선의 수도인 한성(漢城)으로 옮겨와 조상전래의 지능과 노력으로 수많은 상신(相臣; 재상급 신하)과 공신(功臣)을 배출하며 명문거족의 지위를 누리다가 앞서 기술한 대로 포악한 군왕과 붕당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유배(流配)를 당하고 피난을 하는 등 그 세거지가 조선 8(朝鮮八道)로 분산되었다.


*때문에 시조 이후의 계대(系代)마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백사파(白沙派)무진보(戊辰譜)’에서 중시조 이후의 28대에 이르는 실전세계를 찾아 수록했고, 그 이후 *1890년대 광무연간(光武年間)갑진보(甲辰譜)’에서 시조 이후 35대에 걸친 실전세계를 다시 찾아내어 수록함으로써 잃어버린 뿌리를 그런대로 규명했다고 전한다.


[*경주에서 천년동안 경주에서 세거(世居)하던 경주이씨의 후손들은 신라가 패망하면서부터 고려조의 왕도인 개경으로 강제 이주당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 고려조가 패망하고 조선이 창건되자 조선의 수도인 한성(漢城)으로 옮겨와 조상전래의 지능과 노력으로 수많은 상신(相臣; 재상급 신하)과 공신(功臣)을 배출하며 명문거족의 지위를 누리다가 앞서 기술한 대로 포악한 군왕과 붕당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유배(流配)를 당하고 피난을 하는 등 그 세거지가 조선 8(朝鮮八道)로 분산되었다.]


소견)


경주이씨의 세거지가 조선 8도로 분산된 이유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천년동안 경주에서 세거(世居)하던 경주이씨의 후손들은 신라가 패망하면서부터 고려조의 왕도인 개경으로 강제 이주당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고 그 고려조가 패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의 수도인 한성(漢城)으로 옮겨와 조상전래의 지능(?)과 노력으로 수많은 상신(相臣; 재상급 신하)과 공신(功臣)을 배출하며 명문거족의 지위를 누렸다는 내용은 조선 건국 초기의 내용이 아니고 고려 말의 내용입니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내용을 구분 없이 뒤섞어 구술하고 있습니다.


조선 초 세조 임금 때 포악한 군왕과 붕당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유배(流配)를 당하고 피난을 하는 등 이유로 그 세거지가 조선 8(朝鮮八道)로 분산되었다는 뜻인데 그러한 조상님은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은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가 세거한 것입니다.


판윤공께서 세조(수양대군)의 포악한 정치에 낙남(落南)하여 울산광역시 두서면 구량리(당시는 경주부慶州府 남면南面 남중리南中里) 로 이거한 것을 조상님들 모두가 이거하여 조선 8도에 분산한 것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서술입니다.


[*때문에 시조 이후의 계대(系代)마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백사파(白沙派)무진보(戊辰譜)’에서 중시조 이후의 28대에 이르는 실전세계를 찾아 수록했고,]


소견)


시조 이후의 계대(系代) 마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백사파(白沙派)무진보(戊辰譜)’에서 중시조 이후의 ‘28대에 이르는 실전세계를 찾아 수록한 것이 아닙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 기록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 승려의 삼국유사에 기록으로 정리되었으나 그 내용이 일치하지를 않습니다.


그 일예로 6촌장의 경우 삼국사기에는 북에서 내려온 유민으로, 삼국유사에는 천강설(天降設)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경주 이씨 실전 상계는 신라시대 천년 간의 세계가 실전되고 있으나 시조가 양산촌장이고 휘는 알평이오. 신라 건국당시 6촌장 회의(화백회의)를 주재하였고 유리왕 9(서기 32)에 이씨(李氏)로 사성(賜姓)받은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기타 여러 문헌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알평 시조이후 원대손 소판공 휘 거명까지는 대수(代數)는 물론 선세조(先世祖)의 휘자(諱字)까지도 알 길이 없으니 그러기에 실전세계(失傳世系)’라 하는 것입니다.


이조중엽에 각 성씨들이 족보를 간행하였는데 우리 경주 이씨도 1613년경 광양현감 종언(宗彦) 선생께서 동종계(同宗契)를 창설하였으나 백사(白沙) 선생의 서문(序文)만 전해오고 1614년에는 서계(西溪) 득윤(得胤. 德胤득윤) 선생이 수초(手抄)하였다는 단권보(單券譜)도 있다고 하였으나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 후에 발간된 갑자보(1684). 무진보(1748). 갑술보(1814)를 갑무갑 3대보(甲戊甲三大譜)라 하고 우리 경주이씨의 근간보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00년 초까지 어느 족보에도 나타나지 않던 실전세계가 처음 언급된 것은 1868년 무진간(戊辰間) 백사파보 건곤 2권중 곤권 말미(坤卷末尾)에 귤산(橘山) 휘 유원(裕元)선생이 쓰신 발문(跋文)급량부 대인으로부터 소판공에 이르기까지 실전한지가 천년이 되었다.


그런데 서경(평양)에서 바르지 못한 28대를 등초하여 왔는데 관제가 삼한과 더불어 다름이 있으니 실적이 아님이 틀림없다.’라고 하며 ‘28대 실전세계가 사실적이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로보아 [백사파(白沙派)무진보(戊辰譜)’에서 중시조 이후의 ‘28대에 이르는 실전세계를 찾아 수록했고..] 등의 기술은 잘못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