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의 유래’ 오류 수정 - 4
■ ‘경주이씨의 유래’ 오류 수정 - 4
제목 ‘경주이씨 유래’라는 장문의 글입니다.
원 제목 ‘경주이씨의 유래와 역사’의 글에 다른 자료를 보완하여 쓴 글로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료를 모아 글을 써 올렸으나 잘못된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은 【.............】로 나타내고 이견과 소견이 다른 부분에는 * 표시를 한 후 아래에 ▲[...........]로 나타낸 뒤 소견)으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 자랑스러운 우리들의 경주이씨 세계(世系)
시조1세 (표암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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謁平 | 侑 | 它 | 仲嘉 | 奭 | 文祥 | 昉 | 秀章 | 綏 | 起貞 |
알평 | 유 | 타 | 중가 | 석 | 문상 | 방 | 수장 | 수 | 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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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善 | 成立 | 曙 | 啓煊 | 傑 | 宣璋 | 基膽 | 仁興 | 擴 | 善楨 |
미선 | 성립 | 서 | 계환 | 걸 | 선장 | 기담 | 인흥 | 확 | 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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棣 | 泰暉 | 友榮 | 駿 | 紹 | 敬智 | 頊 | 元長 | 漢老 | 季湯 |
체 | 태휘 | 우영 | 준 | 소 | 경지 | 욱 | 원장 | 한노 | 계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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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조1세 (소판공) | 2세
| 3세
| 4세
|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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祹 | 嗣彦 | 岐 | 禧斗 | 誡 | 居明 | 金現 | 金書 | 潤弘 | 承訓 |
도 | 사언 | 기 | 희두 | 계 | 거명 | 금현 | 금서 | 윤홍 | 승훈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11세
| 12세
| 13세
| 14세
|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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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復 | 偁 | 侈連 | 寵暹 | 春貞 | 玄福 | 宣用 | 升高 | 得堅 | 翮 |
주복 | 칭 | 치연 | 총섬 | 춘정 | 현복 | 선용 | 승고 | 득견 | 핵 |
16세
| 파시조 (익재) | 18세
| 19세
| 20세
| *입향조 (판윤) | 22세
(부사공) | 23세
(군수공) | 24세
(찰방공) | 25세
(병사공) |
瑱 | 齊賢 | 瑞種 | 元益 | 瑄 | 之帶 | 點 | 元林 | 光曾 | 升亨 |
진 | 제현 | 서종 | 원익 | 선 | 지대 | 점 | 원림 | 광증 | 승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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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견)
*위 계대는 1932년 분적종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으로 발굴되어 게재되었다는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계대입니다.
* 시조 ‘1세 알평 ~ 35세 계’까지의 세계(世系)와 세수는 모두 삭제하여야 합니다.
이유는 1902년부터 언급된 ‘35대로 된 실전세계’가 1932년 분적종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으로 게재되고 1987년도 간행 경주이씨 대종보인 ‘정묘보’에도 참고자료로 게재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조사 분석 결과 ‘35대로 된 실전세계’ 사실적이지 않는 계대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정묘보인 대종보 총편에 제목 ‘실전세계의 고찰’이란 논문으로 게재되어 있습니다.
‘시조세수’로 읽은 1세 ~ 60세는 삭제하고 정확한 중시조 1세부터 ‘중시조세수’로 나타내어야 합니다.
* ‘익재공파’ 대파시조는 중시조 17세 익재 이제현이고 ‘입향조 판윤공’이라함도 잘못된 표기입니다.
