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의 유래’ 오류 수정 - 5
■ ‘경주이씨의 유래’ 오류 수정 - 5
제목 ‘경주이씨 유래’라는 장문의 글입니다.
원 제목 ‘경주이씨의 유래와 역사’의 글에 다른 자료를 보완하여 쓴 글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료를 모아 글을 써 올렸으나 잘못된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원문은 【.............】로 나타내고 이견과 소견이 다른 부분에는 * 표시를 한 후 아래에 ▲[...........]로 나타낸 뒤 소견)으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 중시조(中始祖)
우리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지고 있는 경주이씨는 신라 창건 당시의 6부(部) 촌장이자 화백회의의 의장이었던 알천양산촌장 이알평(李謁平 ; 경주이씨가 아닌 분들의 편의를 위해 경칭敬稱은 생략한다. 이하 다른 이도 같다.)을 시조로 하고, *시조의 36세손인 신라 9주(州) 수장(首長) 중의 한 사람이었던 소판공(蘇判公: 지금의 시도지사)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있다.】
소견)
소판(蘇判)은 잡판(迊判). 迊飡(잡찬). 迊干(잡간). 영판(迎判)으로도 불리우고 17등 관계 중 제 3등 관제이다.
신라 통일기에 고구려 지역에는 한주, 삭주, 명주, 백제 지역에는 웅주, 전주, 무주, 신라와 가야 지역에는 상주, 양주, 강주 등 9주를 설치하고 ’소판‘을 두었다
▲[*시조의 36세손인 신라 9주(州) 수장(首長) 중의 한 사람이었던 소판공(蘇判公) ]
소견)
*‘시조의 36세손인...’은 잘못 헤아려 읽었습니다.
‘시조의 36세손’이라면 시조 37세를 ‘시조의 36세손’으로 읽고 말합니다.
시조 36세는 '시조의 35세손'으로 읽고 말합니다.
‘시조세수’가 있으면 ‘시조세수’로 읽고 이를 ‘시조의 몇 세손’으로 말하지만 ‘경주이씨 시조세수’는 시조 2세인 시조의 아들부터 중시조(소판공 휘 거명) 앞대(중시조 아버지)까지의 계대가 전해오지 않아 ‘시조세수’로는 말하지 않고 ‘시조의 몇 세손’으로도 헤아려 말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정확한 계대가 전해져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시조 36세손’이라고 한다면 시조부터 소판공까지 계통이 정확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소판공을 ‘중시조’라고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시조의 아들인 ‘시조의 1세손’ 즉 2세부터 중시조이신 소판공 앞까지의 약 900년간의 조상님들의 계대 기록은 아직은 어디이고 간에 없습니다.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발견된 ‘28대로 된 실전세계’와 ‘35대로 된 실전세계’는 믿을 것이 못되는 잘못된 실전세계의 계대이었습니다.
그러함애도 불구하고 중시조님을 ‘시조 28세라거나 ‘시조 36세’라고 칭하거나 ‘시조의 28세손‘ . ‘시조의 36세손’이라고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중시조님은 ‘시조의 원대손(遠代孫)’으로 읽고 말합니다.
'시조의 36세손'이 아닌 ‘시조의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9주(州) 수장(首長) 중의 한 사람이었던 소판공(蘇判公)으로 나타내어야 합니다.
【경주이씨는 시조 이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무려 1천여 년 간의 계대가 확인되지 못하는 우여곡절이 있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1367년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우리 문중의 파시조(派始祖)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시조의 원대손(遠代孫)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이때부터 *소판공(蘇判公)이 중조(中祖) 곧 기세조(起世祖)로 확정되기에 이르렀고, *조선 말기에 이르러 시조 이후 중시조까지의 실전(失傳) 세계(世系)를 찾아내어 전체의 계대가 규명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때 찾았다는 실전세계는 그 신빙성을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은 다른 파일에서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이때부터 소판공(蘇判公)이 중조(中祖) 곧 기세조(起世祖)로 확정되기에 이르렀고,]
소견)
소판공(휘 거명)은 시조이후 약 900년 만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찬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시조의 원대손(遠代孫)'으로는 최초의 경주이씨로 밝혀져 후손들이 중시조로 받들고 중시조 1세로 읽게 된 것입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시조 이후 중시조까지의 실전(失傳) 세계(世系)를 찾아내어 전체의 계대가 규명되었다고 전한다.]
소견)
조선말기 즉 1902년에 언급되고 1932년 분적종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으로 발굴되어 게재되었다는 ‘35대로 실전세계’를 찾아내어 전체 계대가 규명된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이 ‘35대로 된 실전세계’는 중앙화수회에서 조사 분석한 결과 사실적이지 못한 계대로 밝혀져 ‘실전 세계’로 인정받지 못한 자료이고 이로써 계대가 규명된 것이 아닙니다.
【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이(李)씨의 본관은 237본이나 되는데, 대체로 한국계와 중국계, 그리고 기타계
열로 나뉜다.
한국계는 모두 신라 6성의 하나인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자세한 것은 뒤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신라 6성(六姓)이란 『삼국사기(三國史記) 1권』 ‘신라본기(新羅本紀)’에서 기록하고 있는 신라 유리왕 재임 9년(서기32년)에 당시의 6촌장에게 사성(賜姓)한 성씨들을 말한다.
양산촌장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 고허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 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 진지촌장 지백호(智白虎)에게는 정씨(鄭氏), 가리촌장 기타(祈陀)에게는 배씨(裵氏), 고야촌장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를 하사한 것 등이 그것이다.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사당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靑良面) 동천리(東川里) 양천(良川) 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중시조 생존당시의 이 지역은 지금의 경주시 지역이었다.】
▲[*중시조 생존당시의 이 지역은 지금의 경주시 지역이었다.]
