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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이씨(慶州李氏) - 1

녹전 이이록 2018. 7. 30. 09:37

경주 이씨(慶州李氏) - 1



모 신문에 K선생께서 <18>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제목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아래와 같이 잘못된 내용으로 기술된 곳이 있어 이를 지적하고 바른 내용으로 수정합니다.


잘못된 곳은 원문에 [* 표시를 하고 뒤에 바른 내용]으로 수정합니다.


[원문]


인구 142전주이씨 다음으로 많아합천· 진주· 원주 등 수많은 이씨 본산

문과급제자 178공신 10여명 배출익재 이제현· 백사 이항복 등 유명 인물성철 스님· 이병철 전 회장도 같은 가문.

 

경주이씨는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에서 유래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원전 117년에 알평공이 하늘에서 신라의 영산(靈山) 중의 하나인 [*경주 서북에 있는 경주 동북에 있는] [*금강산(金剛山)의 표암봉(瓢巖峰) 진한 땅 표암봉. 현 소금강산(小金剛山) 지구의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왕(儒理王) 9년 봄에 6()의 이름을 고쳤는데, 양산부(楊山部)는 급량부(及梁部)(李氏)로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崔氏)로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孫氏)로 우진부(于珍部)는 본피부(本彼部)(鄭氏)로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裵氏)로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薛氏)로 했다고 전한다.


이알평의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사로. 진한)6촌의 하나였고, 알평(謁平)6촌의 부족사회를 영도하는 수장이었다.


경주이씨 대종보에 따르면, 그는 6부족의 촌장과 협의한 후 박혁거세를 왕위에 세우고, (신라 건국 후) 벼슬은 아찬(阿粲)에 올라 군사업무를 맡아보았다.


그 후 유리왕 9(기원전 32), 신라 건국의 공을 인정받아 이씨(李氏) ()[*하사(下賜) 사성(賜姓)] 받았다고 한다.


법흥왕 23년에는 [*익호를 문선공(文宣公)으로 시호(諡號)를 충헌공(忠憲公)으로 하였고,]


소견)


시호(諡號)를 비슷한 글자인 익호(謚號)로 잘못 읽었습니다.


문선공(文宣公)은 공자님의 시호로 함부로 이를 시호로 받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아 일부 다른 글에 올라 있는 '충헌공(忠憲公)'이 시조님의 시호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조님께 주어진  문선공(文宣公) 시호가 의아해서 조사해 보았더니 중앙화수회에서 발간한 1926년 '표암'지에 한자로 '文宣'이라 기록하고 있다.


윗 어른들이 쓴 몇 편의 글에는 忠憲이라 기록하고 있다.)  


무열왕 3년엔 은렬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조 이알평 이후 35대까지 [*세손이 계대가] 전해 내려오지 않고, 신라 말에 들어와 소판(蘇判) 벼슬을 한 진골 출신 (遠代孫원대손) 이거명 [*36 삭제. 李居明)]이르러 본관 성씨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주이씨는 고시조(古始祖)를 이알평으로, 중시조(中始祖)를 이거명으로 삼고 있다.


경주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424866명으로, 이씨 중에서는 조선왕조를 개국한 전주이씨(2609890)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또한 본관별 성씨 순위에서도 경주김씨 다음으로 많은 5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경주이씨에서 수많은 이씨들이 분관되어 나감으로써 우리나라 이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이씨의 연혁과 분파

[*경주이씨는 시조 이알평에서부터 현재의 희()자 돌림까지 75대를 내려오고 있다. 경주이씨는 시조 이알평에서부터 중시조 부친대까지는 전연 계대를 알 수 없어 시조세수로는 말하지 않고 중시조 이거명부터 현재의 희()자 돌림(항렬)까지 40(=40)를 내려오고 있다.]


씨족의 역사도 2000년이 넘는 셈이다.


하지만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소판공 이거명 전까지 *35대는 실전되어 전해지고 있지 않다. ]


소견)


시조의 아들 대부터 중시조의 아버지 대까지 약 900년은 계대가 실전되어 알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위 글에서 ‘35대가 실전되었다.’고 하나 35대인지 36대인지 40대인지를 확실히 모른다.


다만 1세를 30년으로 보고 약 900년간의 계대를 모르니 약 30대로 생각할 수 있으나 1902년에 처음 발견된 ‘35대로 된 실전세계에서 실전된 계대를 35대로 기록하여 놓았기 때문에 ‘35운운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보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설명대로 이거명 이전에도 이씨 성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소견)


모 학자의 성씨 연구 발표에 우리나라의 성씨는 신라는 진흥왕 이후에 성씨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워 우리나라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아예 무시해 버리고 이 연구논문을 근거로 경주이씨의 성씨는 이거명 이전에도 이씨 성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라고 경솔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는 남의 성씨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 함부로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성씨는 진흥왕 이전에 기록된 이름은 모두 잘못된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급량부 ○○이런 식인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장수왕, 신라의 진흥왕 때부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는 이알평에 대한 기록이 사실이라고 판단하긴 쉽지 않다.]


소견)


위 경주이씨에 대한 글을 올린 K선생은 아래와 같이 소견을 피력하고 있다.


시조 2세인 시조의 아들 대부터 소판공 이거명 이전까지 35대의 계대는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하기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설명대로 알평이 양산촌(급량부)의 촌장으로 급량대인으로 유리왕 때 이씨 성을 사성받은 기록 등은 있으나 계대가 전해지지 않는 만큼 이거명 이전에도 이씨 성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장수왕, 신라의 진흥왕 때부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는 이알평에 대한 기록이 사실이라고 판단하긴 쉽지 않다.


그리고 급량부 ○○이런 식의 이름이기에 우리나라 성씨는 진흥왕 이전에 기록된 이름은 모두 잘못된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6촌과 촌장. 6촌장의 성씨 사성. 알천 안상의 회의. 신라 건국에 대한 기록은 모조리 잘못된 기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것은 인정하고 어느 것은 부정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다.


이씨 성은 그 시조를 알평으로 시작하고 중시조를 소판공 이거명으로 하여 그 뿌리를 이어가고 있는데 K선생은 경주이씨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따라서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소판공 이거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경주이씨의 중시조는 소판공 이거명이다.]


소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경주이씨의 시조를 형식적인 시조와 실질적인 시조로 나누어 마음대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 경주이씨 150만 후손들은 시조는 이알평, 중시조는 이거명, 중흥조는 15세 열헌공 이핵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그런데 남의 성씨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 시조를 부정하고 중시조를 실질적인 시조운운 이라고 하는 등 함부로 말한다면 K선생의 집안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소판공 이거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중시조 이거명이 실질적인 시조라고 하며 경주이씨 시조 알평은 시조임을 부정하고 있다.


남의 성씨의 시조와 성씨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잘못된 기록이라 하고 중시조를 실질적인 시조운운 이라고 함은 한 성씨를 완전히 부정하는 짓이다.