중시조 21세 죽은 이지대는 증 한성판윤으로 ‘판윤공파’ 중파시조로 경주에 처음 들어와 세거한 할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입향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시조 표암공(휘 알평)은 표암봉에 강하하여 그 후손이 신라 1000년 동안 세거하였고 고려 건국시 개경(개성), 조선조에 한양(서울)에서 살다가 그들 중 한 분인 판윤공(휘 지대)이 낙남하여 경주에 왔는데 판윤공 이전에 경주 이씨들이 경주에 많이 세거한 것으로 보면 판윤공을 ‘입향조’라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두서면 구량리’나 ‘천군동 피막’ , ‘정래동 아동’의 입향조라고 하면 말이 되나 경주 입향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하에서는 경주이씨 선현들의 행적과 부침(浮沈)의 역사를 시대별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우선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은 *신라의 성골(聖骨)이나 진골(眞骨) 귀족들만이 오를 수 있는 소판(蘇判)의 직을 역임했는데, 소판은 신라조의 지방수령직(지금의 시도지사)으로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공도 소판 출신이었다.】
▲[*신라의 성골(聖骨)이나 진골(眞骨) 귀족들만이 오를 수 있는 소판(蘇判)의 직을 역임했는데,]
소견)
소판(蘇判)은 잡판(迊判), 잡간(迊干)이라고도 한다.
진골(眞骨)만이 받을 수 있는 관등으로, 공복(公服)의 빛깔은 자색(紫色)이었다.
위 글에서 소판은 ’성골(聖骨)이나 진골(眞骨) 귀족들만이 오를 수 있는..‘이라고 하였으나 성골(聖骨)은 왕족으로 왕 혈통이고 소판은 진골만이 오를 수 있어 ’성골‘은 삭제하여야 합니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전술한 대로 시조 이후 중시조(中始祖) 때까지의 *신라시대 기록은 계대(系代)만 확인되었을 뿐 일체의 행적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시조가 신라를 창건한 개국공신이었고, *중시조의 관직이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소판(蘇判)'의 벼슬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조이후 중시조 때까지도 대대로 왕족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 기록은 계대(系代)만 확인되었을 뿐 일체의 행적이 남아있지 않다.]
소견)
1932년 분적종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으로 발견되어 게재하였다는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계대는 사실적이지 못한 꾸며 만든 계대로 이를 보고 신라시대 기록은 계대(系代)만 확인되었다고 하는 모양이나 시조 2세부터 중시조 앞대까지 약 900년간의 계대는 모르기 때문에 계대도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중시조의 관직이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소판(蘇判)'의...]
소견)
중시조님의 관직이 신라 말 ’소판‘관직으로 소판은 3두품으로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관직입니다.
성골은 왕이 되는 골품으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러던 중 *지난 1930년대에 시조이후 8대파 분파(分派) 때까지의 잃어버린 공동선조의 기록을 찾았다 해서 한동안 소란을 피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시의 실전(失傳)기록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일부 후손들이 찾았다는 시조 이후 28대 또는 35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는 그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는 처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도 다른 파일에서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 1930년대에 시조이후 8대파 분파(分派) 때까지의 잃어버린 공동선조의 기록을 찾았다.]
소견)
짐작컨대 1930년대라는 말은 1932년은 분적종 합천이씨의 세보인 ’임신대보‘ 간행년도로 처음으로 ’35대로 된 실전세계‘를 발견하여 족보에 게재하였다는 말일 것 같고 ’8대파 분파 운운‘은 경주이씨 대파 분파가 14개 대파로 분파하였으니 이때에 ’잃어버린 공동선조의 기록을 찾았다.‘라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소판공(蘇判公) 이후 경주이씨는 천자만손(千子萬孫)으로 번성하여 *고려조(高麗朝)에서만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 4명을 배출했고, 조선조에서도 과거급제자 178명, 재상(宰相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8명, 대제학 3명, 공신 12명, 청백리 10명 등을 배출하는 등 삼한(三韓)의 대표적인 명문거족으로 성장해 왔다.】
▲[*고려조(高麗朝)에서만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 4명을 배출했고,]
소견)
고려조에서는 중시조 9세 시중공 이총섬과 중시조 17세 익재 이제현 두 분만이 문하시중 벼슬에 올랐습니다.
익재공이 우정승과 문하시중 벼슬을 4차례나 하였습니다.
중시조 9세 시중공 총섬의 조부(사록공 휘 칭)와 부(휘 치련)는 시중공이 귀하게 됨으로 증직을 받은 것이나 父 휘 치련의 행적 사항에는 구보(舊譜)에 闕而不錄(궐이불록 – 비어서 기록하지 않음)으로 기록이 없습니다.
’고려조(高麗朝)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 2명을 배출했고‘라고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