소견)
‘중시조인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묘단(墓壇)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靑良面) 동천리(東川里) 양천(良川) 마을에 소재하는 것으로 당시는 경주 지역이었고 훗날 판전공파 대종회에서 후손들이 판전공(15세 휘 강)과 함께 묘단을 설치하고 사당을 지어 모신 것입니다.
【□ 분적종(分籍宗)
다음은 경주이씨의 주요 세거지(世居地 : 성씨의 일족이 모여 사는 마을로 옛날에는 세거지가 양반의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였음)와 분파(分派) 형성경위를 간략하게 알아본다.
신라의 왕성 경주에서 신라왕이 사성(賜姓)하여 태어난 경주이씨의 세거지(世居地)는 당연히 경주여야 하나, 주요 씨족들이 역대왕조의 부침(浮沈)과 붕당정치의 틈바구니에서 볼모로 강제이주를 당했는가하면, 귀양을 가고 피난을 가는 등 곡절을 겪은 결과 이제는 전국 일원에 그 세거지가 분포되어 있다.
신라의 창건 주역이었던 경주이씨의 후예들은 1,000여 년을 신라의 진골(眞骨) 귀족으로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해 왔었다.
부패해질 대로 부패해진 신라가 고려에 의해 패망하자 경주 이씨들의 후예들은 진골 귀족으로서의 사명감과 고려왕조의 볼모정책에 따라 그 주력인사들이 고려의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해진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천 여리나 떨어진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 ; 고려의 수도, 지금의 개성)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나라는 패망하였으나 문무백관으로 재임하던 귀족들이 그들이 섬겨오던 왕을 호종하여 1천여리가 넘는 고려의 왕성으로 볼모가 되어 잡혀간 것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정묘보(丁卯譜)’에 의하면, *경주이씨가 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 : 황해도 남동부에 있는 군(郡)으로 주산업은 농업으로 콩, 조, 밀, 인삼, 담배 따위가 많이 난다. 군청 소재지는 금천면이다.)에 대대로 분묘(墳墓)를 썼던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가 패망한 이후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명신의 지위를 누리던 경주이씨의 선조들이 고려의 건국당시 개경으로 강제이주 당하여 인접한 금천(金川)에 터를 잡았다는 근거가 된다.
*금천(金川)에 터를 잡은 경주이씨는 초기 고려에서는 다른 성씨의 신라 유신(新羅諛臣)들과 함께 중신의 자리에 올라 고려조의 중신들과 대립하면서 개혁을 위한 왕권장악을 꾀하다가 실패하기도 했었다.
개혁운동의 실패는 당연히 신라유신 세력의 배척정책의 단초가 되었고, 이에 따라 경주 이씨도 예외 없이 관직에의 진출이 막혀버렸다.
*오랜 세월동안 관직에의 등용이 막혔던 신라조의 후예 중 경주이씨의 경우 우리 문중의 35대조에서부터 겨우 향직(鄕職)에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관직의 길이 트인 경주이씨 후예들은 초인적 정진을 거듭하여 여말(麗末)에 이르러서는 수대에 걸쳐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에까지 진출하는 등 삼한(三韓)의 명문거족이 되어 개경(開京) 일원에서 세거(世居)하였다.
*그러나 고려조 말부터 경주이씨의 세력이 약화되자 상대 당파의 모략으로 벼슬을 버리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그 세거지(世居地)가 전국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경주이씨가 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에 대대로 분묘(墳墓)를 썼던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소견)
우봉 도리촌 선영 묘단비(牛峯桃李村先塋墓壇碑)에 묘소의 위치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익재 선생 휘 제현(17세)의 묘소와 그 자제 밀직사 휘 창로(18세)의 묘소가 현재 도리촌 가운데 있어서 자손이 대대로 수호하고 그 위에 선조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고 보첩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태복야 열헌 휘 핵(15세)과 그 자제 검교정승 동암 휘 진(16세)과 다음 자제 대제학 송암 휘 세기(16세)와 그 자제 상서 휘 과(17세)의 3대에 4분묘가 익재 묘소의 위 날 등에 있다.
이 중 익재의 묘소와 밀직의 묘소만이 확인되고 전할 뿐이다.]
[후손 귤산공(橘山公) 휘 유원(裕元- 고종 때 영의정)이 익재 묘소를 참배라고 두루 여러 선조의 산소를 찾아보았는데 익재 묘소위에 두 분묘가 있고 밀직 묘소의 위에 또 큰 분묘가 둘이 있으니 3대에 4분묘가 맞기는 하나 분별할 수가 없다.]
즉 17세 익재공 휘 제현(동암공 차자)과 18세 밀직사 휘 창로(익재공 4자)의 분묘는 확인이 되고 그 분묘 위에 15세 열헌공 휘 핵. 16세 동암공 휘 진. 16세 송암공 휘 세기. 17세 상서공 휘 과의 분묘가 있으나 누구의 묘인지는 확인이 안 된 것입니다.
중시조 15세 열헌공(휘 핵) 이전에는 이곳에 묘를 쓴 기록은 없습니다.
열헌공 이후 중조 16세 동암공 휘 진(열헌공 차자). 16세 송암공 휘 세기(열헌공 3자). 17세 익재공 휘 제현(동암공의 차자). 17세 상서공 휘 과(송암공의 3자). 18세 밀직사 휘 창로(익재공 4자) 등 4대에 걸쳐 분묘를 조성한 것은 기록으로 알 수 있으나 그외는 분묘를 금천에 쓴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